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명장은 국가의 보물⑦ ]로봇 기술의 대부 박종오 전남대 교수
세계 최초 혈관치료 로봇 개발로 로봇기술 이정표 새로 써

30년전 과학기술처 장학생으로 선발된 후 물품 배달되듯 독일의 슈투트가르트대학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로봇의 '로'자도 모른채 로봇공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2년만에 독일 최고의 산업 이벤트 중 하나인 하노버 산업박람회에 그가 만든 로봇이 출품됐다.

그런 로봇이 전문잡지에 소개되면서 독일 기업에 기술 이전까지 성공했다. 1987년 귀국 후에는 산업 현장을 직접 발로 뛰며 현장에서 필요한 응용 로봇개발에 나섰다. 자동연마 로봇, 용접로봇, 가공 로봇 등 국내 대기업 생산 현장에서 사용되는 자동화 로봇이 그의 손을 거쳐 속속 태어났다.

매크로 로봇에 이어 마이크로 로봇 분야를 개척하면서 캡슐형 내시경 개발과 기술이전, 세계 최초 혈관 치료용 로봇 개발까지 거침없는 도전으로 로봇계의 대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박종오 전남대 교수의 이야기다.

박 교수는 "로봇은 산업기술이다. 학교, 연구실, 회사로 이어져야 100점짜리가 된다. 그리고 수요처의 현장 담당자 이야기에 150% 이상 귀기울여야 한다"고 로봇공학을 정의한다. 그는 이어 "이미 나온 기술보다 앞으로 꼭 필요한 기술에 도전하다 보니 남들보다 한발 앞서 가게된 것 같다"며 그간의 연구활동과 앞으로 계획에 대해 담담히 풀어냈다.

◆독일 유학에서 만난 스승, 삶의 자세 바꿔놓았다

"KIST에서 근무 중 운이 좋았는지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미국과 독일 두곳으로 많이 갔는데 선택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공항에 내리니 독일 슈투트가르트였다." 박 교수가 처음 도착한 곳은 독일의 프라운호퍼 연구 조직 중 하나인 로봇관련 연구소.

엥? 로봇이라니. 그로서는 로봇에 관해 전혀 예비지식조차 갖고 있지 못했다. 이렇게 시작된 독일 생활은 그러나 그의 인생에 여러가지로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 무엇보다도 이곳에서 만난 바르네케(Warnecke) 지도 교수는 엔지니어로서 연구에 접근하는 자세, 생활 습관 등 박 교수의 모든 면을 바꿔 놓았다.

"한국에서 나름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는데 바르네케 교수가 강조하는 엔지니어로서의 철칙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산업현장이 우선이라며 현장에 가서 직접 테스트하고 고객 우선으로 생각하라고 지도했다. 그분으로부터 공학자로서 연구에 임하는 자세와 연구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박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서면 방대하면서도 깔끔하게 정리된 파일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각 파일마다 일목요연하게 넘버링돼 언제든 쉽게 자료를 찾을 수 있도록 정리돼 있다. 그는 컴퓨터 외장하드를 통해서도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연구가 끝나면 DVD로 저장해 따로 보관한다. "이런 사소한 습관부터 연구 자세까지 바르네케 교수에게 배웠고 지금은 습관이 돼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지난 2003년 회갑을 맞으며 교수님의 정년퇴임이 있었는데 한국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성대한(?) 회갑연을 열어 드렸다."

실제 바르네케 교수는 슈투트가르트 지역 기업들의 생산기술과 자동화를 위해 설립된 프라운호퍼 연구소를 1971년부터 1993년까지 진두지휘하며 가장 성공적인 연구소로 발전시키는데 공헌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또 한국의 최초 유럽현지연구소인 'KIST유럽' 설립과 정착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박종오 교수가 정리된 파일을 예로 들며 독일에서 만난 스승 바르네케 교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1 HelloDD.com

◆독일서 귀국 후 10년 동안 '친구도 안만났다'

"독일서 박사를 마치고 귀국한 뒤 10년 동안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일에 몰두하기 위해서였다. 산업 현장에 가서 보니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로봇 과제는 무조건 다했다. 일이 너무 많아 옆을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박 교수는 낮에는 산업현장을 누비고, 밤에는 연구실에서 연구에 집중했다. 힘들지 않았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스스로를 욕심이 많은 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세속적인 일에 대한 욕심은 아니란다.

