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명장은 국가의 보물⑧]이종민 GIST교수 "노벨상 토대 마련"
"펨토초 초강력 레이저 개발로 NT, BT 응용 기대 높다"

'나뭇잎의 광합성 장면, 분자와 원자의 움직임 등 극초단의 미세한 자연현상을 직접 본다!'

공상과학영화 아니면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지레짐작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이다. 이런 신비한 현상을 현실에서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국내 연구진이 1000조분의 1초 단위로 촬영이 가능한 펨토초 레이저 개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기술이 개발되기까지에는 한 과학자의 40년 집념이 녹아 들어있다. 이종민 광주과학기술원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이 교수는 놀랍게도 순수 토종박사 출신이다. 외국 유학 기회와 대학 교수 자리도 마다하고 평생을 레이저 개발이라는 한 우물을 파며 연구에 집중해 왔다. 빛의 대부로 더 많이 알려진 이 교수는 국방과학연구소 재임 시절인 1972년, 250와트 출력의 레이저 기술을 처음으로 선보이며 국내에 레이저 연구의 포문을 열었다.

이후 그는 하이파워 레이저 연구에 집중하면서 빛을 연구하는 고등광기술연구소를 직접 기획하고 설계하기까지 했다. 지난해에는 세계 최고출력의 펨토초 초강력 레이저 개발에 성공하고 시설을 구축 중이다. 시설이 완공되면 초소형 전자 가속기와 의료용 소형 양성자 가속기의 실용화가 성큼 앞당겨지게 된다.

이 교수는 "펨토초 레이저는 짧은 시간에 1000조와트(페타와트)의 출력이 가능하다. 예전에는 이 정도의 출력을 내려면 미식축구장 규모의 운동장이 필요했지만 펨토초 레이저는 데스크탑 크기로 가능하다"면서"이를 통해 암치료가 가능한 양성자 가속기를 병원이나 의원마다 설치 할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다. 이를 통해 한국의 노벨상도 기대해 볼만 하다"고 설명했다.

◆첫번째 유학기회 대신 선택한 국방과학연구소, 레이저 개발

"동기 8명이 있었는데 6명이 유학을 갔다. 당시에는 군 문제로 유학대신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가게됐는데 유학을 가지 못한 아쉬움이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였다. 교관을 마치고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시 국방과학연구소에 근무 중이던 한필순 박사님이 무조건 발령을 냈다."

이렇게 시작된 국방과학연구소와의 인연은 이후 10년간 지속됐다. 그리고 레이저 무기가 필요하다는 연구소의 기획에 따라 이 교수를 중심으로 레이저 개발이 시작됐다.

"1970년대 국내 산업계는 초라했다. 레이저 장비에 들어가는 부품 하나 제대로 만들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레이저의 기본인 진공관을 만든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취미로 하던 아마츄어 무선에 이용되는 진공관을 잘라 글라스튜브를 연결하는 방법으로 레이저 장비를 완성했다."

이렇게 장난감 만들듯 출발했지만 의외로 실험 결과는 대 만족이었다. 레이저는 눈앞에서 벽돌과 철판을 보기좋게 뚫으며 그 위력을 보여줬다. 당시 이 장면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국무총리는 물론 대통령 가족이 연구소를 찾기도 했다. 그 때의 해프닝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때는 CO²를 이용한 레이저였다. 국무총리 방문을 앞두고 가스를 아끼기 위해 잠시 밸브를 잠궜는데 시연 당시까지 밸브 잠금 상태를 깜빡잊고 있었다. 아무리 해도 레이저 빛이 나가질 않아 긴장감으로 옷이 땀으로 흥건해질 정도였다. 다행히 밸브를 열고 성공적으로 시연을 했다."

이 교수는 그 때가 떠오르는지 얼굴가득 미소를 짓는다. 이후 그는 국방에 사용할 광통신시스템을 구축하고 하이파워 레이저 연구에 주력했다.
 

