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명장은 국가의 보물 -13]한석태 천문연 선임본부장
"500km 직경 망원경으로 우주를 손금보듯 연구하는 시대 곧 실현"
세계 첫 4채널 전파망원경 수신기 개발…쫓는 과학서 이끄는 과학으로

한마디로 겹경사다. 연구소 창립 37년만의 첫 국제특허 등록, 응용 연구기관이 독식했던 교육과학기술부 '한국과학기술창의상' 대통령상 수상기관 선정 등. 최근 한국천문연구원(원장 박필호)에 경사가 줄을 잇고 있다. 그것도 우주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출연연에서 기술특허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자 '희한할 정도'라는 연구현장의 감탄사까지 들려온다. 더 흥미를 끄는 사실은 겹경사의 파장을 일으킨 장본인이 천문학자가 아닌 천문연 소속의 엔지니어라는 것. 대체 엔지니어의 외도가 얼마나 위력적인가를 확인해보고 싶어 천문학자들이 하나 둘 천문연을 찾고 있다. 겹경사의 주인공, 한석태 천문연 선임본부장은 전자공학 엔지니어 출신이다. 1986년 12월 천문연과 인연을 맺은 뒤 천문학계에서 묵묵하게 외도의 길을 걸어 왔다. 엔지니어로 어느 정도는 아웃사이더의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좋을 25년. 마침내 세계 전파천문학계가 그의 성과를 목격하고 놀라워하고 있다. "세계 최초이고, 세계에서 가장 대역폭이 넓은 관측시스템이다." "전파천문학계의 새로운 혁신시스템이다. 앞으로 세계 천파천문학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비가 될 것이다."

