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미국 최고의 대입 준비학교인 웰턴 아카데미(Welton Academy)에서 벌어지는 똑똑한 학생들의 이야기다. 웰턴의 교육 커리큘럼은 전통적으로 하바드, MIT 등 아이비 리그 입학에 발군의 성적을 낸 것으로 평판이 자자하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그들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비 리그 진학을 위해 젊음을 희생한다. 그들은 처음부터 낭만이란 게 뭔지 모른다. 기숙사에서조차 학생들로 하여금 공부에 집중하도록 TV나 라디오를 금기시할 정도다. 학생들은 오로지 그들의 부모처럼 의사나 변호사로 사회 진출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일뿐이다.

영화의 주인공 닐 페리는 다르다. 그는 일류대학 진학을 위해 딱딱한 공부에만 매달리기보다 자신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무대 연기자로서의 꿈을 키워간다. 하지만 닐의 아버지는 완고하다. 아들을 반드시 일류대학에 진학시켜 장래 의사로 키우려 한다. 닐은 그런 아버지를 속이면서 연극 무대에 오르다 들키고 만다.

연극 공연이 끝나자 아버지는 아들을 강제로 집으로 끌고 가 혼을 낸 후 군대식 학교로 전학시키겠다고 선언한다. 닐은 그런 아버지에게 "제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말씀드릴 게요"하다가 "연극이 그렇게 중요해? 그래? 그게 아니라면 뭐냐"라는 아버지의 욱박지름 앞에 다시금 입을 다문다. 아버지는 아들 닐이 왜 갑자기 침묵으로 빠져드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날 밤 닐은 조용히 서재로 들어가 아버지의 권총으로 자살한다.

감독 피터 위어는 이 영화를 통해 전통에 숨 막히고 획일성으로 젊은이들을 옥죄는 교육제도에 강한 비판의 시선을 보내는 한편, 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교육제도에 대한 염원을 그려내는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영화가 나온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다.

"할 수 있을 때 장미 봉오리를 따도록 하라. 오래된 시간은 지금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으며, 오늘 웃고 있는 이 꽃도 내일은 시들어 사라지리니…."
키팅 선생님이 가르치는 싯귀와 함께 '카르페 디엠(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라)'이라는 라틴어를 유행시킨 것도 바로 이 영화다.

"학점 경쟁에서 밀려나면 패배자 소리를 들어야 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서로 고민을 나눌 여유조차 없다. 이 학교에서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주인공 닐 페리나 아니면 동료들의 항변으로 들릴 법 하지만 이 대사는 정작 한국의 KAIST(총장 서남표) 교내 게시판에 붙은 대자보다.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서남표식 교육이 올 들어서만 학부 학생 4명을 자살케 한 근본 원인 아니냐는 학생들의 항변을 대변하는 글이다.

학생뿐이 아니다. KAIST 교수들이나 학부모 그리고 매스컴의 분위기도 서남표식 교육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초점이 모아지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그의 교육 방식에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KAIST 학생들은 원칙적으로 수업료를 내지 않지만 학점 4.3 만점에 3.0 미만인 학부생에 대해서는 최저 6만원에서 최고 600만원의 수업료를 부과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전체 학생 7805명 중 1006명(12.9%)이 1인당 평균 254만여 원씩의 수업료를 냈다. 8학기 이내에 학부과정을 마치지 못하는 연차 초과자에게 부과되는 한학기당 150여만 원의 기성회비와 600여만 원의 수업료도 있다. 학생들이 말하는 소위 '징벌적 수업료제'다.

서남표 총장의 이런 징벌적 성적 관리가 결국은 학생들 간에 지나친 경쟁을 몰고 왔고, 탈락한 학생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과 절망감 나아가서는 정신적 우울증까지 낳게 해 오늘의 사태를 초래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심지어 학생들 가운데는 '신자유주의적 교육'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하는 판이다. 서 총장의 출신교를 의미하는 듯 "여기는 MIT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지적도 보인다.

