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밸리 사장들의 하소연, “20억 투자유치 알선에 2억 요구”

공기청정 시스템을 개발하고 세일즈가 한창인 대덕밸리의 L모 사장(43). L사장은 국내 굴지의 반도체 청정실 장비기업에서 연구소장을 지내다 4년 전 공기 청청기술을 아이템으로 창업한 케이스다. 하지만 기술 하나만을 믿고 창업한 그는 요즈음 대기업과 관공서에 납품하기가 이토록 어려운 줄 몰랐다며 ‘신세 한탄’을 한다.

제품을 납품하기 위해 6개월 동안 제안서는 물론 담당자를 만나도 꿈쩍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L사장은 결국 납품을 포기하고 알고 지내는 다른 사장에게 그동안의 고충을 이야기했더니 ‘이권’과 관련 ‘그들만의 관행과 연결고리’를 정말 몰랐느냐고 핀잔을 들었다. 그는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이런 ‘사슬’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네트워크 장비 제조 벤처기업 K사장(37)도 L사장과 비슷한 절망을 겪었다. 정부출연연구원 출신인 K사장은 얼마 전 한 공개석상에서 6년 동안 벤처기업을 운영하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로비’였었다고 고백했다. 기간 통신망 사업자에 제품을 납품해야 하는 시장 상황에서 연구원 출신이 세일즈를 하기에는 현실적인 벽이 만만치 않았다.

그는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지만 제품을 공급하기 위해 KT출신 인사를 거액의 연봉을 들여 영업 관련 담당자로 영입하고 ‘로비와 줄대기’를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K사장은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연줄이 없으면 접근조차 안 된다”면서 “로비를 하면 충분히 가능한 것을 알고 있는 마당에 유혹을 무 자르듯 물리치는 것이 벤처기업에게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벤처 비리’(?) 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가운데 벤처기업들의 구조적인 취약점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전문가들은 벤처기업들이 실력이 아닌 관계를 중시하는 풍토에서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각종 부패 사슬로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금융기관의 대출 관행, 공무원들의 은근한 금품이나 주식 요구, 구매력을 악용한 대기업의 횡포 등 구조적인 문제들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 특히 세상 물정 모르는 연구원이나 교수들이 창업한 경우에는 이런 구조적인 취약점에 대해 무방비 상태라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벤처육성정책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정부가 주도하는 벤처육성정책이다 보니 각종 입김이 난무하고 이는 정도를 걷는 벤처인들을 ‘외도(外道)’하도록 내몬다고 말한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출신이면서 가상현실 관련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Y모 사장은 최근 한 금융권 인사로부터 강력한 제안을 받았다. 20억원을 투자받게 해줄 테니 2억원을 달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금융브로커다. 하지만 자금 사정이 어려운 회사의 입장을 악용해 접근하는 금융브로커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이 제안을 쉽게 뿌리칠 수 없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Y사장은 “자신 이외에 상당수 벤처기업들이 이런 황당한 경험을 했을 것”이라면서 “자금사정이 어려운 벤처기업 입장에서 이런 제안을 받는다면 뿌리치기가 쉽지 않은 유혹”이라고 밝혔다.

금품이나 주식을 요구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대덕밸리 내 리딩 벤처기업인 중 한 명인 A기업인은 코스닥 등록을 앞두고 가진 저녁자리에서 정부 고위층 인사로부터 주식을 요구받고 당황한 경험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심사 막바지란 중대한 고비에서 이런 제안을 받고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는 초심으로 원칙이 바로 서고 투명한 사회를 만드는 것도 목표의 하나임을 상기하고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서울이 게이트로 얼룩진 것에 비해 대덕밸리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깨끗한 것은 이런 기업인들이 많기 때문으로도 분석된다. ‘패스21 사건’의 윤태식씨가 주식을 이용해 다양한 로비를 벌인 것도 벤처업계의 이같은 구조적인 문제점과 무관치 않다. 허가를 얻어내거나 납품을 위해서 접촉하는 담당자들이 은근히 주식을 요구하면 힘없는 벤처들의 입장에서 주식 제공은 확실한 ‘끈’으로 작용되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는 점도 유착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국내 기업환경에서 초기 벤처기업의 경우 사업을 위해 관계 공무원과 원만하게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이만저만 편리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벤처에게 직접적인 지원을 할 수 있는 국내 벤처업계의 현실에서 공무원과의 유착은 ‘악어와 악어새’처럼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관계를 벤처가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이와 관련 대덕밸리벤처연합회 이경수 회장은 “시장에 진출하기까지 정상적으로 하면 손해 보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정부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려는 것보다 인프라를 갖추도록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불필요한 관행이나 법규도 벤처들을 ‘비리사슬’의 유혹에 빠지게 한다.

최근 새로운 제품을 내놓고 시장에 진입하는 C기업이 대표적인 경우. 피부와 획기적인 제품을 개발한 이 회사는 하루라도 빨리 시장에 진입해야 하는데, 전혀 관계없는 법 규정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른 적이 있었다. 간단한 제품이지만 이를 제조·판매하려면 5개월이 걸리는 의료기기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법 규정 때문이다.

이 회사는 사업을 진행하는 입장에서 제품을 출시하기 위해서 결국은 담당자에게 ‘접대’와 ‘급행료’를 지급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P모 사장은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시장 진입시기는 가장 중요한데, 5개월이나 걸리는 법 규정은 기업하는 입장에서 보면 생사가 걸린 문제”라면서 “이런 상황에서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기업은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납품기관과 업체 간 뿌리깊은 관계 때문에 아이템을 포기한 경우도 있다. 방산장비업체인 모 기업은 납품대상인 군과 업체 간의 ‘끈끈함’ 때문에 수년 동안 개발한 제품을 포기하고 신소재 개발로 비즈니스 모델을 바꿨다. 이 회사는 수차례 제안서를 제출하고 전시회 등을 통해 우수성을 입증하는 기회를 가졌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특히 제품을 사용해본 실무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지만 수년째 미동도 하지 않는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회사측은 “기술력이나 성능·외관 등 모든 부분에서 전혀 손색이 없는데 왜 기회를 주지 않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면서 “제품보다는 소재를 중심으로 사업 아이템을 재조정했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크던 작던 간에 벤처기업이라면 상당수가 이런 비리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기업들이 없을 정도다. 문제는 이같은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벤처비리 행진’이 당분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벤처컨설팅회사인 e-커뮤니티의 정회훈 사장은 “일부 벤처기업들이 각종 비리 사건에 연루되는 것은 구조적인 모순 때문”이라고 지적한 뒤 “정부와 우리 사회가 공정한 룰을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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