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윤택 연출가, 10년 만에 '궁리' 공연
"과학자들이 과학을 삶의 철학으로 생각하길"

"만원짜리에 앞면에 세종대왕이 그려져 있는건 알겠는데 뒷면에는 무엇이 그려져 있었더라??" 단 번에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정답은 '혼천의(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던 천문관측기)'와 '천문도(별자리의 그림)'다. 세종대왕이 과학기술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니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그렇다면 혼천의와 천문도를 발명하는데 큰 기여를 한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바로 조선 세종 때의 최고 천재 과학자 장영실이다. 하지만 그에게 관련된 제대로 된 기록은 거의 없다. 해시계와 물시계 등 천재적인 재능을 과학기술로 표현한 그가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이유를 이윤택 연극연출가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빗대어 표현한다.

장영실이 원나라 출신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천민이자 변방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다. 지금도 우리는 과거와 다를바 없다. 서울이라는 수도권 중심으로 사회가 돌아가고, 정치 문제로 과학기술 이슈는 묻히기 일쑤다.

권력 중심으로 기술 된 역사를 반성하고 역사적 사건을 통해 당대 시대상과 국제 정세를 비춰보기 위해 이윤택 연출가가 연극 '궁리'를 10년만에 야심차게 들고 나왔다. 왜 하필 과학자 '장영실'인가. 그를 직접 만나봤다.

◆ "궁리, 만원 지폐 뒷면의 진실을 복원한다"

▲궁리 연습실. 이윤택 연출가가 직접 연기시범을 보여주고 있다. ⓒ2012 HelloDD.com

"대사를 하기 전 입을 벌려 숨을 들이쉬어야지. 그렇지! 이 부분에서는 목소리를 높이고 여기서는 대충 말하는 듯 대사를 해보자고. 시작!" 문을 열고 들어간 연극 '궁리' 연습실. 간이로 만든 세트 위에 배우들이 널브러져 앉아있고, 그 가운데에서 이윤택 감독이 연기법을 지도하고 있다.

진중한 분위기를 깨지 않을까 깽깽발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수첩을 꺼내는 순간 "그럼 누구의 잘못이란 말이오"라는 대사가 연습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연기자 눈빛은 독기를 품은 듯 했고 그의 목에는 힘줄이 잔득 잡혔다. 순식간에 몰입해 대사를 내뱉는 연기자 능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장영실은 '1442년(세종 24년) 임금이 타고 갈 안여(수레)를 만들었으나 그 수레바퀴가 빠지는 바람에 태형 80대를 맞고 쫓겨났다'는 조선왕조실록 마지막 기록 이후 역사에서 사라졌다. 때문에 연극 내용들은 이 연출가의 상상이 그려낸 모습이기도 하다.

연습 장면은 수레 제작 책임을 맡았던 장영실이 옥에 갇히고 그 처벌을 두고 조정 대신인 황희와 조말생, 정갑손 등이 대립하는 장면이었다. 배우가 대사를 할 때 마다 이윤택 연출가는 숨소리, 말 한마디 한마디 꼼꼼하게 체크하며 직접 시범을 보였고, 같은 실수를 여러번 하더라도 화내지 않고 배우들을 격려하며 계속 가르치기를 반복했다.

ⓒ국립극단

궁리는 지난 3월 23~25일 대전문화예술의전당에서 첫 선을 보였다. "장영실이 쫓겨난 이후 운둔한 곳이 대전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해봤어요. 장영실과 함께 수레를 만든 실무자인 임효돈이 장영실의 장인이라는 설이 있는데 임효돈 본가가 충청도거든요.

또 과학의 요람인 대전에서 과학자 이야기를 하는 것은 뜻 깊은 것 같아 첫 공연을 하게 됐습니다." 그가 장영실에게 반한 이유는 부산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장영실 기획 전시전 '궁리'를 보고 나서였다. 그는 "양맹준 부산국립박물관장이 친구라 가게 됐는데 가서 본 조선시대 과학기구들은 정말 현대적으로 모던하고 디자인도 아름다웠다"라며 "조선시대 하면 미개한 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때 이미 디지털 물시계 자격루가 만들어졌더라"라며 감탄을 잊지 못했다.

