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테크노크라트의 효시' 오원철·'한국 이공계의 쉰들러' 김창규
원자력연·ADD·LG화학연 등 방문 "과학이 미래"…대전현충원 참배도

▲한국 과학의 과거와 현재 주역들이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최순달 전 정보통신부 장관, 오원철 전 경제수석, 김창규 전 공군참모총장, 정연호 원자력연 원장, 한필순 전 원자력연 소장, (가운데줄 왼쪽부터)이재우 전 공군 군수사령관, 정규수 박사, 김기학 한전원자력연료 사장, 김광모 전 비서관, 박용태 전 공군사관학교 교장, (뒷줄 왼쪽부터)박성원 원자력연 부원장,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 원장, 장홍규 전 대림산업 부회장, 신성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총장, 양준석 KOPEC 단장, 이석봉 대덕넷 대표, 김동수 KOPEC 전 단장. ⓒ2012 HelloDD.com

"나 여기 있네. 지금이랑은 딴 판이구만. 저 실험할 때 관람석에까지 파편이 튀었었지." (오원철 전 경제수석) "여기 사진에 있는 비행기는 흉내만 낸 비행기야. 진짜 비행기는 따로 있었어." (김창규 전 공군참모총장) 작은 것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지팡이에 온 몸을 의지하면서도 흑백 사진을 연신 들여다보는 그들의 두 눈 가득히 아득한 옛날의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전쟁으로부터 이공계 인력을 지키기 위해 '공군기술장교제도'를 만들었던 한국 이공계 쉰들러 김창규 전 공군참모총장(93)과 대덕연구개발특구를 계획하고 물심양면 지원한 한국 경제의 테크노크라트 전설 오원철 전 경제수석(85)은 25일 대덕연구개발특구를 방문해 벅찬 그리움과 뿌듯함을 직접 대면했다. 과학기술 종합계획을 수립한 지 50년이 된 올해, 대한민국 공업화 50주년을 조명하는 다양한 움직임이 일고 있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공업화의 기적을 가능케 한 두 역사적 인물이 25일 대덕을 찾았다.

한국 과학과 이공계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김 전 총장과 오 전 수석의 업적은 한국의 이공계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 과학기술계 발전도 지금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헛된 말이 아니라는 과학기술인들의 고백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6.25가 발발했을 때에도 미래 나라 건설을 염두했었던 김 전 총장. 그는 청년들은 누구나 군인으로 참전해야 하는 전쟁의 무조건적인 요구를 거부하고 '공군기술장교' 제도를 만들어 240여 명의 이공계 인력들을 한국 공업 부흥의 씨앗으로 키워냈다.

당시 이공계 사람으로 대학 재학 중이나 학위를 가진 사람은 무조건 받아들였다. 최형섭 전 과기처 장관과 오 전 수석도 여기에 속했다. 이들은 후일 상공부의 주요 간부로 테크노크라트로 역할을 했으며, 산업계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김 전 총장을 선배로 깍듯이 모시고 있다는 오 전 수석 역시 국가의 전략적 집중 산업지역의 초석을 마련한, 현재의 과학기술인들에게는 신화와 같은 존재다. 오 전 수석이 펼쳤던 경제 관련 정책들은 과학기술인들이나 공직자들에게 교과서와 마찬가지였다.

초창기 상공부 과장·국장 시절에는 중소기업을 맡아 경공업 수출 활성화를 이끌기도 했다. 그는 대표적인 테크노크라트로서 과학기술정책가의 원조로도 꼽힌다.

김 전 총장과 오 전 수석은 이날 한국원자력연구원(원장 정연호)과 KNF(한국원자력연료·사장 김기학), ADD(국방과학연구소·소장 백홍렬), 국립대전현충원, LG화학기술연구원(원장 유진녕) 등을 방문해 현재의 과학기술계 발전 현황을 살펴봤다.

그들은 연구 현장을 둘러보며 "예전 최형섭 장관과 대덕연구개발특구를 기획했던 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며 "이공계 기피 현상이 안타깝다. 많은 이공계 인력들이 이곳에 와서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일조하기를 바란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특히 이들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덕의 주요 기관을 하루 종일 방문하는 동안 특유의 힘 있는 목소리와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들은 각 기관을 견학하는 내내 기술적인 면에 의문이 생기면 지체 없이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기도 했다.

