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나와 메일 박스를 열 때마다 야릇한 기대감에 흥분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럴 것입니다. ‘제품을 보자’ 또는 ‘거래를 트자’는 정도의 내용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반가운 소식이 올라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우스를 움직입니다.

저는 요즘, 여러분들이 보내주시는 다양한 글들을 접하는 맛에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사람의 생김새가 다르듯, 사연이 가지각색이고 생각도 천차만별입니다. 활력 넘치는 벤처에 계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어서인지 톡톡 튀는 기지와 유머가 넘치는 글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런 재미 때문인지 수시로 메일을 체크해 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상당히 심각한 내용의 메일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서는 하루 종일 찜찜한 기분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벤처 회사의 대표이사께서 보내주신 글인데, 제목이 ‘나는 과연 정정당당한가’로 되어 있었습니다. 수신 시각을 보니, 새벽 3시24분 입니다. (잠도 안 주무시고 글을 보내주신 것은 고맙지만, 건강 좀 생각하시지요.) 이 찜찜한 메일의 전문을 보자면, 이렇습니다.

<초창기부터 한상복 님의 글을 빼놓지 않고 잘 읽고 있습니다. 조그만 회사를 경영하는 대표이사로서, 많이 공감하고 또 배웠습니다. 벤처 뒤집기에 소개된 남들의 시행착오 사례를 보면서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하며 위안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요즘 님의 칼럼은 초기와는 달리 ‘군기(?)’가 좀 빠져 있더군요. 초창기의 치열한 비판의식을 잃어버리셨는지요?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하루가 멀다고 벤처 사건이 터져 나오는데, 이렇게 썩어빠진 곳에서 계속 사업을 영위하는 것이 짜증납니다. 빽 없고 줄 없으면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다 때려치우고 마누라, 애들 데리고 이민이나 가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패스21이라는 회사는 참으로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 회사를 신문에서 몇 번은 본 기억이 납니다. 주주들이 그렇게 빵빵하니 증자해가면서 돈을 조달해 펑펑 써댔겠지요. 한상복 님도 경제신문 기자 출신인데, 혹시 그 회사 주식 안 갖고 있으신가요? 하하하. 농담입니다.

벤처를 잘 모르는 주위 사람들 중에 “너희 회사는 괜찮으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요즘 들어 많습니다. 고향에 계신 저희 아버님이 자주 그러시지요. 당신 생각에는 벤처란 것이 걸핏하면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부류로 박혀 있나 봅니다. 신문 방송에서 허구헌날 떠들어 대니까 벤처를 한다면 모두가 초록이 동색인 걸까요. 그럴 때마다 “저는 거물이 아니라서 그런 사고를 못 친다”고 말씀을 드리는데, 그래도 계속 괜찮으냐고 물으시니 답답합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철렁하기도 합니다. 제 양심이 'OOO, 이 놈아. 너는 과연 떳떳한 경영자냐'하고 묻는 것 같습니다. 고백컨대, 저 역시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처음 증자를 할 때 “정치인을 주주로 영입하면 투자 받기가 쉽다”는 얘기를 듣고 줄을 대기 위해 동분서주 했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회사도 정치인을 끌어들여서 재미를 봤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어떤 큰 기업의 계약을 따내기 위해 명퇴 대상인 그 회사 부장을 임원으로 모시려는 시도도 해보았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만 합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박한 세상을 욕하면서 이제부터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줏대있게 살자고 다짐은 하는데, 그래도 마음이 허전합니다.

벤처 게이트가 매일 터져 나오니까 이 동네가 완전히 복마전으로 변해버린 것 같습니다. 사업을 한다는 것이 복마전의 한 가운데 팽개쳐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굳게 맹세합니다만, 또 다시 악마의 유혹이 손짓을 한다면 그걸 거절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더러운 꼴 안 보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전에 쓰신 글에 ‘이슬만 먹고 사는’ 대목이 있는데요. 진흙탕 속에서 과연 독야청청 할 수 있을까요. 한상복 님은 자신이 있습니까? 복마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OOO 올림>

대통령에 이어 법무장관, 검찰총장까지 ‘벤처비리 척결의지’를 결연하게 내놓는 것을 보면 우리 벤처들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복마전처럼 보입니다. 복마전(伏魔殿)이란 ‘마귀가 숨어 있는 전당(殿堂)’ 이란 뜻으로, 번지르르한 명목 아래 끊임없이 음모가 꾸며지고 있는 악(惡)의 근거지를 일컫는 말이지요.

