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후 원자력연 과학기록사진사…"사진은 경험이 중요"
15년 전부터 경로당, 노인정 돌며 영정 사진 찍어 선물…"연구원 잘 봐주길"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었다. 그가 가는 곳이면 어김없이 반짝이는 플래쉬가 터진다는 점이었다. 어느 곳이든 예외는 없었다. 화려한 빛이 국가의 원수를 덮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겐 완수해야 할 사명감이 있었다

.현장을 남겨야 겠다는 투철한 소명 의식이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라면 경호원의 제지를 받더라도 앞으로 무조건 다가갔다. 그 덕분에 원자력연의 역사는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겨질 수 있었다. 심재후 한국원자력연구원 과학기록사진사의 이야기다.

그의 카메라에는 지난 36년간의 원자력연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연구원에 들어온 때가 1976년 11월, 추운 날이었으니 벌써 강산이 3번하고도 반 이상이 지난 셈이다. 그는 이미 퇴직한 몸이지만 필요에 의해 연구원에 다시 돌아와 대외협력에 힘쓰고 있었다.

"올해 중순부터 사진 기록을 정리하는 데 매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창고에 보관돼 있는데, 날짜별로 필름과 사진이 같이 있다보니 양이 많아서요. 필요없는 사진들 때문에 칸을 다 잡아먹더라고요. 필요한 사진만 걸러내고 디지털로 변환하려고 합니다.

그럼 축소가 되겠죠." 사실 그는 사진을 전공한 전문가는 아니다. 사진을 접한 건 친구 때문이었다. 당시 DP점(소규모 현상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친구는 필름 현상을 할 때 마다 심 씨에게 보여주곤 했다. 아무것도 없는 종이 위에 사진이 나타나는 것이 마냥 신기했던 그는 카메라에 점차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관심은 점차 취미로까지 이어졌다.

군대 정훈실에서 사진을 찍게 된 배경도 그의 호기심 덕택이었다. "예술적 감각이 있었다고 해야 하나. 원래 미술 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중학교 때 까지 미술을 했었거든요. 학교 대표로 대회에 나가기도 하고. 그런데 부모님이 미술을 하면 밥 빌어먹기 힘들다고 해서 그만뒀죠. 아쉬웠어요. 그런데 그때는 뭐 먹고 살기 힘들 때였으니 어쩔 수 없었죠.

그림은 아니었지만 사진도 그림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으니 나름 관심이 많이 갔던 것 같아요." 해병대 본부에서 미군 부대로 파견을 나갔던 그는 그곳 정훈실에서 흑백 사진 현상 방법과 카메라 찍는 방법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웠다. 그것이 경력이 돼 연구원에서도 사진을 계속 찍게 됐다. 심 씨는 "들어와서 제일 많이 찍었던 것은 행사 사진들이었다.

실험 장면도 많았다. 연구소와 관계된 사진들은 무조건 다 찍었다"며 "1959년에 연구원이 설립됐는데, 그때부터의 사진 기록들이 다 보관돼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시삽 장면부터 보관돼 있으니 그 양으로만 치면 50만 장은 거뜬히 넘는다. 온갖 유명인들이 그의 카메라 안에서 웃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은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였다.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의 준공식 일주일전 김영삼 대통령이 방문했었는데, 심 씨는 당시 대통령 옆을 따라다니면서 근접 촬영을 했다. 사진하는 사람으로서는 영광일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이전에는 대통령이 와도 사진을 찍을 수 없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때에는 근처에도 못갔죠.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조금씩 허용이 됐던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근접 촬영이 허락됐으니 그만큼 영광스러운 일도 없었죠.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어요. 취미 생활을 일로 할 수 있는 것만도 기쁨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표정을 일일이 기록하는 것 자체도 의미있는 일이었죠."

▲날카로운 눈으로 필름을 보고 있는
심재후 과학기록사진사.
ⓒ2012 HelloDD.com

사진에 대한 배움의 갈망이 커질수록 욕심도 커져갔다. '어떻게 하면 잘 찍을 수 있을까'란 질문은 그에게 늘 숙제일 수 밖에 없었다. 심 씨는 "행사 사진은 작품 사진과는 다르다. 그 순간을 놓치면 끝이다.

순간의 판단력이 중요하다"며 "경험이 많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대비는 하지만 매번 아쉬운 건 사실이다. 남들이 볼 때 최고라고 해도 늘 부족한 것 같다"고 겸손해했다. 원자력연에서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은 언제나 보안을 담보로 했다.

민주화 바람이 불기 전까지는 사진도 검열 대상에 포함됐었다. 홍보가 아닌 내부 보고서 용으로만 사진이 사용됐다.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990년도 이후 홍보가 진행됐고, 그의 사진이 비로소 빛을 볼 수 있었다.

"힘들었을 때야 많지만, 가장 힘들었을 때엔 안면도 핵폐기물 반대 시위가 일어났을 때였죠. 안면도 자체가 무정부 사태에 직면해 있었죠. 데모하는 곳에 가서 카메라를 가져가 찍으니까 기자인 줄 알고 다가오시더라고요. 횟수가 거듭되다보니 신분이 노출됐었어요.

가까이 가지를 못했죠. 망원렌즈 사용해서 숨어서 찍었어요. 데모하는 군중 안에 들어가 몸으로 겪지 않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목숨을 내걸고 들어가는 거거든요." 심지어 데모하는 사람들에게 붙잡혀 갇히기까지 했었다.

하루종일 나오지도 못하고 얽매여 있었던 당시의 기억은 지금에서야 추억이 됐다. 심 씨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그리고 안전에 대해 알려드리고 싶다. 15년 전부터 주위 경로당이나 노인정을 돌며 영정 사진을 찍어드리고 있다"며 "혼자하다가 연구원에서 대외협력 차원으로 경비를 부담하고 있다. 협력 차원에서 진행 중이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행사에도 빠지지 않고 출동해 사진을 찍었다. 지역 주민들을 연구원에 초청해 원자력 사용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기도 했다. 대규모로 진행되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소하게나마 연구원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뿌듯하게 했다.

유성구 관평동과 구즉동의 주민들 사이에서 심 씨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다. 이런 일 하나 하나가 모여 연구원의 기록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소신이 심 씨의 인생 방향을 이끌어 왔기에 가능했던 일들이었다.

심 씨는 "당시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후대에서는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필요없는 필름 한 커트라도 버리면 안 된다"며 "연구원에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자료 관리라고 생각된다. 연구원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자료 관리를 끝마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기록성 있는 일들은 처음부터 퇴직할 때 까지 그 분야에서 일한 사람이 있어야만 유지가 된다"며 "행정직의 경우 순환 근무 탓에 왔다 갔다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명장이 있듯 사진 관리에도 역사를 꿰뚫고 있는 기록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1970년대말 지금의 과학관앞에 있는다리.도룡리 사람들이 농사나 대전에 나갈 때
학생들이 통학할 때 이 다리를 이용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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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소양호 상고대. ⓒ2012 HelloDD.com

▲충북 충주호의 석양이 질때 촬영한것. 2000년대. ⓒ2012 HelloDD.com

▲석가탄신일날 밤에 등을 들고서신자들이
탑을 도는장면을  느리게 촬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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