▲이 교수와 연구원들이 두번째 펨토초 레이저 시설 구축을 위해 논의하고 있다. ⓒ2011 HelloDD.com

▲사용되는 부품은 국내기업에 의뢰해 제작한다. 최소 비용으로 짧은 시간에 성과를 내는 비결이기도 하다.  ⓒ2011 HelloDD.com
◆두번째 기회 대신 선택한 한국원자력연구원

한번 유학을 포기했던 그에게 1986년 다시한번 기회가 왔다. 레이저로 유명한 미국의 기업과 국내 대학에서 그에게 제안을 해 왔다. 고민을 거듭했다. 고민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국내에 남기로 한 것. 대신 한국원자력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민을 무척 많이 했는데 원자력연에서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안이 있어 자리를 옮겼다. 마음 한켠에는 유학을 포기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국내에서 더 잘할 수 있다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원자력연에서 그가 연구에 주력한 분야는 레이저분광학이다. 이는 레이저 광선을 이용해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 또는 분자의 내부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이 교수는 자신이 있었다.

"적은 비용으로 국가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연구를 구상했다. 레이저 핵융합과 분광학 두가지가 있었는데 핵융합은 이미 선진국에서 기술을 완료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엔지니어링 뿐이었다. 그래서 레이저 분광학을 하게 됐다."

이 교수는 연구에 몰입하면서 원자력 분야에 숨어있는 동위원소 분리 기술에도 성공해 한 동안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부터 감시를 받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년전 약속을 지켜 준 노벨상 수상자

"원자력연에서는 매년 11월 심포지엄을 열고 있는데 강연자를 선정하기 위해 분광학 분야에서 유명한 미국 과학자 윌리엄 필립스에게 전화를 했었다. 일정상 다음해에나 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다음해 10월에 노벨상 물리학상을 받았다."

당시 국내는 IMF로 모두가 어려운 상태였고 도저히 안될거란 생각에 윌리엄 초청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교수의 안타까운 마음이 윌리엄에게 전달됐을까. 그가 먼저 "지난해 약속이 아직도 가능하냐"며 전화를 걸어왔다.

이 교수는 윌리엄에게 국내 사정을 설명하고 자문료 등 노벨상 수상자에게 걸맞는 대우를 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 교수는 "윌리엄 씨가 돈 때문에 한국에 오는게 아니라고 말하며 기꺼이 오겠다고 하는데 감동이 물결처럼 밀려왔다"면서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소회했다. 그해 심포지엄은 어느 해보다 참석자가 많았고 한국의 원자력연이 분광학 분야에서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국내 최초의 빛 연구소 '고등광기술연구소'를 세우다

이 교수는 원자력연에서의 연구 활동을 기반으로 2001년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그동안의 연구 인프라와 미리 준비한 기획안을 중심으로 국내에 최초로 '빛'을 연구하는 고등광기술연구소를 직접 설계하고 구축했다. 고등광기술연구소의 하나하나를 직접 만들어 갔다. 모든 시설마다 그의 손길과 숨결이 배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비들이 갖춰지자 곧바로 기존 1조분의 1초 단위의 레이저 기술인 피코초 연구를 뛰어넘는 펨토초 레이저기술 개발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정부 관계자를 설득시켜야 했는데 몇 번의 탈락끝에 A등급 과제로 채택 될 수 있었다. 당초 펨토초 레이저 개발까지 10년을 목표로 설정했는데 2008년 말에 이미 목표를 달성하고 유명 저녈에 논문까지 게재를 완료했다."

이 교수에 의하면 펨토초 초강력 레이저를 이용하면 새로운 기초연구가 가능해진다. 예술산업, 바이오, 의료 등에 접목해 소형 X선 레이저, 소형 양성자 가속기, 소형 중성자 가속기 등 연구 분야가 다양하다. 무엇보다 X선 가속기는 몸에 펄스 단위로 짧게 투영함으로써 인체에 미치는 위험율을 낮출 수 있으며, 양성자 중이온 가속기가 일반화 될 수 있어 암 치료에 많은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고등광기술연구소는 펨토초 레이저 설비를 당초 목표보다 앞당겨 하나는 이미 완성한 상태이며 현재 두 번째 설비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

이 교수는 "이는 세계 최고의 시설이다. 얼마전 중국와 일본에서 우리 기술을 배우기 위해 다녀갔다. 불과 20년전만 해도 우리가 배우기 위해 선진국을 찾아다녔는데 이제 상황이 역전됐다"면서 "펨토초 레이저는 나노기술(NT), 바이오기술(BT) 등 이용 분야가 많다. 5년, 10년 후 신성장 동력으로 외국에서는 응용연구가 활발하다. 우리도 좀 더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세계 최고의 펨토초 레이저 구축을 위해 막판 힘을 쏟고 있는 고등광기술연구소의 핵심멤버들. ⓒ2011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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