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경기운영시스템 개발·운영 맡았던 김채규 ETRI 연구위원
"척박한 환경 속에서 'GIONS' 탄생"…"한국, 우물 안 개구리서 벗어나야"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평창이 발표되자 기뻐하는 유치위원단.
<사진 출처=2018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자크 로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PYEONGCHANG 2018'이라고 쓰여진 하얀 종이를 펼쳐보이며 밝게 웃었다. 한국은 두 번의 실패라는 아픔을 뒤로 하고 세 번째 도전에서 결국 2018년 동계올림픽을 강원도 평창에 유치했다.

실패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한국의 집념이 꽃을 피우는 순간이었다. 평창의 동계올림픽 개최 소식에 김채규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원장 김흥남) 연구위원은 한 동안 제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몸에서 소름이 끼쳤다.

그에게 있어 올림픽이라는 단어는 쾌감과 전율을 오르게 하는 그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머리 속으로 예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전 세계의 눈이 1988년 서울에 집중돼 있을 때 김 위원은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가 담당했던 대회전산시스템인 경기운영시스템(GIONS)의 개발과 운용을 맡고 있었다.

1988년 9월 17일부터 16일간 펼쳐진 축제에는 세계 160개국 선수 9000여명이 참가했다. 그야말로 전 세계의 축제였다. 동시에 그에게 있어서 올림픽은 한국의 우수한 IT 인프라를 전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김채규 연구위원. ⓒ2011 HelloDD.com
"컴퓨터 프로그래밍만 하던 사람들이 가서 경기운영 시스템을 만들려고 하니 완전히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었어요. 모든 경기 방식의 룰을 심판들이나 선수에게 배우면서 프로그램을 짰죠. 승부의 세계이기 때문에 한 번 잘못 입력하면 큰일이 나는 거였어요. A와 B팀이 경기를 하는데 1대 0으로 A 팀이 이겼다고 칩시다. 그런데 잘못 입력해서 반대로 넣으면 B팀이 이기는 꼴이 돼버리잖아요. 매번 초긴장 상태였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입이 꽉 다물어져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동시에 개최하기 위해 체계화된 경기운영 시스템이 필요했던 정부는 당시 KIST에 전자시스템 개발의 일체를 맡겼다. 1980년부터 진행된 시스템 개발은 그러나 난항의 연속이었다.

당시에는 PC가 보급되기 전이어서 일반 국민에게는 시스템에 대한 이해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시험할 곳이 필요했던 연구진들은 1982년부터 전국체전에 시스템을 적용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매번 오류 투성이로 끝나기 일쑤였다.

매스컴에서는 '손보다 느린 컴퓨터', '발로가는 컴퓨터'라며 시스템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수난의 시작이었다. 개발하고 있는 도중에 경기운영시스템을 아예 외국에서 사오자는 제안도 끊이지 않았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시스템을 운용했던 곳이 미국 IBM이었다. 하지만 연구팀은 그곳에서 개발한 시스템을 가져다 쓰자는 제안 소식이 들릴 때마다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연구원 주변 사람들조차 조그마한 나라에서 어떻게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겠느냐며 폄하하기 시작했다.

그는 "돈도 없는 나라에서 당시 2500만 불이나 하는 소프트웨어를 사들여 오겠다고 하더라"며 "그래서 이를 악 물었다. 우리 힘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체전에 투입된 것"이라고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이런 과정에서 연구팀이 이를 악물면서 탄생시킨 시스템이 바로 'GIONS(Games Information On-line Networks System)'였다.

KIST 시스템공학연구소(SERI)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경기의 운영관리와 결과처리 시스템인 GIONS는 올림픽 기간인 9월17일부터 10월2일까지 16일 동안 34개 경기장의 경기 결과와 각종 통계를 현장에서 처리해 메인 프레스센터와 본부 호텔, 국제방송센터(IBC), 경기안내센터, 선수촌, 기자촌 등에 '한치의 오차 없이' 전달함으로써 1964 도쿄올림픽에 처음 컴퓨터가 도입된 이래 가장 진보된 전산시스템이라는 찬사와 함께 '서울올림픽의 또 다른 금메달'이라는 평가를 받아내는 데 이르렀다.

알기 쉬운 한 예가 베이징올림픽 수영 400m 자유형 결승에서 박태환이 터치패드에 손을 대는 순간 1위 자막이 떠오르고 0.01초를 다투는 선수들의 기록과 순위가 정확히 전광판에 나타나는 시스템이다.

터치 순간의 기록이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와 전광판에 자동으로 입력되고 게시되는 방식의 시스템을 최초로 개발한 것이 벌써 20년 전이다.

시스템 개발을 위해 뛴 연구진들의 노력과 고생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전국체전을 비롯해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준비기간 동안은 아예 합숙으로 보냈다.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새벽 6시에 일어나 구보를 하고, 운동선수와 똑같이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김 위원은 "연구원들이 자유분방하게 사고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짜증나는 일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데도 모두 불평없이 견뎌냈다. 우리가 해야 한다는 소명 때문이었다"며 "한때는 때려죽일 것 같이 달려들던 기자들이 엄청난 호평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2011 HelloDD.com

올림픽 전자시스템 개발은 단지 성공적인 올림픽이라는 성과에만 머물지 않았다. 서울올림픽 이후로 한국의 대기업들이 소프트웨어 산업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확실히 뿌리를 내린 덕분에 한국의 IT 산업은 이후로 가파른 상승세를 탈 수 있었다.

삼성 SDS, LG CNS 등이 모두 이때 탄생했다. 김 위원은 "우리나라의 소프트웨어 산업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발전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만약 그때 우리가 개발하지 않고 외국의 시스템을 샀다면 지금의 모습은 달라졌을 것"이라며 "국가적인 자존심을 과학자들이 살렸다고 생각한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이런 기억이 여전히 살아 있어서인지 그에게 있어 평창동계올림픽 개최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준비를 철저히해야 서울올림픽 때처럼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변화가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 위원은 "평창 유치 발표가 나자마자 만세를 외쳤다. 만세를 부른 순간 뭘해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평창의 성공을 위해 과학기술계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각자의 분야에서 세계 시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물건을 만들어놔야 한다. 한국은 더이상 국내에서만 머물어서는 안 된다.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우리가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과학자들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며 "지금은 전 세계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 국책연구기관으로서 반드시 새로운 것을 찾아내야 한다. 소명을 갖고 2018년이 한국이 선진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내길 마음속으로 기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평창 동계올림픽은 한국의 스포츠 선진국을 위한 도약대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한국과학계는 전세계인이 감탄해마지 않을 또하나의 IT 시스템을 자랑스럽게 선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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