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서재⑤]정정훈 기계연 박사, 선물은 언제나 '책'
"절대 책 빌려보지 말라, 십일조하듯 책 사야"

 

"단돈 만원으로 가장 행복해 질수 있는 비결이 뭘까요. 그야 책 선물만한 게 있겠어요?" 정정훈 한국기계연구원 박사와의 첫 만남은 유쾌한 돌발 질문으로 시작됐다. 워낙 책을 많이 선물하기로 소문난 정 박사이기에 당연히 나올 만한 물음이요, 일종의 권고인 셈이다.

그렇다고 아무 책이나 선물하는 것이 아니다. 정 박사는 언제나 자신이 읽은 책들 중에서 선별해 선물한다. 그만큼 책의 내용과 메시지도 중시한다. 그의 연구실에 들어서니 짐작대로 최근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있다는 책을 소개한다.

미국 시애틀 소재 파이크 플레이스 어시장이 주는 영감을 통해 침체된 직장내 분위기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과정을 그린 '펄떡이는 물고기처럼(스티븐 C. 런딘, 해리 폴 저, 유영만 역)'이다. 선물을 위해 이 책을 20권 넘게 샀다고 한다.

정 박사의 구수한 입담이 더해진 책 소개에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서 그의 연구실을 천천히 둘러봤다. 사방을 책장이 둘러싸고 있으며 책장마다 책들이 빈틈없이 꽂혀 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란다. 그가 살짝 벽 한쪽으로 안내한다.

작은 문을 여니 길다란 방에 책장이 사방 벽을 채우고 있다. 사람 한명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통로만 있을 뿐이다. 전공 서적만 꽂혀 있으리라는 지레짐작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시, 산문, 소설, 자기계발서, 철학 등 모든 책들이 망라해 있다.

그가 이처럼 다양한 분야의 책에 빠지게 된 동기는 뭘까. 정 박사는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답을 들려줬다.

그는 "어릴적 기억에 집에 책이 무척 많았고 아버님이 찢어서 볼 정도로 책을 많이 읽으셨다"면서 "아버지의 영향때문인지 철이 들면서 책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세상만사에 대한 청소년기의 호기심이 머리 속을 꽉 채우고 있던 시절이었다"고 고백했다.
 

▲연구실 안 비밀 서재에서 정 박사가 책을 찾고 있다. 퇴임 시 책은 그대로 물려주고 갈
생각이란다.  
ⓒ2011 HelloDD.com

◆호기심으로 시작된 책읽기, 삶의 지혜를 얻다

"중고등학교 시절,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다. 어떤 호기심이냐고? 청소년기 남학생이 갖는 일반적인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다(웃음). 처음에는 이렇게 세상을 알고싶어 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한국문학, 세계문학 등 명작마다 담긴 아름다운 장면 장면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시작된 책읽기는 그가 평생을 두고 책을 벗삼는 계기가 됐다. 지금은 지천명의 나이지만 여전히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모습은 사춘기 때 그대로다. 지금도 그가 책을 열심히 보는 이유는 호기심, 모르는 것을 배우기 위한 겸손한 이유에서란다.

"삶을 살다보니 모르는게 너무 많다. 공부는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데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과의 대화, 가족과의 대화, 아이와의 대화법 등 삶을 살아가는 지혜는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거기에다 20세기 이후 학문이 세분화되면서 개별적으로 공부해야 할 부분은 더욱 많아졌다."

이제서야 그의 서재에 유난히 다양한 분야의 책이 많았던 궁금증이 풀린다. 정 박사는 자신이 모른다고 생각되는 분야에 대해 집중적으로 책을 구입하기도 한다. 당장 다 읽지 못해도 시간을 두고 지식의 깊이를 더해가기 위해서다.

일례로 최근에는 미술과, 음악, 한국의 아름다움, 음식에 관한 책을 모으고 있다. 정 박사가 책을 본격적으로 구입하기 시작한 것은 부모에게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부터다. 직접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매달 수입의 10%는 책을 구입하는데 지출하고 있다. 지난해 연말결산에는 600만원이 도서구입비로 기록되기도 했다.

"인터넷에 처음으로 서점이 등장했을 때다. 회원에 가입해 책을 구입하고 있는데 가입 첫 달부터 플래티넘 회원(월 30만원 이상 구입회원)으로 등극했다. 그후 지금껏 등급이 내려간 적이 없다. 내가 보기위해 구입하기도 하지만 선물하기 위한 책도 많이 구입한다. 어느때는 같은 책을 20권씩 사기도 한다. '펄떡이는 물고기처럼'도 그중 하나다."

정 박사는 '펄떡이는 물고기'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한번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직장인들이 꼭 읽어보면 뜻하지 않은 소득을 얻을 것이라는 조언과 함께 말이다.