학생들의 자살이 이어지면서 서 총장이 지난 4일 인터넷 홈페이지에 애도의 뜻을 전하면서 올린 '학생들이 압박감을 이겨내야 한다'는 요지의 글조차 심한 반발을 사는 형편이다. 서 총장은 "이 세상 그 무엇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며 "궁극적인 해결책은 각자의 마음과 자세에 달렸는데 경쟁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항상 이길 수는 없으며 나중에 이기기 위해 때로는 지금 질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생들은 근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학생들이 극단적 선택을 한 원인을 정신적 나약함으로 몰아갔다고 반박했다. "총장의 정책에는 문제가 없는데 자살한 학생들의 정신력이 약했다는 책임회피"라거나 "학생들의 생각을 총장이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반응 일색이었다.

이쯤 되면 서 총장으로서도 자신의 교육 방침이나 나아가 KAIST 교육제도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옳고 그름을 떠나 몇 개월 사이에 학생 4명이 연이어 자살로 내몰렸다는 사실이야말로 그의 교육철학 자체가 벽에 부딪쳤음을 보여주는 상황 증거이기 때문이다. 내일의 국가 동량이 돼야 할 젊은 인재들이 생명까지 포기하는 현상을 일시적 부작용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고 서 총장 개인의 책임만으로 모든 문제가 종결되리라고 기대한다면 자칫 화살에 과녁을 맞추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키팅 선생님은 학교가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교육 과정을 거부하고 학생들에게 스스로의 삶의 목표를 찾아 나서라고 가르친다. 그는 학생들에게 교재 안의 리얼리즘(사실주의) 페이지를 과감하게 찢어버리라고 말한다. 대신 로맨티시즘(낭만주의) 페이지만을 읽게 한다. 만일 그런 행동이 옳다면 KAIST도 기존의 경쟁 시스템을 포기하는 것이 대안일까?

필자는 전통과 질곡에 저항하는 웰턴의 어린 학생들을 동정하면서도 리얼리즘을 쓰레기통에 처박으라는 키팅 선생님의 선동에는 찬성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다. 학생이나 매스컴에서는 일제히 서 총장의 경쟁 시스템을 범인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그것만 없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여기는 MIT가 아니라 한국"이라지만 MIT가 있기에 미국의 경쟁력이 살아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MIT 교수들은 강의실에서 학생이 30%만 소화할 수 있게 가르친다는 기준을 갖고 있다고 한다. 강의는 속사포 같고 과제는 산더미다. 학생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화전에서 뿜어대는 물을 마시려는 것과 흡사하다." 학생들의 한계를 부숴버림으로써 잠재력의 극한을 끌어내는 것이 MIT 교육철학이라는 것이다. 옳건 그르건 그 때문에 졸업생과 교수 76명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다. 미국의 경쟁력은 이렇게 유지된다.

한 발 더 나아가 KAIST는 사립대학이 아니다. 엄연히 국민의 혈세를 받아 운영되는 곳이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들여 사회의 동량을 배출해내는 학교다. 서 총장으로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렵게 번 돈을 받아 운영하는 학교인 만큼 구성원 각자가 제 값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질 만하다.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졸업 후 국가에 봉사해야 할 의무기한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나는 KAIST 학생들이 나의 세금으로 자기들 수업료를 메우는 걸 왜 당연시 여기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어느 신문 독자의 의문에 KAIST 구성원은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KAIST 학부모들도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KAIST에 입학하려면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아니면 중등학교 입학부터 학부모들이 확고한 목표를 세우고 학생을 몰아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후 과학고나 영재고를 거쳐 KAIST에 입학시키기까지 부모들의 전인격적 개입이 뒤따른다. 솔직히 누가 인격체의 주인인지 불분명할 정도다. 학부모들이 최소한 닐 페리 군의 부모와 다르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서 총장은 일련의 KAIST 사태에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장삼이사라고 범인 색출 과정에서 마냥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성과지상주의가 KAIST만의 문제인가, 아니면 그것을 능가할 효율 극대화의 다른 대안(代案)이라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이런 의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교육시스템 전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다. (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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