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③]PBS 전과 후 '과학자들의 증언'

"15년 전에는 돈은 없어도 연구할 맛 났는데~." PBS 이야기가 나오자 정부출연연구기관의 한 과학기술자(50세)는 깊은 한숨부터 내쉰다. 그러면서 연구과제 수주 스트레스로 하염없이 지내온 세월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전의 나태한 연구소 분위기는 없어졌다지만, 대신 연구의 깊이가 없어지고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은 찾아보기 어려운 주위 환경 때문이다. 1990년대가 실(10~20명) 단위로 연구했던 과학기술자 시기였다면 2010년대는 개인 단위로 연구과제를 따오는 '앵벌이' 과학기술자의 시기다. 현장 과학기술자들은 연구비수주방식 PBS(Project Based System)가 도입된 지난 15년 전·후로 우리나라 과학기술자의 모습이 크게 변했다고 말한다. 연구현장의 생활패턴과 분위기 등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는 것이다. 특정 목표를 공유하면서 조직적인 팀으로 연구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개별적으로 연구자들 스스로 알아서 과제를 따오고 진행하는 '연구의 개별화'가 만연돼 있다. 최근 과학기술계의 유행어가 되고 있는 '연구의 융합'은 명함도 꺼내지 못할 정도다. 또 하나, 한국 과학기술계의 PBS 실행 15년을 이야기할 때 'IMF'를 빼놓을 수 없다. PBS도입 직후 IMF를 맞아 연구자들의 정년도 빼앗기고, 적지 않은 과학기술자들이 구조조정당한 그 후유증이 연구현장을 오랫동안 짓눌러 왔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중론이다. ◆ 조직적 연구에서 개별단위 연구로 "15년 전에는 실 단위로 움직였어요. 어떤 연구실은 윤활유를 전문으로, 또 어떤 실은 솔라셀을 전문으로 하는 등 실장 주도로 여러 전문가들이 그룹화돼 연구했었죠. 어떻게 보면 그때가 같은 연구목표를 지향하면서 더 긴밀하게 일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지금은 조직이 평행화된 구조죠. 부처 프로젝트를 따오기만 하면 그 사람이 왕입니다. 혼자 다 알아서 하죠." PBS 이전 출연연의 연구행태는 실장 중심의 연구체제였다. 실장이 정부에서 연구비를 따오는 역할을 하는 대신 인사와 예산권 등 전권을 휘둘렀다. 실장의 리더십으로 특정 연구목표를 갖고 10명에서 20명 내외의 다양한 분야의 연구진이 움직였다. 지금보다는 연구가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다만 실장이 전권을 휘둘러 일부에서는 부작용도 나왔다. 실장의 횡포가 심한 팀에서는 연구원들의 운신의 폭이 너무 좁아 불만이 있었다. 한마디로 실장 잘만난 연구원과 잘못 만난 연구원들의 삶이 크게 갈렸던 시대였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출연연이 초기 설립단계를 지나 주로 기초연구보다는 응용연구를 많이 추진했다. 성과 창출 측면에서도 굵직한 성과들이 막 나오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러던중 정부는 출연연에 경쟁 촉진을 통한 연구성과 도출을 위해 PBS를 도입하게 됐다. 이에 따라 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월성을 확보해 가던 실 단위의 연구조직이 서서히 깨지면서 그 생명체들이 뿔뿔히 흩어지게 됐다. 지금은 출연연 연구자들이 대학 교수와 개별 단위로 연구수주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정부부처 과제비율이 많은 출연연에서 연구원장이 조직적으로 연구테마를 잡고 연구소 역량을 모으려 해도 쉽지 않다. 옛날 같으면 연구협력이 쉬웠는데 이제는 경쟁해야 하기에 협동연구보다 개별연구 경향이 강해졌다. 21세기들어 세계적인 연구 추세가 융합연구, 오픈이노베이션 맥락인데 그런 면에서 보면 한국 과학기술계는 거꾸로 달려가고 있는 셈이다. 출연연이 부처 사업을 따라다니다 보니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정도의 과제 수행으로 연구의 연속성이 떨어지고 그 결과가 연구역량이 뿔뿔이 분산될 수 밖에 없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계획을 세우고 지속성 있게 연구해야 하는데 경쟁 유발 취지의 PBS가 너무 단일 과제 위주로 치닫는 것이 국가적으로는 큰 손실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한 과학자는 "지금은 자기 연구하는데만 관심이 있지 남이 뭘 하는지 주변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없다"며 "국가 전략적이고 조직적 연구는 사라지고 개별 연구들만 남았다"고 안타까워 했다. ◆ "그땐 실력있는 연구 리더들이 많았었죠" "과거에는 어쨌든 실력있는 연구자들이 출연연에 많았어요. 그런데 우수한 사람들이 대학으로 많이 갔어요." "현재요? 생각해 보세요. 어떤 우수하고 똑똑한 연구자가 연구비 따러 다녀야 하는 출연연 과학자 생활을 하고 싶겠어요?" 연구현장에서 15년 전과 지금의 뚜렷한 차이는 우수한 과학자들이 있으냐 없느냐로 구분된다. '출연연에 쭉정이만 남았다'는 자조섞인 비아냥을 과학자들 스스로 공공연하게 할 정도다. PBS 체제 이후 출연연의 맏형격인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를 비롯해 대다수 출연연 연구원들은 교수와 연구원 신분을 고민하다가 결국 기회가 닿을 때 교수 자리로 이직하는 현상이 가속화됐고, 그러한 분위기가 여전히 팽배하다는 게 과학자들의 이야기다. 