▲정정훈 박사가 추천하는 책.  ⓒ2011 HelloDD.com

◆책 선정은 베스트셀러에서 시작해 작가 중심으로

정 박사가 책을 구입하는 기준은 작가 중심이다. 물론 처음부터 작가 중심이었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어떤 책을 읽어야할지, 어떤 책이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지 판단이 서질 않아 일단 베스트셀러로 꼽힌 책을 중심으로 구입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자신이 보고 싶은 분야로 좁혀나갔고 또한 작가 중심으로 변화해 갔다. "영화도 박스오피스를 보고 선택하면 실패할 확률이 낮다. 책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하면서 책을 읽다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도 생기고 감동이 일며 자연히 읽고 싶은 분야도 알게 된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는 유영만, 공병호, 구본형 등 리더십 분야의 책을 쓴 작가부터 '칼과 칼집'을 쓴 한 홍 목사, 그리고 이어령 교수 등이다. 은희경, 전경린 등도 그가 좋아하는 작가다. 정 박사가 책을 많이 보는 시간은 출장 중 이동하면서.

주로 대중 교통을 이용하다보니 언제나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읽는다. 지금은 세월의 무게로 시력이 떨어져 예전처럼 책을 많이 볼 수 없어 안타까울뿐이다. 그러나 하루 일정이 아무리 바빠도 20~30분은 여전히 책을 보기 위해 시간을 낸다.

◆맛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비결은 '다독'

그와의 인터뷰는 자주 샛길(?)로 빠지곤 했다. 책 제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내용부터 서평까지 친절하게 짚어주고 가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재밌고 맛깔스럽다보니 샛길 자체가 즐거운 것도 사실이다.

선박 공학을 전공해 지난해 천안함 피격 시 많은 활약을 한 그이지만 집안과 동네에서는 재담가로 인기가 높다. 맛있게 풀어내는 말솜씨에 가족들은 물론 동네 주민들까지 그의 팬이 되고 만다. "이야기 소재는 일과 아무런 상관없다.

선박공학 관련 이야기를 한다면 과연 누가 듣겠는가(웃음). 이야기의 소재는 일반 책을 통해 얻는다. 그리고 여러 각도에서 해석해보고 다른 책과 연관해 설명하기도 한다." 책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해석하고 다른 책과 연관해 분석한다고는 하지만 실제 다양한 독서가 뒤따르지 못한다면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의 독서량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모르는게 많다는 생각으로 책을 구입하고 읽는다. 최근에는 사마천의 사기를 다시 읽고 있다. 다시라는 말이 의미있게 들린다. "같은 책을 몇번이고 반복해 읽기도 한다.

읽다보면 자신만의 시각에서 볼수 있는 안목이 길러지고 간접경험을 통해 다양한 분야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사기도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주는 고전이다."

▲정 박사의 깔끔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책상위 필기구들. ⓒ2011 HelloDD.com

◆그의 롤모델은 '피터드러커', 주제 바꿔 평생 공부할것

그의 롤 모델은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드러커다. 피터드러커가 '프로패셔널의 조건'이란 책에서 3년 또는 4년마다 새로운 주제를 선택해 공부하고 또 그에 관해 책을 쓴다고 밝힌 바 있는데 정 박사 역시 스스로 분야를 정해 책을 구입하고 공부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피터드러커처럼 3년마다는 아니라도 1년에 한분야씩 주제를 정하고 주력해 책을 읽을 예정이다. 그런면에서 최근 역사책을 많이 보고 있다." 정 박사는 새로운 분야의 주제를 '음식'으로 정하고나서 요즘 틈나는 대로 관련 책을 사 모으고 있다.

그렇다고 자신을 책에만 빠져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라고 말한다. 아이들과의 대화를 위해 최신 음악, 드라마도 잘 챙긴다. 주말에는 아내와 아이쇼핑을 하며 유행하는 컬러가 무엇인지 등 세상과의 접촉도 끊임없이 지속해 가고 있다.

시간이 되느냐고 질문하니 순간순간을 즐기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답변한다. 그는 전공이 전공인만큼 선박공학에 관한 연구와 강의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출연연연구발전협의회 회장으로도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그런 활동 속에서 그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게 있다. 바로 독서다.

"어디에 있든 그 시간에 몰입하는 '카르페디엠'이란 말을 좋아한다. 사람은 몰입하면서 즐거움도 느끼게 된다. 나이들었다고 절대 움츠러들 이유가 없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릎높이를 낮추고 어린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춰가는 것이다. 모든 이와의 자연스런 대화를 위해서는 많은 간접 경험이 필요한데 이는 독서를 통해 가능하다."

▲앞으로 봐야 할 신문이나 잡지를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2011 HelloDD.com

▲정 박사의 연구실 곳곳에 책장이 마련돼 있고 다양한 분야의 책이 정리돼 있다. ⓒ2011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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