▲ 전파망원경에 장착된 4채널 동시관측 수신기 모습. 전파망원경에서 모여진 우주전파는 빔 안내 거울을 통해 필터 1, 2, 3으로 인도된다. 필터는 전파를 주파수별로 통과시키거나 반사시켜 주파수 별로 분리한다.  분리된 전파신호는 거울 1-9를 통하여 각각 22, 43, 86, 129GHz 수신기로 전달돼 관측된다. ⓒ2011 HelloDD.com
직경 500km짜리 망원경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500m도 아니고 자그마치 500km다. 물론 실물 렌즈의 크기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500km 직경 전파망원경와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전파망원경 수신장치를 한석태 박사가 개발해 냈다. 전문용어로 표현하면 4채널(22GHz·43GHz·86GHz·129GHz) 우주전파 수신 시스템이다. 망원경 렌즈 직경이 클수록 분해능(관측 능력)도 좋아지는데, 전파망원경은 전파를 수신하는 접시 안테나의 직경이 클수록 분해능이 좋다.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최대의 전파망원경은 직경이 305m. 미국 푸에토리코에 설치된 아레시보 전파망원경이다. 지금 한 박사가 탄생시킨 이 장치는 '세계 전파천문학계의 아이폰'으로 평가받는다. 스티브잡스가 탄생시킨 아이폰처럼 기술 조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장치의 기술사양을 보면 기존에 없던 기술이 아니다. 이미 전파천문학계에 오랫동안 사용돼 오던 기술이다. 하지만 천문탐사 버전의 '아이폰'으로 내년 3월 즈음이면 우리나라도 우주를 손금들여다 보듯 파헤쳐 볼 수 있게 됐다. ◆ 기술종속 한국 유학생의 처절함…아무도 생각치 못한 '아이디어' 탄생 계기 1980년대 중반. 전자공학 인력이 한참 품귀현상을 빚고 있던 시절이다. 한 박사의 친구들도 IT업계에서 취업이 잘됐고 보수도 좋았다. 한 박사에게도 취업기회는 널려 있었다. 그런데 한 박사는 전자분야가 아닌 엉뚱한(?) 곳에 눈이 꽂혔다. 공부 욕심에 유학을 가고 싶어했던 그에게 우연히 한국천문연구원 채용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찬스였다. 공고문에 적힌 딱 한줄 '해외 유학의 기회를 준다'는 것 때문에 더도 생각 않고 지원했다. 당연히 친구들은 '도대체 거기 가서 뭐할래'라며 호기심반 놀림반으로 한박사의 기행(?)을 탓했지만, 그 선택이 한 박사의 천직이자 운명이 됐다. 입사 후 바로 다음해 1987년 미국 메사추세츠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세계 최고의 전파천문 대가들에게 배우고 익혔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한 대학에서 다양하고 거대한 천문 관측장비들로 우주를 연구하는 모습 자체가 한 박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것도 모든 장비를 연구원들 스스로 개발하고 있었다. 한 박사는 매일 그 현장을 체험하며 한국을 떠올렸다. 그럴때마다 안타까웠다. 한국은 미국에서 수입한 천문장비가 한 번 고장나면 자기 월급의 1000배 가까이 지불하면서 고쳐야 했기 때문에 기술종속의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유학생활에서 얻어 온 것은 '한국에 돌아가면 세계를 놀래켜줄만한 천문 관측시스템을 구현해보겠다'는 깡다구였다. 힘들더라도 확실히 우리의 손으로 장비를 개발해야겠다는 작심이었다. 1989년 연구소로 복귀해 43GHz급 전파망원경 수신장치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첫 시도지만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보편적인 수신장치였다. 유학시절 어깨너머로 배웠던 것을 실제 만들려니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첫 수신기 만들때가 가장 힘들었다. 영하 250℃까지 냉각을 시킨 진공챔버를 만들어야 수신장치를 완성할 수 있는데 진공이 안돼 애를 먹었다. 94년 초전도체 수신기를 만들때도 마찬가지였다. 영하 269℃까지 냉각시켜야 수신기가 작동하는데 냉각이 안돼 힘든 나날을 지샜다. 결국 냉각과 진공문제로 열차례 넘게 수신기를 만들고 또 만들어 차근차근 수신기 개발 실력을 쌓아갔다. 그러다가 2003년 한 박사는 야심찬 도전장을 내밀었다. 우주 신호를 4개 채널 주파수로 분리하고 이를 동시에 연세대·울산대·탐라대 3개의 전파망원경을 네트워크시켜 우주를 측정한다는 기존에 없던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이전까지는 미국과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서만 2채널로 동시 관측이 가능했을 뿐이다. 더군다나 서울과 제주지역을 잇는 전파망원경을 네트워크화시켜 500km 직경의 전파망원경 효과를 낼 수 있는 아이디어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아이디어가 무르익어 지난 5월 연구개시 8년만에 세계 최초로 4개 채널 동시의 우주 전파망원경 수신장치를 개발하면서 세계 전파천문학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 쫓아가는 과학에서 이끄는 과학으로…"네이처, 사이언스 논문의 저수지될 것" "많은 천문학자들이 우리의 전파망원경으로 우주를 연구하면서 네이처, 사이언스지같은 유력지에 많은 논문이 발표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 박사는 자신했다. 자신이 개발한 4채널 전파망원경 수신장치가 천문연을 넘어 전파천문학계의 새로운 연구 바람을 불러올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는 천문학 이론을 잘 모른다. 성과에 대한 기대효과를 이야기 하는데 블랙홀이나 우주를 세계에서 가장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말 정도다. 어찌보면 기대효과를 풍부하게 만드는 작업은 이제 천문학자들의 몫으로 넘어간 셈이다. 한 박사는 "우리 과학이 따라잡는 과학이었는데 리드하는 천문학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아직 천문연에는 네이처, 사이언스지의 논문 제1저자가 나오지 못했는데, 앞으로 한국의 천문연이 세계 전파천문 지식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예견했다. 눈빛에 그러한 희망이 빛난다. '어떻게 전파망원경 수신기 한 우물만 25년동안 팔 수 있었냐'고 묻자 한 박사는 천문연에 있었던 덕분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자신을 지탱하고 키운 정신은 주인의식과 열정이었다고 말했다. 한 박사는 "주인의식과 열정이 없다면 우리 과학계가 조직과 국가에 기여할 수 없을 것이며, 천문연같은 출연연이 없었더라면 나같은 과학자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주변 현실은 한 박사의 헌신과 자부심을 뒷바침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게 솔직한 평가다. 요즘처럼 연구성과가 강조되는 시대에 그가 연구소에서 평가를 잘 받았을리 없다. 평가를 떠나 '그거 해서 뭐하나', '외국장비 사용하면 되지 뭘 그렇게 힘들이나'라는 주변 사람들의 냉담은 늘 한 박사의 연구열정과 주인의식을 갉아먹고는 했다. "나같은 사람도 성과를 냈는데 왜 다른 사람인들 못하겠어요? 아무리 연구환경이 열악해지고 힘들어도 조직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고 연구열정만 있으면 우리 과학계 미래는 밝다고 생각합니다." 한 박사는 이제 연구동료들과 함께 한국과 중국, 일본을 엮는 동북아 2000km 직경을 가진 전파망원경 수신시스템 구축을 위한 국제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그는 결국 한평생 출연연에 몸담아 전파천문학 연구의 중심이 한국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했다. 딱 25년 걸렸다.

▲'M87'이라는 은하 중심을 미국 VLBI(Very Long Baseline Interferometry)시스템으로 관측한 결과다. 주파수가 높아짐(파장이 짧아짐)에 따라 전파 망원경의 분해능이 좋아져, 영상 분해도가 점점 좋아짐을 알 수 있는 그림이다. ⓒ2011 HelloDD.com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