정현준씨 사건에 이어 진승현, 이용호, 윤태식씨 사건에 이르기까지 온갖 추문이 연거푸 터지고 있습니다. 파내면 파낼수록 새로운 비리와 관련자들이 줄줄이 나오는 모양새가 마치 고구마 줄기를 잡아채는 것 같습니다. 그 줄기의 끝이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복마전’이란 표현이 가장 적합할 듯 싶습니다. 코스닥 열풍이 불 때 호화찬란하게 등장했던 신진세력들이 알고 보니, 권모술수와 협잡으로 남의 돈을 갈취해 온 범법자들이었으니 말입니다. 금융사고에서 횡령, 사기 혐의자를 넘어 마침내 살인자까지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 가관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벤처 추문’이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입니다. ‘다음은 누구 차례냐’는 구구한 억측이 서울 강남 일대에 나돌고 있습니다. 특정 업체 또는 대표이사를 실명으로 거론하며 ‘은팔찌 찰 날이 머지 않았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나옵니다. 심지어는 깔끔한 이미지 관리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던 경영인까지 복마전의 등장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굴뚝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나면 그 밑에서는 불을 지폈을 것이란 유추를 하게 되니, 불안감이 한껏 높아집니다.

계속 이 모양이라면 한 때 새로운 희망으로 비춰졌던 ‘벤처’란 용어 자체가 폐기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듭니다. 부정적 인식이 대세를 이루게 되면 투자의욕이 꺾이고 마침내 벤처들의 자금난으로 연결될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불건전한 행위에 가담하지 않으며 떳떳하게 기업을 키워왔다고 자부하는 경영자들로서는 땅을 치고 통곡할 만한 일입니다만 이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니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요즘의 사건들을 단지 ‘벤처 그 자체의 문제’라고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벤처를 담는 ‘그릇(사회 시스템)’이 묘한 꼴로 만들어져 심하게 뒤틀려있는 판에 그 내용물인들 온전할 수 있을까요? ‘그 밥에 그 나물’일 수 밖에요. 성숙되지 못한 환경에 급속한 변화가 주어지면 기형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시간이 난다면 도서관에 들러 묵은 옛 신문을 살펴 봅시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 땅에서 비리와 추문 없이 한 해를 넘긴 적이 얼마나 되는지 꼽아 보았으면 합니다. 조용하게 넘어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총칼에 눌려 찍 소리도 내지 못하던 시절이거나 밝혀지지 않은 채 몇몇 사람들의 비밀로 남아있는 것,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한 다리 건너면 사촌 형제고, 빽을 쓰면 안 되는 일도 풀리는 우리 사회 시스템에서 비리의 사슬은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현재와 과거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비리가 극소수 ‘있는 사람(돈 또는 권력)’간의 짜고 치기 양상이었다면, 소위 ‘벤처 비리’가 뇌동하는 요즘의 추문은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가 교도소로 끌려가는 모습 입니다. 이른바 ‘비리의 대중화 시대’가 활짝 열린 셈입니다. 중심 축이 이동했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한 줌도 되지 않는 극소수가 주요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철통 같은 보안이 지켜졌던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발 없는 말이 불과 몇 분만에 전국을 떠도는 초고속망 시대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 봅시다. 미국 서부 개척 시절, 금광러시가 일어나자 동부지역의 범죄율이 급격히 낮아졌다는 통계가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밑천 없는 장사’를 좋아하는 양반들이 짐을 꾸려 서부로 대거 몰려갔기 때문이겠지요.

