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서재⑥]"TV없이 산지 10여년, 독서와 취미를 더 즐기게 돼"
"책은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독후감으로 정리해"

KIST 내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독서'하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한호규 KIST 생체분자기능연구센터 박사다. 오래전에 KIST 도서위원 활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동료 과학자들 가운데 그만큼 도서관을 자주 들락거리는 사람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올해는 KIST내에 새로 생긴 도서코너 '인문학'란에 적합한 책을 추천해주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도대체 책을 얼마나 읽기에…라는 생각이 들 만하지 않는가. 하지만 한 박사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그의 연구실은 그 명성(?)에 비해 너무나 평범했다.

잔뜩 책이 쌓여있는 연구실을 상상하며 문을 열었지만 보통 연구원의 방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잘못 찾아온 건가? 아니면 집에 따로 서재를 두고 있는 건가? 궁금증이 일어 한 박사에게 책을 어디에 보관하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의 답변이 꽤나 심드렁하다. "딱히 책을 모으고 있지 않다"는 대답이었다. 보통 독서광들은 자신이 읽은 책을 다시 읽거나, 남주기 아까워 하며 정성스레 보관하는게 대부분인데 그는 전혀 반대였다. 물론 이유가 있다.

한 박사가 책을 모으지 않는 이유는 독서가 끝난 후 독후감을 작성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부분을 독후감으로 정리 하다 보니 굳이 책을 보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독후감은 재독에 있어서도 탁월하다.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이유는 책의 문구 중에서도 꽂힌 문장이 있기 때문인데 독후감은 그 부분을 간단하게 정리해 둠으로써 읽고 싶을 때 그 부분만 발췌해 읽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감명깊었던 글귀 페이지를 적어놓기 위해 책 사이에 꼭 메모지를 끼워넣는다는 한호규 박사. ⓒ2011 HelloDD.com

"책 사이에 메모지를 끼워 넣고 감명 깊은 글귀의 페이지를 메모지에 써넣는다. 보고 싶을 때 마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읽고, 독후감을 문서로 정리해 저장해 둔다. 잊어선 안될 좋은 문구는 연구실 여기저기에 붙여놓고 되새기고 있다."

한 박사는 독후감을 정리하면서 자기 주관까지 뚜렷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인의 경우 '~인것 같다'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나만 보는 독후감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 부분은 매우 좋았다'라고 명확하게 써버릇하니 덩달아 내 주관도 뚜렷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독후감은 논문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그는 "평소 독후감을 쓰면서 주어와 동사를 맞추는 연습을 한다. 이는 문장 순서를 잘 맞춰야 하는 영어 논문 작성에도 큰 도움이 된다"면서 "또 과기인은 자기 표현이 부족하다고들 말하는데 독후감 정리를 통해 그런 부분도 완화된다"고 비결을 전해주기도 한다.

◆ "배우지 못한 다양한 분야의 목마름 채워주는 것은 '책'"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엔지니어들이 모이면, 한결같이 대학을 졸업한 직후 좀더 기술적인 강좌를 들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리고 10년 정도 경력을 쌓고 나면 비지니스와 경제학에 대해 좀더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다시 10년이 흐르면 그들은 리더십의 속성에 대해 생각하고 삶의 의미에 대해 숙고하면서 문학, 역사,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새뮤얼 C. 플러먼의 교양 있는 엔지니어라는 책에 나오는 문구다.

한호규 박사는 엔지니어뿐 아니라 과학자라면 이 말에 공감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 또한 그렇게 느끼고 있고 학생 때 공부하지 못했던 리더십과 경제학, 비지니스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목마름이 있다.

그런 그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책'이다. 한 박사의 본격적인 독서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누구의 조언과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오로지 연구만 해온 삶 속에 다양한 분야에 대한 공부욕심이 들끓기 시작, 독서의 세계로 빠지게 됐다. 그래서일까. 그는 되도록 한 분야의 책에 국한하지 않고 여러 분야를 독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자기 분야와 관련된 전문 서적이 재밌고 쉽게 읽히지만 연구하는 사람의 특성상 외부와의 접촉이 적은 만큼 다양한 사회와 인생을 접해보기 위해 여러 분야 책을 읽도록 다잡고 있다. "이쪽에서 근무하는(연구하는) 사람들은 사회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막상 사회와 접해보면 우리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낀다. 그 부족한 부분을 책이 메워준다. 책을 읽을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내가 몰랐던 사회, 그리고 인생을 보상해 주는 것이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주로 도서관에서…"돈들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독서 가능해"
 

▲책을 모으는데는 취미가 없지만  
필요해서 갖고 있다는 그의 책.
ⓒ2011 HelloDD.com
그는 책을 모으지 않기 때문에 주로 KIST 내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을 이용해 독서한다. 보고 싶은 책이 없으면 도서관 서적요청란에 직접 책이 필요한 이유를 적어 제시하기도 한다. 책에 욕심이 없냐는 질문에 그는 "구매했더라도 정말 괜찮은 책 이외에는 대부분 기부하고 팔거나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있다.