연구 등에 대한 욕심이 많고 스스로 하는 일에 대해 가치를 높게 두기 때문이다. 그래야 더 열심히 하고 정말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정말 소중하다는 생각으로 그 일에 전념한다. 매일 새벽 두시, 세시 퇴근 아니면 아예 밤을 하얗게 새우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하다보니 성과도 많았다. 물론 힘들었다. 아마 아내가 이해해주지 않았다면 힘들었을텐데 공학도 출신인 아내가 믿고 이해해 줬다. 항상 감사하다는 생각에 아내 말이라면 무조건 잘 듣는다."(웃음) 이렇게 시작한 그의 연구는 개인적으로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런 성과들은 국내 기업들이 생산과 조립라인을 자동화하는데 많은 기여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됐다. 기계부품을 자동으로 조립하는 로봇, 자동 납땜하는 로봇, 다양한 부품까지 직접 처리하는 로봇, 자동연마로봇, 위험한 작업환경용 원격조종로봇, 유리판 절단로봇 등 산업현장에서 사람이 직접하기 어려운 작업을 대신할 수 있는 로봇을 개발하고 이런 연구 성과는 기업들에게 이전됐다.

◆불가능하다는 과제만 도전하고 꼭 성공해 낸다

박 교수가 연구하는 방식은 늘 도전적이다. 이미 나온 기술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편이다. 스스로 도전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기술을 선택하고 지속적으로 연구하며 기술을 업그레이드 해 나간다.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하면 모르는 부분이 30% 정도나 된다. 기술 융합에 따라 모르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모른다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꼭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면 공부하면서 밀고 나간다.

그렇게 하면 기술도 업그레이드 되고 연구에 대한 안목도 길러진다." 이런 뚝심(?)있는 연구로 다들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연구를 박 교수는 보기좋게 성공시켰다. 박 교수는 어떤 연구든 실패는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정말 열심히 하면 결과는 나오게 마련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로봇 연구에 집중하면서 무섭게 일에 파고드는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로봇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캡슐형 내시경 로봇개발' 과제가 1992년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최초의 프론티어 사업에 선정됐고 박 교수가 사업단장으로 임명됐다.

박 교수는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새 연구분야가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에 의기소침해 하며 일요일에도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다. 월요일 아침에 당시 서정욱 장관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다. 프론티어 사업단 단장에 선임됐다는 목소리가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주변에서는 로봇을 어떻게 캡술로 할 수 있겠느냐며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과제에 참여하는 연구원들조차 부정적인 생각이 팽배해 있었다. 실제 박 교수도 멤스(MEMS, 미세전자기계시스템)라는 단어만 알 정도였으니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꼭 해야만 했던 캡슐형 로봇 개발에 성공

"일반적으로 마이크로 로봇을 개발한다고 말들은 많이 했지만 실제 규모가 큰 로봇이 대부분이었다. 멤스 로봇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부품에 불과했다. 로봇은 시스템이다. 매크로와 멤스 로봇을 결합한게 마이크로 로봇이다.

개념이 설정된 만큼 캡슐형 로봇 개발은 꼭 성공해야 하는 과제였다." 바로 이런 상황이야말로 박 교수의 오기가 발동하는 순간이다. 그는 저돌적으로 연구에 몰입했고 마이크로 로봇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드는데 전념했다.

새벽녘까지 연구실에 박혀 있는 날이 태반이었다. 그러다보니 연구원들의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루는 연구원들이 방으로 몰려왔다. 궁금해서 무슨일이냐고 물었다. 다들 우물쭈물 말도 못하고 그냥 갔는데 나중에야 이유를 알았다.

