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⑧]자율 보장과 충분한 예산 지원이 'PBS 핵심목표'
애초 취지와는 달리 연구기관 부족자원 퍼오는 장치로 전락
"예산과 지배구조 근본적 개혁해야"

"PBS는 원래 과학자들의 창의적 연구활동을 집중 지원하고, 과학기술계를 활성화 시키게 하는 장치였다. 나태해진 과학기술계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씨앗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불꽃이 되기를 기대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에 PBS를 직접 제안해 입안시켰던 김계수 전북대학교 초빙 교수는 "PBS 시행되기 이전에는 연구를 하든 하지 않든 모든 과학자들이 기준에 맞는 동일한 월급을 받았고, 제대로 된 평가시스템이 전무하던 시절이었다"며 "보직 인사들이 전권을 휘두르던 시절, 미래를 위한 창조적 연구 활동보다는 자신보다 윗 사람에게 로비를 해야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서 젊은 과학자들에게 창의적 연구활동의 기회 제공을 목적으로, 이전부터 연구해 왔던 PBS를 정부에 제안하게 됐다. PBS라는 제도가 입안될 수 있었던 배경은 김 교수와 당시 예산기획처 예산국장과의 친분이 주효했다.

당시 STEPI(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던 김 교수는 친구인 기획처 예산국장에게 출연연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PBS를 설명했다. 당시 정부 차원에서 출연연의 청산 이야기가 나오던 중 김 교수는 하드웨어적 구조조정의 폐해를 지적하며, 수년간 연구해 왔던 소프트웨어적 구조조정 카드인 PBS를 꺼내들었다. 공청회와 KDI 연구용역, 900여명의 연구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등 4년간의 준비작업을 거쳤고, 기획처 예산국장이 이를 적극 추진하면서 결국 채택된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정책 입안자들은 PBS가 과학기술계에 신선한 자극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다.

과학기술자들의 창조적 연구 활동보다 우선시됐던 당시 보직 선호 현상과 로비 활동의 폐단을 뿌리 뽑기 위해서 제안된 PBS는 창의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집단의 개인 창의 역량을 활성화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PBS 제도가 과학기술계에 뿌리 내리는 동안 과학자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책임감과 경쟁의식에 사로잡혔고, 관료들은 과학기술의 전문성 심화로 과학자 그룹에 위임 습관이 길들여 졌다. 그런데 PBS가 과학기술계 고질병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기관의 부족자원을 PBS를 통해 메우는 일들로 오용되면서부터였다.

김 교수는 "창의적인 집단을 선별하고, 그 외 집단을 북돋워주기 위한 예산들이 기관과 연결되면서 부족자원을 채우는 수단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며 "기관장의 입장에서는 돈벌이를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고, PBS가 재정 조달의 수단으로 쓰이면서 변질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병폐를 막기 위해 별도의 재정을 투입해 특별 연구팀을 가동해 보자는 방안도 시도됐었다. 그러나 시스템 부재로 결국 흐지부지 됐다. 그는 "우리나라 과학기술 역사가 50년 가까이 되면서도 점점 꽃이 피기보다는 침체되고 사그러져가고 있다"며 "국가 과학기술의 가치체계는 고급화되고 있는 반면, 자꾸만 냉각되고 있다. 안타까운 현상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고 일갈했다.

◆ 출연연은 세금 먹는 하마?…삶의 질적 고도화와 정체성 연결 안되면 더이상 투자 어려워

조직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출연연은 과학기술 성장 발전 단계와 함께 성장해왔다. 모방 단계에서 창조 단계로 국가 과학기술 가치체계가 변화해왔다. 이제는 국민 삶의 질적인 고도화라는 거창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가치체계가 국가 과학기술과 연결된다. 출연연의 정체성과 존재의의는 국가와 국민에게 있다는 뜻이다. 이에 부응하지 못하면 국민 세금은 더이상 투자될 수도, 투자 되어서도 안된다.