책은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읽고 난 후 관리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모으지는 않는다"며 "사람은 나이가 들면 자기 주변 영역을 늘리기보다 조금씩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될 수 있으면 정리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런 그도 절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책이 있다. 바로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다. 그는 "지구의 생명과 역사에 대해 빡빡하게 써 내려간 책이지만 지구의 역사와 사람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해준다"며 "앞으로 인간이 어떤 생각과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느끼게 해주는 책이라 그런지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원서도 샀다"고 추천해주기도 했다.

이 외에도 그는 상대방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 자세히 서술돼 있는 '카네기 인간관계론'이라는 책도 추천했다. 그는 "최근 융합연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융합연구도 각자가 가진 전공분야를 합쳐 연구하는 만큼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중요하다. 역사는 흐르나 사람과의 관계는 반복되는 만큼 주변사람들에게 이 책을 적극 권하고 있다"고 했다.

◆ " TV없이 산지 10여년…책 읽는 부모 보고 자란 두 딸, 책 읽는 속도 더 빨라"

"저희 집에는 TV가 없습니다. 10여년 전 TV가 고장났는데 저도, 가족도 TV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그 이후로 TV없이 살았죠. TV가 있으면 재미있는 프로그램도 보고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독서와 취미생활이 저절로 되더라고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그는 주로 출퇴근 시간에 짬짬이 책을 읽는다. 이제는 책든 가방이 손에 쥐어져 있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로 허전하다. 출퇴근 시간 외에는 집에서 독서를 즐긴다. 집에 TV가 없어서 그런지 독서와 취미생활이 저절로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부모가 독서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서일까. 한 박사의 두 딸은 책 읽는 속도는 물론 읽는 양도 아빠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명령하는 것 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부모 스스로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게 해주는게 제일 좋다. 애들이 한 두살 때 내 책에 낙서를 하고 공부 방해를 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좋은 학습이었다."

최근 그는 책 읽기뿐 아니라 옻칠공예에도 취미를 붙이고 있다. KIST에 외국인 손님이 많이 오는데 한국 전통적인 선물을 뭘 줄까 고민하다가 취미가 됐다고 한다. "옻칠은 화학적인 요소도 들어가기 때문에 해보면 재밌을 것 같아 2년 전부터 취미로 해오고 있다. 정년 퇴임 하기 전 KIST를 새긴 목제에 옻칠을 해서 기증하는게 내 작은 소망이다"

◆ "해외서적, 어렵다고 포기말고 일단 끝까지 읽어라…패턴 익히면 쉬워져"

한 박사는 책을 고르는데 있어 신문 일간지를 이용한다. 책 소개를 다루고 있는 코너를 살펴 체크해 마음에 드는 책들은 직접 서점에 가서 보고 고른다. 하지만 신중하게 책을 선정해도 읽다보면 마음에 드는 책은 3분의1 정도라고 한다.

그는 책을 추천 받기도, 추천해주기도 하지만 개인별 성향이 다른 만큼 마음에 드는 책을 찾기도, 추천 받기도, 추천하기도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독서를 하면 할수록 득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책 읽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에게도 책 읽기를 권유하고 싶다. 어려운 책이라도 그는 일단 끝까지 읽기를 권한다.

그는 "해외 서적의 경우 번역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스타일이 많이 바뀌는데 그 스타일이 익을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고 읽어 내려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에 따르면 한 번역가의 문장 스타일을 익히기 위해서는 3분의2 정도는 읽어야 한다. 물론 3분의2를 읽기도 쉽지 않겠지만 한번 익혀두면 그 번역자의 다른 책도 쉽게 읽어 내려갈 수 있다.

▲옷칠공예를 취미로 한다는 그는 외국인 손님이 올때면 직접 칠한 작품을 선물하기도 한다. ⓒ2011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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