더 이상 못참겠다고 시위차 왔는데 연구실에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렇게 모두의 열정과 땀이 녹아들며 2003년 캡슐형 내시경 로봇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사업단을 꾸린지 무려 10년만의 성과다.

다들 안된다고 말했지만 임상실험까지 마치고 2005년 기술이 기업에 이전됐고 지금은 해외 수출까지 하며 국가 수입원으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중간에 말못할 고충도 많았다. 박 교수가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1년이 지났을 무렵 이스라엘에서 이와 비슷한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는 발표가 나오면서 자칫 무산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더 우위에 있다는 판단에 정부는 박 교수를 지지했고 그의 연구는 지속됐다. 결국 개발에 성공하면서 마이크로 로봇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박 교수는 "공학은 협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혼자 할 수 없는 분야"라며 당시 참여했던 모든 관계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혈관치료용 로봇은 자기장의 도움으로 혈관을 따라 흐르며 막힌 부분을 뚫거나 필요한
처치를 한다.  
ⓒ2011 HelloDD.com

▲혈관치료용 기술 개발에 성공하고 사업화를 위한 장비 구축 작업이 한창이다.  ⓒ2011 HelloDD.com

◆세계 최초 혈관 치료용 로봇 개발에 성공, 또 다른 연구 도전 중

"사업단에서 10년만에 나오니 어느 덧 나이가 50이었다. 몇몇 대학에서 교수직 제의를 해 왔으나 가장 맘에 와 닿는 제안서가 전남대학교였다. 굳이 지방까지 가느냐고 만류하는 지인들도 있었지만 2005년 광주로 내려왔다."

박 교수는 처음에는 뭘 해야할지 고민이 많았다. 지역관련 연구를 해야한다는 조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가 광주에서 처음 도전한 분야는 가전 로봇이다. 광주를 가전 로봇의 메카로 부각시키며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

이 분야에서는 광주시가 가전로봇의 인프라 사업지로 선정되면서 그의 역할도 마무리했다. 가전 로봇에 이어 그가 새롭게 도전한 분야는 어느 누구도 해본적인 없는 혈관 치료용 로봇. 여러 나라에서 개발에 도전했지만 아직 아무도 성공한 적이 없는 분야였다.

박 교수는 "혈관속을 돌아다니는 로봇, 어찌보면 황당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필요한 기술이고 이 역시 꼭 해야만 하는 분야였다"면서 "과학기술은 어느 단계에 이르면 기술로 되는게 아니다. 연구 책임자와 참여자의 의지가 만들어 내는 결과"라고 강조했다.

그를 비롯해 구성원 모두가 해보자는 의지로 똘똘 뭉쳐 연구에 매진했다. 의료진도 그들의 연구를 적극 지원했다. "기술을 개발하고 동물 실험을 하는데 동물마다 혈압이 달랐다. 첫 실험에서는 로봇이 혈류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 2주에 한번씩 의료진과 같이 실험을 하며 3년 반 만에 드디어 성공했다."

세계 최로로 혈관치료용 로봇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이렇듯 빛나는 연구 성과를 올린 연구진 모두에게 주어진 최고의 보상은 무엇이었을까. 박 교수를 비롯해 참여 연구진들은 처음으로 오랜시간 잠에 빠져들어갔다고 한다.

지금은 다시 잠에서 빠져나와 기술 이전을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다. 박 교수의 도전은 계속된다. 전남대 로봇연구소 RRI(ROBOT Research Initiative)에는 혈관 마이크로 로봇, 박테리아 로봇, 메디칼 수술 로봇 등 3개의 연구팀이 있다. 현재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박테리아 로봇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마이크로 로봇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어 가고 있다.

▲차경래 팀장이 혈관치료용 로봇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1 HelloDD.com

▲박종오 교수와 전남대 RRI연구팀은 암 치료용 박테리아 로봇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1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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