그런 천재적 인물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과 과학기구만 남고 과학자가 사라진 것에 이윤택 연출가는 의문을 품게 됐고 연극으로 복원하기를 다짐했다. 궁리는 권력중심, 수도권 중심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역사는 왕과 권력중심으로 기록됐다.

물적 기반과 세상을 받치는 중요한 역할을 한 과학자나 이공계에 대해서는 역사가 너무 소홀했다"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원자부터 핵, 의학 등 과학자가 개발하면 인류가 진화하고 부(富)도 왔다갔다 하는데 아직도 권력중심으로 역사가 기술되고 있다.

이것을 반성하자는 의미가 연극에 포함돼 있다"며 똑같은 피해가 되풀이되면 안될 것을 주장했다. 이어 그는 "만원짜리를 보면 앞면에 세종대왕이 있는데 뒷면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며 "뒷면에 혼천의라는 천문기구와 천면도가 그려져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만원짜리 뒷면의 진실을 이야기 하고 그 복원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과학자나 기업체 직원, 조직을 위해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쫓겨나고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들이 이 시대에 장영실로 현대 시대를 살아가는 장영실을 위한 작품이기도 하다"라고 덧붙였다.

◆영화, 뮤지컬, 소설 등 다양하게 선보일 예정

곤장을 맞고 궐에서 쫓겨난 장영실이 집으로 가지 않고 "나의 별 나의 별"하며 별을 쫓아가는 장면은 관객들을 애잔하게 만든 장면으로 꼽힌다. 이 연출가는 원래 영상으로 별을 처리하려고 했으나 하얗고 귀여운 드레스를 입은 별(배우)이 산 위에서 하늘하늘한 춤사위를 벌이며 장영실에게 손짓을 하는 것으로 재연출했다.

이렇게 관객들에게 더 좋은 장면을 선사하기 위해 이 연출가는 중간 중간 아이디어를 내어 구성을 수차례 바꾸기도 했다. 특히 신인 양성차원에서 주연을 제외한 20명의 연기자를 신인으로 뽑아 연극에 투입하는 색다른 도전도 감행했다.

이렇게 신인을 대거 투입하는 일은 연극계에서 흔히 있는 일이 아니지만 국립극단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과감하게 일을 진행했다는 설명이다. 신인 연기자들의 도전인 만큼 첫 대전 공연에 우려가 많았으나 대전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관객들은 호의적으로 봐주면서도 날카로운 지적과 격려를 함께 건냈으며, 블로그에도 감상평을 다수 게재했다. 특히 영화로 나오면 참 좋겠다는 반응이다. 실은 이 연출가는 궁리를 TV드라마와 영화, 소설, 뮤지컬 등 다양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초반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3월말부터는 부산국제신문 소설연재가 결정돼 진행 중이며, 원소스 멀티유즈를 향하는 모던한 역사극으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과학기술과 문화의 융합을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다. 이 연출가는 "과학 속에 인문학이 있고, 정치가 있고 삶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과학자들이 과학을 기술적인 면만 보지 않고 삶의 철학으로 생각하길 바란다. 과학과 문화가 잘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연습실로 부리나케 달려 들어간 이윤택 연출가. 60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열정을 쏟아 부은 연극 궁리는 4월 26일부터 5월 13일 서울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에서 본 공연을 갖는다.

이어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달맞이극장에서 5월18일~20일, 고양 아람누리 새라새극장에서 5월24일~27일 / 5월31일~6월3일 공연을 갖는다. 연극 '궁리'를 본 한 과학계 인사는 "과학자는 어디에 있든 과학자의 연구 본능이 발동하는 것 같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격루와 혼천의의 원리를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직접 시연해 보이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면서 "또 입고 있던 저고리를 벗어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그려 내고 우주를 꿈꾸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다른 과학계 관객은 "리더의 역할에 따라 과학자가 가진 재능이 빛을 볼 수도 있고 묻혀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600년이 지난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연극이었다. 다음에 뮤지컬로 나오면 또 보고 싶다"고 소감을 전했다.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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