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날 특집 실험실 탐방]제올라이트 국내 권위자 유룡 KAIST 교수
"노벨상 나오려면 풍토 바뀌어야"…"일주일에 하루는 반드시 놀아라"

'국보급 과학자'의 책상은 어지러웠다. 각종 논문과 책자, 인쇄물…. 그런 책상 위로 상패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The Donald W. Breck Award'. 제올라이트 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브렉상'이다.

유룡 KAIST(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특훈교수는 지난 2010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 상을 받았다. 어지러운 책상이지만 이 상패를 잘 보이는 곳에 둔 것은 관련 분야 과학자에게는 그 만큼 특별하고 영예로운 상이기 때문이다.

유 교수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지난해 사이언스가 선정한 세계 10대 연구성과에 자신의 제올라이트 연구가 이름을 올린 것. 당시 사이언스는 유 교수의 연구성과를 이렇게 평가했다. "오래된 과학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과학자에게 보내는 최대한의 찬사였다.

▲유룡 교수의 책상. 세워져 있는 상패가 한국인으로는 처음 받은 '브렉상' ⓒ2012 HelloDD.com

지난 21일은 과학의 날이었다. '국보급 과학자'로 불리는 유 교수의 실험실을 찾았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과학자에게는 어떤 DNA가 흐르고 있을까? 그에게 과학은 무엇일까? KAIST 기능성나노물질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유 교수의 실험실은 모두 4곳이다. 한 실험실당 4~5명의 대학원생들이 함께 연구하고 있다.

실험실도 교수실 만큼이나 각종 분석장치, 장비, 기기들로 어지러웠다. 하지만 팀원들의 연구 열기는 쉼없이 돌아가는 연구장비 만큼이나 뜨거웠다.

실험실에 만난 조강희 박사과정생은 "교수님께서는 창의적인 연구를 많이 강조한다.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창의적인 생각을 많이 하라고 주문하신다"며 "무슨 일을 할 때 창의적으로, 과학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과감하게 하지 않으면 제자들을 많이 혼낸다"고 말했다.

◆제올라이트 합성 세계적 권위자

유 교수는 나노다공성(多孔性) 물질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지난해 7월 사이언스를 통해 새로운 벌집모양의 제올라이트를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석유화학 등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촉매로 사용되는 제올라이트 내부에는 작은 분자들이 드나들 수 있는 1nm(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의 수많은 구멍이 존재한다. 제올라이트가 촉매제로 유용한 것은 것은 바로 이러한 구멍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보다 큰 분자는 분리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이 제올라이트 구멍의 크기를 다양화하는 것이 지난 20여년 동안 관련 학계의 난제였다. 유 교수는 벌집모양으로 큰 구멍(메조 나노기공)과 작은 구멍(마이크로 나노기공)이 규칙적으로 배열한 벌집모양의 제올라이트를 만드는데 성공해 이 숙원을 풀었다.

유 교수는 이에 앞서 지난 1999년 규칙적으로 배열된 탄소를 세계 최초로 합성했으며 2009년에는 2nm 두께의 나노판상형 제올라이트를 개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1999년 합성한 탄소는 'KAIST에서 만든 나노구조의 탄소(Carbon Mesostructured by KAIST)라는 의미의 'CMK'로 명명됐다.

◆매년 15억 지원받는 '국보급 과학자', 한때는 연간 연구비 500만원

유 교수는 나노다공성 탄소 물질의 연구분야를 개척한 공로로 지난 2007년 국가과학자로 선정됐다. 5년 동안 매년 15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고 연구성과가 좋으면 5년 더 연장된다. 과학자 개인에게 주는 국가 연구비로는 최대 규모다. 다른 시상 경력도 화려하다. 2005년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수상한데 이어 2006년에는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기술인상', 2007년에는 '세계수준급 연구영역을 개척한 한국의 과학자'에 선정되기도 했다.

유 교수는 "과학자의 가장 큰 보람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고, 그것이 다른 사람을 위해 쓰일 때"라며 "국가과학자 선정은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인정받고,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매우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국보급 과학자'로 불리는 유룡 교수도
한때는  '가난한 과학자'였다.
ⓒ2012 HelloDD.com
하지만 그에게도 '배고픈 과학자' 시절이 있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석사,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귀국 직후인 1987년에는 1년 동안 그가 손에 쥘 수 있는 연구비는 고작 500만원이었다. 이후에도 몇 년 동안은 600~700만원의 연구비가 전부였다.

