모 기술연구소에서 일을 하다가 창업 대열에 합류한 K박사는 동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느끼며 짐을 꾸려야 했습니다. 마음이 맞는 몇몇 후배와 의기투합, 회사를 만들기로 한 것이 마치 ‘반란군 수괴’처럼 비춰진 모양입니다. 연구소에 남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요 인력을 곶감 빼먹듯 데려가는 K박사가 밉살스럽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내가 꼬신 것이 아니라, 애들이 같이 해보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고 변명을 했지만, 믿어주는 사람이 없어 아예 입을 다물기로 했습니다. K박사가 더욱 곤혹스러웠던 것은 일부 사람들의 비아냥 이었습니다. 짐을 싼 뒤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면서 악수를 나누던 중 입사 동기들로부터 힐난을 들은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돈이 그리도 좋으냐?” “많이 벌어라” “코스닥에 언제 가냐? 돈벼락 맞겠네”

다음은 K박사가 보내주신 3통의 이메일 내용 중 일부 입니다.(교정 작업을 거쳤으며 일부 논리 전개를 좀 바꾸었습니다. K 박사님, 죄송합니다.)

<마치 저를 돈 벌레 대하듯 하더군요. 순진한 연구원들을 꼬드겨 허황된 대박의 꿈을 심어줬다나요? 그럼 자기들은 돈 욕심이 없는 사람들인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덕에 내려가 보세요. 주식 투자에 골몰하는 연구원들, 무진장 많습니다. HTS를 컴퓨터에 띄워 놓고 하루종일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예요. 시황이 좋아지기라도 하면 누가 얼마나 벌었고, 대박을 터뜨렸다는 얘기가 금방 떠돕니다. 밤만 되면 주식 스터디 소모임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녁 초빙을 자주 받아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투자 고수 연구원도 있습니다.

걸핏하면 자리를 비우는 연구원이 있길래 뭣 때문인가 알아봤더니 땅을 보러 다니더군요. 한 선생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온 사람들 중에는 여윳돈을 굴리는 사람들이 꽤 됩니다. 집 값이 상대적으로 싸기 때문이지요. 꽤 좋다는 아파트(예컨대 엑스포아파트) 40평대의 가격이 서울에선 30평대 전세 값도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는 돈을 가지고 재테크를 하겠다는 데 누가 말리겠습니까만, 자기 자신도 돈 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 남이 돈 좀 벌겠다는 것을 놓고 돈 독 올랐다느니 어쩌니 하는 것은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것이 아닐까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많은 돈을 벌고 싶습니다. 연구원으로 평생 일하다가 나중에 재수 좋으면 임원이 되겠지만, 그래봐야 얼마나 벌겠습니까. 회사에서 어느날 갑자기 집에 가서 애 보라고 하면 끝장이지요. 이렇게 늙어 죽느니 소신껏 돈을 많이 벌어서 일찍 은퇴한 다음에 집사람하고 해외 여행도 좀 다니고 여유롭게 살려면, 역시 사업을 하는 수 밖에 없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후배들이 사업을 하자고 했을 때 단번에 OK를 한 것도 이래서 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억울합니다. 저는 7년이 넘게 연구소에 다니면서 주식 투자에 한 눈을 팔아본 적도 없고 맡은 일만 열심히 해온 모범 연구원이라고 자부했었는데, 사람들이 자꾸 돈에 미친 놈으로 보니까 이상하게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자신감도 떨어집니다.

돈 많이 벌겠다는 결심으로 사업을 하기로 했는데, 사람들이 그게 아니라고 하니까 내가 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후배들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정말로 제가 잘못한 것일까요. 돈에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 것인가요. 답답하기만 합니다. 사업에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르겠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자꾸 힘이 빠져서…>

K박사의 이메일을 읽다가 자꾸 쓴 웃음이 나왔습니다. 마음 고생이 심하신 것 같아서 안쓰럽기도 합니다. 이 분이 격앙된 감정으로 메일을 쓰신 탓에 동료들에 대한 서운함과 비난도 섞여 있습니다만, 그 부분이 이번 논의의 본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단 K박사 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는 이런 경험을 갖고 계신 분들이 꽤 많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돈에 대한 욕심’을 내보이는 즉시, 속물 내지는 돈 벌레로 간주당할 가능성이 높은 세상에 우리는 아직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이슬만 먹고 살겠다’는 정도의 결심을 보여주어야 ‘괜찮은 친구’라는 호감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서비스를 유료화했다가 사용자들의 집단 반발을 경험했던 어떤 CEO의 촌평이 재미 있습니다. “땅 파서 장사하라는 속셈이나 다름 없지 뭐. 이용료 받겠다는 것을 도적질 하는 것처럼 생각하더라니까? 이럴 바에는 차라리 국민 모두가 집에 틀어 박혀서 사서삼경이나 읽는 나라가 되었으면 속이라도 시원하겠어.”

친한 사람들끼리 모인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돈 버는 얘기’가 주 메뉴가 됩니다. 두 가지 얼굴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지요. 남이 번 돈은 ‘억세게 재수가 좋아서’ 또는 ‘추잡하게 긁어 들인 것’인 반면, 내가 번 돈은 ‘떳떳하고 당당한 돈’ 입니다. 돈 많은 사람을 볼 때마다 ‘되게 거들먹거린다’, ‘돈이면 다냐’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돈을 벌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기 어렵습니다. 돈이 다 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이뉴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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