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연 단일법인화 원점 재검토해야"
"국가 과학기술 경영은 연구자 특성에 맞추는 것부터"

과학기술인들은 상대적으로 타 집단에 비해 자존감이 높다. 각자 분야에서 고도의 기술개발 활동으로 자아를 성취하다보니 다른 직종에 비해 독립심이 강하다. 지나친 경쟁 분위기는 불안감을 조성해 연구에 차질을 빚게 만든다. 무엇보다 성과지향적 연구원들은 자율적 분위기를 좋아하며, 관리 감독을 극히 싫어한다. 연구 자체에서 삶의 동기를 찾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과학자의 특징으로 꼽은 대목이다. 동서양의 과학자들은 다 비슷한 모양이다. 이 특징은 고칠 것이 아니라 존중을 하며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 국가과학기술위원회 등 과학기술 지원부서의 역할이다.

국가가 과학기술자들로부터 장기적인 국부를 캐내기 위해선 과학자들의 이러한 특성에 맞는 관리와 국가 경영이 기본 원칙이다.

그러나 과학기술 집단을 책임지고 있는 국과위를 비롯한 R&D 주무부처들은 이러한 기본 원칙과는 크게 엇나가 회복하기 힘든 상황으로 내달리고 있다.

연구원의 특성을 무시한 채 정부의 입맛대로 정부출연연구기관 통폐합 추진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19개 출연연 통폐합 법안 작업을 주도하고 있는 국과위는 '과학기술 대융합을 통한 미래 성장동력 창출'이라는 취지아래 출연연을 통합 관리한다고 한다.

ETRI처럼 부처에 남는 일부 출연연은 부처에서 역할을 좀 더 잘하게 두는 것이 의미가 있고, 다른 연구소들은 국가연구개발원으로 통합해 융합의 선두에 서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3000명에 이르는 국내 최대 출연연 ETRI와 새롭게 출범한 기초과학연구원, 앞으로 출범할 국가연구개발원, 그리고 나머지 부처 출연연들은 결국 또다시 커뮤니케이션 단절을 맛보고 R&D 각개전투 양상을 벌이는 행태는 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차기 정권에서 국가 과학기술 콘트롤타워 문제가 다시 논의될 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무리하게 국과위 이관 19개 출연연을 단일법인화시키는 법안을 무리하게 강행함에 따라 과학기술계에 혼란과 연구자에게는 연구 차질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현장에서는 이런 처사에 대해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다. 전형적인 탁상행정의 산물이라는 것. 이명박 정부는 집권 초기, 교육과 과학기술의 융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과학기술부를 없애면서 무턱대고 출연연 지배구조를 이러저리 휘둘러 왔다. 처음부터, 이제 정권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지배구조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과학기술자의 연구 특성을 감안하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연구현장 의견도 이런저런 이유로 등한시 해왔다.

과학기술부를 없애고 또다시 실권이 없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출범시켰으며, 여기에 30~40년 역사를 지닌 19개 출연연 법인을 없애버리는 작업에 대해 면밀한 효과 분석도 제대로 하지 않고 추진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주먹구구에 연구현장이 박 터진 꼴이다.

현장 연구원들은 정부의 출연연 개편 방식에 일제히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ETRI 등 부처에 남는 출연연 외에 모든 출연연이 구조조정 연구소로 선정된 꼴이다'
'단일법인화 하면 내가 수십년간 일해 왔던 우리 연구소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구조개편이 졸속이다' 등등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나온다.

본래 원했던 전체 출연연의 국과위 이관도 실패했고, 더군다나 현장에서 반대했던 단일법인화도 의견을 무시한채 강행 처리를 서두르고 있기 때문에 현장 과학자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국가 과학기술 기반을 국가가 나서 흔드는지 모르겠다'는 분위기다.

현장 연구원들이 강력하게 질타한 부분은 바로 정부의 일괄적 단일법인화 추진이다. 국과위 이관 출연연을 비롯한 대다수 출연연들은 설립 목적의 특수성이나 기관 고유의 독립성을 고려하지 않은 단일법인화는 시종일관 불합리하다고 주장해 왔다.

연구원들은 그저 이러한 지배구조의 혼란 속에서도 고도의 기술개발 활동에 전념하고 싶어 한다. 잦은 감사와 평가를 혐오하면서 자율적 연구 분위기를 앙망하고 있다. 최신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나오는 시대에서 자신의 성과가 뒤처진다고 느꼈을 때 좌절하는 본인 마음을 알기에 부단히 연구개발 활동에 전념할 뿐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출연연 개편 문제를 과학자 특성에 맞게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현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처방만 내리고 있다. 이미 정부부처끼리 결정된 사안이라는 이유로 불 보듯 뻔한 세금 낭비와 업무 비효율을 그냥 내버려둬선 안된다.

그나마 관련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게된다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법안이 통과된 뒤엔 더더욱 돌이키기 어렵다. 융합이라는 명분으로 일단 법안을 통과시켜놓고 보자는 식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정부가 진정 연구현장과 과학기술자들의 특성에 맞는 합리적이고 용기있는 대안을 마련해 주길 기대한다.

침체된 과학기술 현장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근본적인 대안은 국가가 국부를 일으킬 과학기술자를 제대로 이해하고, 과학기술자 특성에 맞는 지배구조 운영과 정책 추진이 강구되는 것이다.

과학기술계 한 원로는 "연구원은 연구활동의 목적의식을 흐트러뜨리는 정부 부처의 전횡에 반기를 들고, 정부는 다루기 어려운 까다로운 존재로 연구원을 바라보고 있다"며 "서로를 갈라놓는 불신감을 불식시킬 수 있는 특별한 방안은 존재치 않으며, 국가가 국가를 위해 연구하는 과학기술자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국가 목적에 맞는 연구개발을 어떻게 이끌어내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위에서부터 원자력연, 항우연, 표준연 현수막 모습과 노조 투쟁 사진. ⓒ2012 HelloDD.com
위에서부터 원자력연, 항우연, 표준연 현수막 모습과 노조 투쟁 사진. ⓒ2012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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