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천안함 침몰은 어떻게 보면 인력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미 발생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수습 과정에서 한국적 특이상황이라고 해야 할지, 정말 아까운 사람의 죽음을 불렀습니다.

천안함 침몰 이후의 상황 전개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 계속 지켜보면서 이번 죽음은 언론에 큰 책임이 있는 인재(人災)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다들 기억하고 있을 만한 사건이 있습니다. 2007년 4월, 불과 3년 전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과 세계를 놀라게 한 일입니다.

바로 미국 버지니아텍 총기 난사 사건입니다. 32명이 숨지고 29명이 부상했습니다. 총기 사건이 많은 미국이라고 하지만 적잖은 인명피해였습니다. 이 사건의 범인이 조승희란 한국계여서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그 뉴스를 매일매일 국내 언론을 통해 중계 받듯이 소상하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미국인들의 위기극복 과정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참사 소식을 접하고 경찰과 희생자 유족 등 미국 사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우선 기도였습니다. 서로가 손을 맞잡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희생자를 떠올리며 기도를 했습니다. 정말 마음으로 아파했고, 마음으로 명복을 빌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이미 일어난 사건을 보다 침착하게 대응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분명 우리가 보기에도 경찰의 초동 대응이 잘못된 것으로 보임에도 원인이나 책임을 추궁하기보다 그런 것들은 경찰에 맡기고 수습책 논의에 나섰습니다.

그런 다음 사건 사흘째 되는 날 추모식을 가졌습니다. 2007년 4월 18일자 중앙일보는 ‘우리는 슬픔을 이겨 낸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비극 속에서 희망을 길어 올리는 장면이 연출됐고, 부시 대통령은 ‘온 나라가 슬픔에 잠긴 날’이라며 유족을 위로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추모식이 끝난 다음날 사건 현장이던 모리스홀 일부가 개방됐습니다. 유족들은 학교나 정부 당국을 원망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습니다. 4월 18일자 기사의 제목은 “‘분노의 절제’…치유는 시작됐다”였습니다. 희생자를 상징하는 추모의 뜻이 담긴 돌 32개가 교정에 놓였습니다. ‘미국인, 큰 슬픔에도 감정 억제 체질화’란 소제목도 눈에 띄었습니다.

사건 발생 6일째 보도. “우리는 시련을 극복해낼 것이다”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교정에서 다시 학생들이 뛰놀기 시작했고, 사건으로 연기됐던 체육대회도 열렸고, 조승희와 같은 한국계란 이유로 가슴 졸이던 한인 상가들도 문을 다시 열고 정상영업을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참극이 일어난 지 일주일 만에 세상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슬픔을 정말 훌륭하게 극복한 사례가 그 다음에 있었습니다. 전남 순천시에서였습니다. 2008년 5월 수학여행 중 버스 전복으로 학생 사망사고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방선거로 자치단체장이 바뀐 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때 신임 시장은 버지니아텍 사례를 보고 먼저 유가족과 손을 잡고 희생자의 명복을 빌며 함께 울고 슬픔을 같이했습니다. 이후로도 마음을 다해 사건 수습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대형 참극의 수습과정에는 하나의 패턴이 있었습니다. 사건 발생-유가족협의회 구성-원인규명 요구-책임자처벌 요구-합의-장례식… 미국이 보여준 기도-추모식-상처 치유-추모 사업-정상화의 과정과는 다른 패턴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의 언론은 갈등을 조장하고,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 데 주역을 맡았습니다. 마치 언론이 수사관도 되고, 관계 당국도 되고, 유가족의 대변인도 되고, 또 정의의 사도가 된 듯이 행동했습니다. 취재를 통해 갖은 의혹을 양산하고, 책임자를 추궁하며, 유가족들의 슬픔을 대변합니다. 그러면서 유가족들의 슬픈 모습과 망연한 표정을 클로즈업합니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으로서는 그 슬픔이 전달되기는 하는데 절제된 슬픔으로 깊이 가슴속에 울림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쓰라림이 극대화되고, 감정이 황폐해집니다.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가 이 슬픔을 통해 얼마나 더 성숙해지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기보다는, 슬픔에 지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데 일등공신인 셈입니다. 여기에는 보수언론이나 진보언론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속보경쟁이란 레드오션에서 피 튀기듯 슬픔을 확대 재생산하며 싸움을 벌입니다. 정치인들 보고는 사회 통합에 힘쓰라면서 정작 언론은 사회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격입니다.

정녕 우리는 바른 언론을, 이성을 가진 언론을 볼 수는 없는 것일까요? 언론의 고충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남들과는 다른 기사를 내야하고, 독자들도 겉으로는 정화된 보도를 바란다고 하면서 자극적 기사가 없으면 외면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사회가 정도를 걸어가도록 역할을 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일 것입니다.

예전에 서울 특파원을 지낸 일본경제신문의 모 기자가 20년 전 우리의 대형사건 수습과정에 대해 한 말이 생각납니다.

“한국 언론은 사건이 발생하면 원인 규명과 책임 추궁에 골몰한다. 그러다 보니 정작 사건 수습과 재발방지책 마련은 뒷전이다. 일본 언론은 사건 수습과 재발방지책 마련에 중점을 두고 상황이 종료된 뒤 원인 규명과 책임 추궁을 한다.”

천안함 실종자 유가족들이 느끼는 슬픔의 깊이는 당사자가 아니기에 감히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장남이 동해에서 해안초소를 지키고 있기에 같은 군인의 아비로서 느끼는 심정은 있습니다.

언론이 제발 유가족들의 아픈 가슴에 소금 뿌리며 더 슬프게 만들고, 앞뒤 분간 없이 당국에 무모한 대책을 요구하는 것으로 비춰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주호 준위는 대한민국의 우수한 군인이었습니다. 전문분야의 베테랑으로 국가적 인재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언론의 과민, 과장 보도가 강제한 당국의 서툰 대응이었습니다. 큰 슬픔 앞에 의연한 안중근 어머니의 피를 우리 어머니들도 갖고 계십니다. 그분들의 품격을 유지하게 해줄 때 우리나라가 그분들이 바라는 나라가 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등 국가의 큰 어른이라고 할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국민들은 국가 지도자들의 더 큰 반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람이 아프면 위로받는 게 인지상정이고, 실제로 존경하는 어른들로부터의 위안은 슬픔 극복에 큰 힘이 됩니다. 그럼에도 최고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내치는 모습을 보면 그만큼 그분들이 국민들의 정서와 떨어져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천안함 침몰이 우리 사회를 보다 어른스럽게 하는 큰 전기가 되어 희생자들의 목숨이 값어치 있게 되기를 기원하는 게 많은 보통사람들의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가운데 최근 실종자 유가족이 실종자 수색중단, 함체 인양 우선으로 방향을 튼 것은 정말 대승적 견지에서 내린 용단이라고 보고, 그 아픈 가슴을 생각하며 언론과 우리 사회가 보다 고민하고, 성숙한 자세를 유지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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