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 풍덩]김훈 작가, 김억중 교수의 '수요시사' 강연
난중일기 본따 간결하면서 함축적인 필체 탄생

"저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대전 지역민의 친교와 토론이 함께하는 문화사랑방 '수요시사'는 수요일 점심 김억중 한남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의 작업실에서 열리는 이야기 마당. 19일 열린 이번 모임의 주제 강연자로는 소설 '칼의 노래' 등으로 유명한 작가 김훈이 초대됐다.

간편한 스웨터 차림으로 강단에 오른 그는 곧 어눌하지만 구수한 말투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단칼에 잘라내는 듯한, 그래서 간결하다못해 서늘한 느낌의 소설 문체와는 또다른 분위기다. 그의 첫 마디는 자신의 업에 대한 이야기였다.

온갖 형식의 컴퓨터가 판 치는 세상에서 육필 원고를 고집하는 그에게 아날로그 감성은 단어와 단어를 이어 글로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원초적인 느낌과도 같다. 사람과 세상이 기계나 다른 매체를 사이에 두지 않고 직접 연결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김 작가의 소박한 품성과도 맞닿아 보였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만으로는 표현이 안 되고 더럽고 거칠은 것들과 함께 표현해내야만 한다는 그만의 신념은 평생을 안고 가야 할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다른 면면을 함께 표현해내야 하는 어려움은 작가가 짊어져야 할 숙명과도 같다.

김 작가는 "고통 끝에 탈고를 하면 '다시는 이 짓을 안하리라'고 다짐했지만 그게 잘 안 된다"며 "글 쓰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청년시절 문득 접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관련된 공부를 해왔다는 김 작가는 35년이 지난 후에서야 '이제야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가짐에서 쓴 작품이 바로 '칼의 노래'였다. 역작임에도 오랜 산고 끝이라서인지 두 달만의 집필로 완성됐다. 그 과정에서 이가 8개나 빠지는 큰 고통을 겪었지만 30년이 넘는 숙고의 과정은 그렇게 열매를 맺었다.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이고 강렬한 그의 문체는 난중일기를 본따 연습한 결과다. 문인에게서 문장을 배운 것이 아니라 무인(武人)인 이순신에게서 문장을 배운 셈이었다. 김 작가는 "장군의 문체를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런데 함축적인 문투로는 원고지 매수가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글쓰는 사람의 생계에는 문제가 많았다"고 위트있게 표현했다. 김 작가의 책을 읽다 보면 여자의 몸에 대한 묘사가 마치 가까운 거리에서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섬세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수요시사에 참석한 한 청중이 '어찌 그렇게 여자인 나보다도 더 여자의 몸에 대해 잘 알 수 있느냐'고 질문하자 김 작가는 "의대 해부학과에 가서 여체에 대해 책도 빌려보고 의사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고 의외의 답변을 들려주었다.

여체 묘사의 비밀은 물론 해부학 교실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홈쇼핑이나 여성들만이 보는 잡지와 화보집들을 들추며 열심히 메모를 한다. 특히 야밤에 하는 여성용품 쇼핑몰의 방송은 집사람의 핀잔을 들으면서까지 열심히 본다.

김 작가는 이런 이상한 취미(?)에 대해 "(여성의 몸에 관한) 아주 자세한 상품 설명을 해주기 때문에 열심히 보게 됐다"고 설명했다. 60세 중반의 대한민국 최고 작가가 여성잡지를 한손에 쥐고 한 밤에 여성용품 방송을 보며 메모하는 모습은 상상 그 자체로도 시트콤을 연상케 한다.

김 작가는 "인간의 아름다움과 존엄을 글로 증명하는 것을 사명으로 갖고 있다"는 말로 여운남는 강연을 마무리했다. 수요시사는 지난 달 21일부터 진행됐으며 ▲미술사가 권용준(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사) ▲피아니스트 임동창(임동창의 풍류) ▲연극연출가 박장렬(연극-천재 인큐베이터) ▲바이올리니스트 김미영, 기타리스트 김정열(토크 콘서트) 등의 강연이 예정돼 있다.

수요시사 기획자인 김 교수는 "각박한 세상에서 스스로가 하는 일에만 매몰되서 살아가다 보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되돌아볼 기회가 없다. 인문학 공부는 자신과 세상, 그리고 삶을 뒤돌아보는 공부"라며 "전문가들과 함께 작은 공간, 가까운 자리에서 같이 호흡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좋은 추억을 갖고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cafe.daum.net/ANU2011)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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