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열의 한의학이야기]

몇 년간 논란이 많았던 출연연 거버넌스 문제가 이제는 물 건너갔다고 관심이 사그라드는 시점에 뜻밖의 포럼이 열렸다. '출연연 거버넌스 이대로 둘 건가?' 단일 법인보다는 차라리 이대로 가는 게 낫다는 정서가 우세했던 연구단지에서 왜 갑자기 이런 포럼이 열렸는지 많은 이들은 의아해했다.

나 또한 이 포럼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었지만 토론 내용을 보고는 적잖이 기뻤다. 무엇보다도 윤종용 위원장께서 "출연연의 비효율성은 출연연 문제가 아니라 거버넌스 문제였다"라는 말씀에 통쾌함을 느낀다.

이 통쾌함이란 내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는 그 무엇을 누군가가 간명한 말이나 글로 대신 표현해줄 때 느끼는 쾌감이다. 과연 그렇지 아니한가? 연구원 중에 누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연구 열심히 하고 논문 많이 쓰고 싶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큰 연구를 조직적으로 잘 해나가는데 장애가 되는 여러 가지 연구 외적 문제들로 인한 정력의 손실이 문제인 것이다. [윤종용 작심발언 "출연연? 세상에 이게 무슨 연구소냐?"- 기사바로가기] 현 정부 초기 정통부라는 대부를 잃은 ETRI가 몇 억 단위의 소규모 사업이라도 수주해서 인건비를 확보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 쪽의 리더 한 분이 '이것이 과연 출연연인가? 이렇게 해서 어떻게 국가 산업의 큰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고 필요한 연구를 계획적으로 해나갈 수 있겠는가?' 하고 한탄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산발적인 작은 규모의 연구는 대학이 충분히 잘 할 수 있다. 당장 눈앞에 시장과 돈이 보이는 연구는 정부가 개입하지 않아도 기업이 알아서 잘 한다. 출연연은 현재 시장도 없고 상품도 없는 상태에서 그것을 열어갈 기술을 장기적이고 계획적이며 조직적으로 준비해나가는 곳이다. 그러자면 과거 원자력연과 ETRI가 그랬듯이 사업단위당 최소한 연간 수백억원 이상 규모의 연구비를 10년 이상 장기 투자해야 한다.

이런 조건을 만들어줄 때 그 사업의 리더들은 자기 인생을 걸고 정열을 바쳐 그 일을 해내는 것이다. 중화학 강국, IT 강국 코리아가 그렇게 만들어졌고 한국형 원자로가 그런 성과물이 아닌가? 그렇다. 어느 조직이나 외부의 지나친 간섭은 비효율을 낳는다.

따라서 출연연은 상설화된 국과위로 모여서 효율적 운영 방법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자율이 필요하다. 그런 후 정부는 출연연 전체의 국가 기여도를 평가해 국가 재원을 배분하면 된다. 괜히 단일 법인화를 거론하여 국과위가 오해를 살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다만 거기에 '국가 차원의 연구 투자의 균형성'이라는 관점을 하나 넣으면 된다.

다소 걱정스런 면이 있더라도 이 관점은 수용해야 한다고 본다. 작은 연구 과제까지 세세히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큰 틀에서 출연연 전체가 방향을 잘 잡고 가는지, 투자가 합리적이고 균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와 조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개별 연구원 단위가 아니라 전체 출연연에 대해. 이를 통해 출연연의 자유의지가 보장된 국과위가 스스로 불필요해진 연구 영역은 적절히 축소시켜 나가고 대신 그 자리를 시대에 맞게 새로 필요해진 연구들로 채워 나가도록 자극할 필요가 있다.

반면 꼭 필요한 연구 영역은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긴 안목에서 새로 만들고 육성하도록 힘을 가할 필요도 있다. '전체 평가를 통한 전체 투자 규모의 조정' 정도면 출연연도 수용해야 하는 조건이 아닐까? 어느 집단도 그 집단 밖에서의 평가와 견제가 없다면 집단 이기주의로 쇠락해가기 마련이므로. 한의학 연구원은 이러한 '국가 차원의 의지'가 없었다면 결코 지금의 모습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불과 8년 전까지도 조그맣던 한의학연구원이 급성장한 것은 정부의 의지 덕택이다. 한의학 연구는 공급자와 수요자 집단이 모두 매우 빈약하다. 여타 과학 분야처럼 학문과 산업이 이미 확립된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의학 연구 사업을 일으킬 때마다 우리는 일반인보다도 연구계 내에서 더 심한 고립감을 느낀다.

다른 곳에서도 하고 있는 한약 효능 연구의 경우는 비교적 덜 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하고 독창적인 한의학 임상 관련 분야의 연구는 참으로 평가자들을 설득하기 힘들다. 만일 개별 연구원의 각자 외형을 늘리려는 노력만 있고 그 위에서 국가 연구 전체의 균형적 발전을 고려하는 관점이 없었다면 한의학연이 전체 출연연의 평균 성장률 이상으로 커나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전통의학 분야에 대한 최근의 집중 투자는 어느 나라나 국가적 차원의 개입으로 이루어져 온 것이 주지의 사실인 것이다. 국과위의 리딩 그룹은 출연연 원장이나 선임부장 등 주요 경력자들이 과반이 되도록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 사람들보다 출연연을 더 잘 알고 운영해 나갈 인재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와 같이 철저하게 자율적 운영을 보장하자. 단, 그 결과에 대해서는 국과위 밖에서 평가하고 투자를 조정하되 세부에 대한 개입은 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율성과 국가적 균형감' 두 가지 원칙으로 타협안이 잘 얻어질 것이라 기대한다면 순진한 것일까? 정치란 '구성원들이 스스로 혁신 의지를 갖고 혁신을 해나가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김종열 본부장 ⓒ2012 HelloDD.com
김종열 한국한의학연구원 체질의학연구본부장은 공학을 공부하고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서 연구하던 중 사상의학에 매료돼, 다시 한의학을 공부했습니다. 김 본부장은 8년간 임상을 통해 연구자료를 축적한 후,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이제마프로젝트를 통해 사상의학의 과학적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김 본부장은 한의학의 과거, 현재 및 미래와 우리에게 필요한 국가정책과 연구과제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 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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