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 속의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잘 생긴 얼굴에 자아도취된 남자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숲속의 요정 '에코'에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신적·육체적 괴롭힘을 가한 ‘나쁜 남자’였다는 사실이 제대로 드러난다면 연민 가득한 대중적 이미지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나르키소스 때문에 괴로워했던 소녀는 물론 에코만이 아니다. 나르키소스는 시쳇말로 꽃미남이어서 수많은 숲 속 소녀들의 가슴을 불타게 했다. 그런 소녀들 가운데는 남이 말하면 말하고, 남이 말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에코도 포함돼 있었다. 그 요정은 상대방의 말 중 자기가 들은 마지막 단어만 되풀이할 수 있었다.

에코는 어느 날 우연히 나르키소스를 목격한 후 사랑으로 달아올라 언제나 그의 뒤만 쫓아다녔다. 그녀는 불행히도 나르키소스가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 한 되받아 말할 수 없었다. 그런 마당에 나르키소스는 어느 소녀에게도, 그리고 상사병에 걸린 에코에조차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에코의 사랑은 마침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고통으로 그녀의 육체는 야위어가다 재로 변했고, 결국 목소리(메아리)만 남게 됐다.

어느 날 나르키소스는 맑은 연못을 들여다보다 연못에 비친 제 얼굴에 반해 스스로에 대한 사랑을 불태우게 됐다. 하지만 물 속의 꽃미남은 결코 나르키소스의 손길을 허용치 않았다. 어느덧 나르키소스의 사랑은 절망이 됐고 절망은 그를 병들게 했다. 그의 육신은 서서히 소진돼갔다.

나르키소스가 자기 모습을 보며 "아아, 슬프다"고 하자, 주변을 맴돌던 에코는 "슬프다"라고 대꾸했다. 나르키소스가 죽어가면서 스스로의 모습을 향해 "잘 있어"라고 하자, 에코 역시 "잘 있어"라고 속삭였다….

그럼 이쯤해서 가상의 질문을 던져보자. 만일 나르키소스가 에코에게 다가가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기라도 했다면? 아니, 최소한 말이라도 건네주었다면? 그래서 에코의 애틋한 연정이 마침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면 아마도 그리스 신화는 다르게 쓰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나르키소스라는 어리석은 남자에게 한숨짓는 것뿐이다.

얼마 전 본사 대덕넷이 직원을 대상으로 '직장 내 성희롱, 성차별 예방'에 관한 교육을 실시했다. 이 교육 프로그램은 노동법상 1년에 1회 이상 실시해야 하는 의무 규정으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3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법률적 의미에서 '직장 내 성희롱'은 사업주나 상급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 내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하여 다른 근로자에게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또는 그 밖의 요구 등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용에서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설령 고용상의 불이익이라는 결과가 없더라도 성희롱을 통해 당연히 보호받을 인권이 침해당하거나, 원치 않는 일을 요구받는다면 그런 행위나 언동은 법에 앞서 사회적 제재를 받아 마땅하다. 고용노동부에서 발간한 '성희롱, 성차별 없는 건강한 기업문화'라는 책자 속의 여러 가지 사례들도 그런 점을 잘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하나의 사례들은 처벌이 마땅한 그리고 당연히 금지해야할 행위이겠지만 이런 사회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되고 마침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을 지배하게 될 경우 나타날 역작용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부분, 부분은 옳아도 그들 부분이 모아진 전체 또한 옳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합성의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성희롱 금지의 개념이 범죄 처벌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인 전체의 무의식을 지배할 경우 이런 정신문화가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간에 남녀 사이의 애정 전선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재미 있은 예로 일본 여성들이 의외로 한국 남성들에게 호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일본 남자들이 지나치게 상대방을 배려하거나 수동적 태도를 보이는 데 반해 한국 남성은 감정 표현에 보다 적극적이고 과감하기 때문이란다. 만일 이런 한국남자들이 전부 일본 남자화해 버린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의식화가 지나쳐 나중에 한국 남자들이 일본 남자들처럼 여성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한 채 '혹시 댁의 손을 잡으면 무례한 행위가 되지 않을까요?'라며 일일이 여성의 의사를 타진하고자 한다면 여성으로서는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준법정신이 철저한데다 지극히 점잖다는 평가를 받을지야 모르겠지만 글쎄, 여성으로서는 그게 기분 좋은 일일까 아니면 거꾸로 화가 치미는 일일까.

시중에 '건어물女'라는 말이 있다. 2007년 일본에서 방영된 드라마 '호타루의 빛'에서 처음 쓰여진 표현이다. 드라마의 여주인공 호타루는 직장에선 일도 잘하고 똑똑한 여자지만 퇴근하면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에, 머리도 안감은 채 맥주 안주로 마른 오징어나 씹어대는 독신 여성이다.

그녀는 주말에도 잠만 자느라 '연애(戀愛)세포'가 말라버려 연애에는 관심조차 사라지고 마치 건어물처럼 됐다고 해서 건어물녀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누가 그녀를 이렇게 여성적 아름다움을 상실한 '에코'로 만들어 버렸나. 누구겠는가. 바로 호타루의 가슴에 불을 지필 의무가 있는 주변의 남성들이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 불을 지펴야 할 남성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열악하다. 이런 남자를 흔히 '초식男'이라고 부른다.

초식남이라는 용어 역시 일본에서 유래했다. 일본의 여성 칼럼니스트가 이름붙인 것으로 기존의 '(육식적) 남성다움'을 강하게 어필하지 못하면서 초식동물처럼 온순하고 게다가 예쁘기까지 한 남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자기만의 취미 활동에 몰두하지만 이성과의 연애에는 소극적이다. 아니 무관심에 가깝다. 왜 이런 나르키소스 류의 남자들이 자꾸만 번성하는 것일까.

아이러니다. 고용노동부의 성희롱 예방 프로그램이 성공을 거둘수록 우리 사회의 남성들은 올바른 처신에 신경을 쓰고, 올바를수록 역설적으로 남자들은 위축되고 조심스러워진다. 조심성에 지친 나머지 차라리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려 한다. 이 모든 주변 여건이 바로 초식남의 증가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초식남이 증가하면 필연적으로 건어물녀도 늘게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2011년 4월에 발표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회통합지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독신(미혼) 비율이 39%로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만혼과 독신자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OECD 평균은 26%다.

부분은 옳아도 부분의 전체 합은 틀릴 수가 있다. 합성의 오류다. 참다못한 건어물녀들이 어느 날 고용노동부 장관실로 몰려가 "내 인생 책임지라"며 항의시위를 벌일지도 모를 일이다. 노동부 안에 '남녀만남촉진과'라도 만들어야 할 시대 상황이다. (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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