유 교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사실상 연구비 없이 연구를 시작한 셈이죠. 1993년 우연히 제올라이트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시작했지만 아무도 가보지 않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실제 제올라이트 합성은 어디서 배운 것이 아니라 처음 개척한 일입니다."

유 교수의 연구결과는 네이처, 사이언스 등 세계적인 과학저널에 게재됐다. 그동안 네이처에 4편, 사이언스에 1편, 네이처 자매지에 1편의 논문이 실렸다. 종종 유명 과학저널에 논문을 게재할 수 있는 비결을 다른 과학자들에게 전수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비결은? "연구 결과가 좋게 나오면 결과만 기술합니다. 이렇게 하면 그냥 기술보고서가 될 뿐입니다.

논문은 지식을 담아야 합니다. 논문을 읽고 새로운 정보를 얻어 각자의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하죠. 다른 연구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새로운 지식과 개념,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지 않으면 좋은 논문이 될 수 없습니다." 유 교수는 핵심비결이라며 한 마디 덧붙였다. "역시 양보다 질이죠."

◆"노벨상 배출하려면 젊은 과학자에 과감히 투자해야"

유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기 위해서는 젊은 과학자에게 더 과감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 이유는 남이 하는, 유명한 연구에만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창의성 있는 연구 대신 인기가 많은 분야에 집중됐습니다.

결국 이런 과학계의 분위기가 '연구 철새'를 양산했죠. 젊은 과학자들에게 더 많이 투자해야 합니다. 고유의 연구분야를 찾게하고 10년, 20년씩 연구에 몰두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우리 과학자가 한 연구가 세계 최초, 세계 유일인 분야를 찾아야 합니다."

노벨상의 선정의 기준도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 유 교수의 생각이다. 20세기 초에는 과학발전 속도가 매우 빨랐다.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들은 정말 위대하고 유명한 과학자들이었다. 그런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근본 원리에서 큰 발전이 없다. 대신 응용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학문적, 과학적 성과 보다는 얼마나 주변에 파급효과가 있었는지, 큰 영향을 줬는지가 수상 여부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노벨상에 근접한 국내 과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거론된다. 그렇지만 정작 본인은 노벨상 수상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어떤 연구가 과학계를 한 단계 도약시키고 우리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목표로 연구에 매진한다고.

"노벨상 수상도 중요하지만 과연 어떤 분야를 연구하고, 무엇에 집중해야 우리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을 지 고민해야 합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국민스포츠의 수준이 높아지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국력과 경제력이 높아지면 노벨상 수상자도 자연스럽게 배출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반드시 놀아라"

과학자는 예술가와 비슷하다는 것이 유 교수의 생각이다. 창의성과 상상력이 연구성과를 좌우한다. 남들이 이미 개척한 연구 분야에서 잘 하는 사람이 있고, 새로운 연구영역을 개척해 성과를 내는 과학자가 있다. 과학자든 예술가든 남을 따라하기 보다, 자신만의 분야를 개척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유 교수는 제자들에게도 자유로운 생각과 창의력을 강조한다. "과학은 문학이나 예술처럼 창의적인 작업입니다. 창의적인 작업을 하려면 자유로운 생각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학생들한테 말합니다. 매일 연구하면 창의력이 떨어지니까 일주일에 반드시 하루는 놀으라고." 본인 역시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도록 노력한다.

아이디어가 있으면 연구실이든 집이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연구에 몰두한다. 낮이든 밤이든 시간도 제약이 없다. 대신 쉴 때는 최대한 여유를 갖는다. 주말이면 모처에 만들어 놓은 정원에 가서 나무와 화단을 가꾸는 게 요즘 유 교수의 큰 즐거움이다. 이런 면에서 대덕은 아쉬운 점이 많다.

일(연구)하긴 좋지만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인프라가 많지 않다는 것이 유 교수의 생각이다. "교통여건이 좋고, 연구에 열중할 수 있는 분위기는 조성되어 있습니다. 일하기 좋은 곳이죠. 그런데 사람이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문화생활이나 취미생활을 더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으면 좋겠습니다. 그야말로 일과 휴식을 함께 할 수 있는 인프라가 필요한거죠."
 

▲유룡 교수가 자신의 실험실에서 제자와 함께 실험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2012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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