우리네도 마찬가지 입니다. 벤처 붐이 마치 금광러시처럼 불 붙던 당시, 실력 있는 엔지니어나 전문직 종사자로부터 어중이 떠중이, 파렴치 경영인, 신용불량자, 무법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서부개척의 꿈을 안고 몰려들었으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은 당연한 일 같기도 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넘치는 돈과 미비한 검증 시스템의 틈바구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항상 말씀 드리지만 사업과 사기는 한 끗 차이 입니다. ‘꾼’의 기질이 농후한 사람이 어떤 회사의 직원으로 일을 하면서 사기행각을 벌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스스로가 시스템을 좌우할 수 있어야 피해자를 사기행각으로 옭아 맬 수 있습니다. 이런 좋은 시기가 아니라면 언제 창업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앞서의 생각과 결합하면 이렇습니다. ‘돈과 사람이 왕창 몰린 곳에 우리의 케케묵은 시스템이 돌아가니 사고는 필연적’입니다.

바쁘고 귀찮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봅시다. 대한민국이 어떤 사회입니까. 남들이 50년, 100년 걸려서 하는 일을 몇 년 만에 해치우는 도깨비 같은 세상입니다. 이른바 ‘압축성장’을 거듭해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압축성장의 그늘이 얼마나 짙은지는 여러분이 느껴온 그대로 입니다. 튼튼한 다리로 급경사를 거침없이 올라갈 수는 있으나 발을 한번 잘못 딛으면 아득하게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거꾸로 보면 이렇습니다. 남들이 50년 혹은 100년간 진화해가며 겪은 질곡을 불과 몇 개월 만에 ‘가혹하게 압축해서’ 겪어야 하니 그 충격과 고통에 머리가 터질 지경입니다.

세 가지 생각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내려집니다. 벤처와 관련된 추문은 앞으로도 계속 확대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세상의 메커니즘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짜고 치기는 영원할 것입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대한민국에서 사업 수단 가운데 가장 효율적인 것이 뇌물과 청탁 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수단을 굳이 쓰지 않겠다고 다짐할 경영자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번 글의 취지는 ‘대다수의 벤처들이 성공의 꿈을 찾아 떠난 선량한 개척자들이고, 강도나 사기꾼은 극소수일 뿐이다. 그래서 벤처기업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주장을 펴자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너희 벤처들은 왜 그 모양이냐’고 다그치는 주위의 분들에게 ‘그 밥에 그 나물이라서 그렇소’ 식의 볼멘 소리 한번 해보자는 것 뿐입니다.

비를 맞은 뒤의 땅이 굳어지듯, 일련의 사건들이 튼실한 벤처들을 위한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억지로라도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누군가가 저지른 일이 많으니 어쩌겠습니까. 낱낱이 밝혀내 거름으로 써야지요.

아울러 남들이 50년 또는 100년간 나누어 겪은 고통과 부작용을 극히 짧은 시간에 감수해야 한다는 모진 결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네처럼 적당히 어울려 굴러다니는, 알음알음 또는 청탁 만연의 세상에서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정당하고, 어느 선을 넘으면 정당하지 못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지만 명백히 실정법을 어겨 기만을 일삼았다면, 그 마무리는 응징일 수 밖에 없습니다.

끝으로 메일을 보내주신 OOO사장님의 개인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제가 아는 몇몇 분들도 이번 윤태식 게이트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 분들이 “나, 이런 주식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최근의 언론 보도를 접하고서야 알게 됐습니다. 한 때 잉크 밥을 함께 먹던 사람으로서, 유구무언 입니다. 물론 저는 그런 은밀한 제의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 분들이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되었는지, 어떤 입장인지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나에게 그런 유혹이 온다면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메일로 글을 보내주신 여러분들에게 거듭 감사 드립니다. 저 역시 OOO사장님처럼 양심적으로 살기를 다짐해 봅니다. 100년도 못 사는 인생, 깨끗하게, 후회 없게 성공해서 살아 봅시다.

한상복(㈜비즈하이 파트너, 전 서울경제신문 기자) closest@bizhig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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