사회 분위기가 연구원 신분보다 교수 신분을 더 높이 평가하는 문화적 배경도 있지만 PBS가 연구원들을 대학으로 이직을 부추긴 촉진제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내부 사례를 들어봤다. K 출연연에서 전폭 지원을 약속하며 영입한 P 박사. 3년 프로젝트를 추진하다가 도중에 서울의 S 대학교로 이직했다. 연구소 차원에서는 그 연구자만 믿고 엄청난 지원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대학으로 이직해 관련 연구 프로젝트는 부문별로 선임연구원들에게 쪼개져 분배됐다. 국가적 성과를 기대했던 P 박사의 연구는 결국 여러 연구자들에게 나뉘어져 명맥을 유지하나 싶었지만 얼마 안가서 연구의 알맹이가 없어져 버린 꼴이 됐다. 단순히 P 박사 사례만이 아니다. 이런 일들이 연구현장에서는 비일비재하다. 매년 국정감사에서 출연연의 대학 이직은 케케묵은 이슈가 돼버렸다. 일부 출연연에서는 이러한 현상들 때문에 중요한 내부 연구과제를 이끌 책임연구원에게 '과제를 끝까지 책임져야 하고, 이행 못할시 불이익이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받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다. 통계수치도 이러한 현상을 증명한다. 김세연 한나라당 의원에 따르면 지난 2010년부터 올해까지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13개 출연연의 이직 연구원 113명 가운데 83.2%인 93명이 선임급 이상 연구원이었다. 특히 연구를 총괄하는 책임급 연구원은 전체의 28%. 당연히 진행되던 연구 프로젝트에 상당한 차질을 빚게 됐다. 자리를 자꾸 옮기다 보면 기술축적도 어렵다. 일순간에 지난 기술노하우가 무너져 버린다. 최근 출연연의 신규 정규직 채용자 이직율도 증가추세다. 지난 2007년 10%였으나 2010년에는 19.8%로 증가했다. 전체 정규직 이직자 비율도 지난 2007년 대비 작년에는 1.5배 늘어난 40.4%였다. 권영진 한나라당 의원이 지난 국감에서 밝힌 자료다. 물론 출연연 연구원들의 대학 이직 현상이 단순히 하드웨어적인 연구시설이나 장비 탓은 아니라는 목소리도 많다. 과거에는 해외 우수 연구인력들이 출연연의 우수한 연구시설을 갖춘 안정적 환경 때문에 한국행을 택했다. 그러나 현재는 연구할 수 있는 장비나 시설은 세계적이지만, 연구성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안돼 쉽게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지 않는다. ◆ 과거엔 평가가 없어 나태 vs 지금은 평가가 많아 연구질 저하 "90년대 중반 출연연에는 평가가 없었다. 전반적으로 조직 분위기가 느슨하고 나태한 경향이 있었다. 연구원 입장에서는 부담이 별로 없었다. 인건비 100% 다 줬다. 경쟁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한마디로 룰루랄라였다." 현장 과학자들은 과거 연구소 분위기가 나태한 탓에 그래서 도입된 것이 PBS였다고 이해하고 있다. 연구자들간 경쟁을 유발시켜 성과를 잘 내보자는 취지로 시작됐다는 것이다. 취지는 좋았다. 문제는 별다른 기준 없이 과학계에 적용하다 보니 부정적으로 흘러갔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주된 평가다. 100% 인건비를 받던 삶에서 적정수준인 70~80% 수준이 아니라 30%대까지 내려간 사실이 연구현장에는 치명적이었다는 분석이다. 이로 인해 출연연 과학자들은 연구는 둘째치고 연구비 확보하는데 시간을 더 쏟아붇게 됐다. 만약 적정선을 유지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나빠지진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특히 평가가 거의 없다시피한 과거와 달리 현재 과학자들은 매년 수차례 돌아오는 평가와 감사로 인해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시간 보다 관료적 행정업무에 시달리는 처지다. 출연연 평가를 이야기 할 때 출연연의 성과를 무엇으로 볼 것이냐의 기준도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상태다. 연구소 특성이나 규모 등에 관계없이 천편일률적으로 모든 연구소에 논문이나 특허 성과 잣대를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과학자들은 PBS 도입이 부정적 효과만 가져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연구자들에게 연구소에서 살아남으려면 일을 하고 연구를 해야 한다는 의식이 많이 강화됐다. PBS 도입으로 출연연 연구원들의 급여도 이전과 대비해 많이 개선됐다. 프로젝트를 수주하면서 인센티브가 확대된 덕분이다. 출연연의 한 원로 과학자는 "현재로서는 PBS를 철폐한다고 해도 뚜렷한 대안이 없는 상황이지만 하루빨리 과학계와 정책 관료집단의 접점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구자들이 자율적인 책임을 다하며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영역은 그대로 살려야 하고, 또 정부 관료들은 예산 투입에 따른 성과도출과 평가를 할 때 연구현장과의 적절한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과학자는 "지금 과학계 연구자들의 의식개혁 계몽운동이 필요하며, 좋은 결과가 나오면 연구원들이 돈도 벌고 인정받는 사회적 분위기가 유도되도록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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