김 교수는 "어느 순간 정치, 사회, 국제 등 문제 해결에 과학기술이 실질적 수단이 됐고, 공무원들 인식도 과학기술이 모든 부분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변했다"며 "그러나 현재 모든 부처 장관들은 자신들의 행정적인 미션을 위해 과학기술을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 좀 더 근원적이고 밑바닥에서의 과학기술 핵심 문제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계는 국민 세금으로부터 국가R&D예산을 수혈받는 재정 기반으로 움직이는 구조다. 그런만큼 출연연의 지배구조도 당연히 국민의 위임을 받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게 김 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일부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출연연 운영은 자율적으로 알아서 하도록 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비영리 조직 특성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라며 "출연연의 경우 예산 시스템과 지배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새로운 시대의 모습으로 변화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예산 시스템과 지배구조를 좋은 방향으로 진화시키지 않는다면 과학기술계 활성화는 요원하다는 진단이다.

◆ 김 교수, PBS 대안책 제시…"단일 통합 연구회 체제로 가야"

▲김 교수가 제시한 단일 통합 연구회 안. ⓒ2011 HelloDD.com

김 교수에 따르면 장기 창조 시대를 위한 새로운 과학기술 거버넌스의 지향점은 연구자의 절대연구시간 확보와 단일 창조연구 전념, 미션 연구목표 체제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는 PBS의 대안으로 직접비와 인건비를 분리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연구자들이 인건비를 벌러 다니는 기존 연구 예산시스템을 근원적으로 개혁하자는 조치다.

김 교수는 "출연연은 사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지적 인프라다. 이런 자원을 나몰라라 하고 다른 곳에 또 투자를 하고 있다. 구조적으로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조직구조의 경우 전문조직 형태의 단일 통합 연구회 체제를 제안했다. 현재 과학기술계는 교육과학기술부와 지식경제부에 각각 연구회를 두고 그 산하에 출연연이 자리하고 있는 형태다. 김 교수는 "칸막이를 세워놓고 과학기술자 집단을 나누어 놓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며 "입으로는 융합하는데, 과학기술자들은 호기심을 바탕으로 해서 연구를 하다가 돌발적으로 응용연구를 하는 것이지, 애초부터 나눠서 하는 것은 규제밖에 안된다"고 비판했다.

그래도 단일 통합 연구회 체제 방향으로의 변화가 다소 있었다. 김대중 정권 때 3개였던 연구회가 2개로 통합된 것. 이후 1개로 통합하는 것 역시 다음 정권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다. 김 교수는 "출연연 인프라가 피폐해지고 있어, 올바른 구조조정을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야 한다"며 "과학문화에 대한 심도깊은 통찰을 하고, 정부에서는 장기적으로 앞을 내다보는 새로운 예산 투자와 지배구조를 디자인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국가 차원의 연구인력 관리와 육성도 허술한 상태다. 관리와 육성에 힘을 쏟아붓지 않으면 창의적인 과학기술자 집단은 영원히 요원할 수 밖에 없다.

그는 "과학기술자 집단은 보호되고 육성돼야 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얼마나 인력이 있고, 순환이 어떻게 되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어야 한다"며 "인적자원투자관리국, 연구인프라통합관리국을 설립해 국가과학기술 인적자원에 대한 종합적인 투자가 진행돼야 한다"고 피력했다. 새로운 틀을 짜기 위해선 과학기술계의 내부 변화도 필요하다. 진정한 과학기술자들이라면 창조적인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정부에 체계적인 시스템을 꾸준히 논의하고 요구해야 한다. 그는 "우리 과학자들에게는 허수아비가 아닌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실질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며 "그 초점은 과학자들에게 절대 연구시간을 확보해 줄 수 있도록 하는데 맞춰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현재 과학자들이 점점 연구활동이 아닌 행정활동으로의 시간소비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국가 차원의 방향전환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는 문제점을 제기한 것이다.

이를 위해 김 교수는 "과학계의 내부 목소리를 정부나 국회 등 정책 입안자들에게 지속적이고 강하게 피력해야 한다"며 "그렇게 해서 출연연이 도전과 열정으로 가득찬 연구공간이어야 하며, 안주하는 땅으로 변모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혹여 양로원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걱정 아닌 걱정도 늘어놨다. 김 교수는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인기있는 이유는 신나는 경쟁과 미션이 확실하기 때문"이라며 "출연연 연구 문화 역시 신나고 자율적으로 경쟁하고 국가의 연구 미션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혁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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