◆ "원자력 강국 위해선 기술 자립 필요하다"
 

▲김 전 총장과 오 전 수석이 원자력연 관계자들과 환담하고 있는 모습. ⓒ2012 HelloDD.com

첫 일정으로 한국원자력연구원을 찾은 이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후배들에게 격의없는 조언을 풀어놓았다. 오 전 수석은 "현재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이 한·미 원자력협정에 따라 제한을 많이 받는다"며 "원자력 기술을 확보하려면 연구개발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협정을 어떻게 잘 이용할까 생각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한·미 원자력협정은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연방 정부간에 맺은 원자력 연료의 이용에 관한 상호 협정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미국 연방 정부 측의 사전 동의나 허락 없이 핵연료의 농축과 재처리를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불평등 조항에 대한 개정 의견이 많이 거론되고 있다. 오 전 수석은 "협정을 잘 이용해 평화적으로 이용되는 재처리 기술이라든가, 그 밖의 기술들에 대해 반드시 확보해야 세계적인 원자력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정부가 잘못한 일이다"고 강조한 뒤, "많은 후배들이 기술을 연마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가슴이 벅차다.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KNF를 방문한 이들은 김기학 사장의 야심찬 포부에 연신 박수를 치며 건승을 빌기도 했다. 김 사장은 "지금보다 더 열심히 뛰면 2020년까지 세계 1, 2위를 다투는 큰 회사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처음 기술을 도입했던 웨스팅 하우스를 뛰어넘어 이제는 거꾸로 웨스팅 하우스에서 우리 부품을 사갈 정도가 됐다"고 설명했다.

오 전 수석은 "예전 국내에서 우라늄을 찾을 때 정말 고생을 많이 했었다. 비료 공장에서 나오는 인광석에서 우라늄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경제성은 미지수였다"며 "그래도 국내에서 우라늄 자원이 발견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지금은 연료도 국산화해서 사용하고 있다.

양면성이 있지만, 원자력 산업이야말로 국운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과제이니 앞으로도 지속된 발전을 기대한다"고 부탁했다.

◆ 방위산업, 중화학산업의 전신…"제대로 된 리더 필요하다"
 

▲국방과학연구소(ADD) 전시관을 방문한 김 전 총장(맨 왼쪽)과 오 전 수석(왼쪽 두번째)이 백홍열 ADD 소장 (맨 오른쪽)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2012 HelloDD.com

"제대로 된 리더가 필요하다." ADD를 방문한 오 전 수석과 김 전 총장의 일침이다. 오 전 수석은 현재 ADD가 인력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불과 10년 전보다 3배 많은 과제 수를 충당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무엇이든 책임지고 해야 병기가 나올 수 있다"며 "지금 인원이 할 수 있는 것만 해야 한다.

대신 민간업체와 함께 해야 한다.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제대로 된 리더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총장 역시 "전쟁은 사람의 생명과 물자가 투자돼야 하는 싸움이다. 거기에서 이기고 지고가 나온다. 어떻게 하면 물자와 피를 덜 흘리고 더 많은 성과를 내느냐가 연구소에 부과된 임무다"라며 "어려울 적에 ADD에 많이 투자했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적은 투자와 땀으로 더 많은 효과를 내는데 지금 과학자들의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거기에는 리더의 리더십이 기반이 돼야 한다"고 피력했다. ADD와 이들의 인연은 각별하다.

국가 안보와도 직결되는 방위산업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일일이 챙겼던 분야이기도 했다. 오 전 수석의 말에 따르면 ADD 예산은 절차없이 대통령 허가만 받으면 됐다. 그만큼 인정을 받고 있었고, 실력도 대단했다.

당시 우수한 과학자들이 ADD의 문을 두드렸다. 그만큼 박 대통령의 관심이 특별했다. 박 대통령의 최고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중화학공업의 발전 역시 방위산업 덕분에 시작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방위산업을 권력 장악 이후부터 바로 시작했지만, 중화학공업이 기반이 되지 않는 한 방위산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이후 오 전 수석에게 국가의 전략적 집중 산업지역의 초석을 마련하게 했다. "ADD가 예전에는 서울에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북에서 너무 가까우니 후퇴할 때 대비해 대전에 정부부처가 있어야 한다고 넌지시 이야기를 했다. 대전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수시로 건설 현장에 들렀었다. 함바집에서 같이 밥 먹는 것은 물론, 차량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도록 허가도 내렸다." 오 전 수석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예산권을 누가 쥐느냐가 관건이다. ADD가 국방부에서 나와야 한다"며 "앞으로 연구개발을 함에 있어서 변명보다는 '일단 해보자' 정신으로 임하길 부탁한다.

좋은 연구개발 성과가 나와서 정부를 인정시키고, 스스로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한계는 풀릴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날 ADD는 두 원로의 대덕 방문을 축하하고 이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감사패를 증정했다.

ADD는 김 전 총장에게 "대한의 젊은 생명들이 아깝게 사라져간 6.25 존망 기로에서 공군기술장교를 통해 수많은 과학기술인들을 살려낸 공로로 이 패를 드린다"며, 오 전 수석에게는 "아낌없는 애정으로 오늘의 국방과학연구소를 있게 해주신 그동안의 마음과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 소원들의 존경과 사랑을 이 패에 담아 드린다"며 감사패를 수여했다.

◆ "한국의 금성(현 LG)이 세계의 금성이 됐다"
 

▲LG화학기술연구원(원장 유진녕·오른쪽 다섯번째)을 방문한 김 전 총장과 오 전 수석 일행. ⓒ2012 HelloDD.com

"놀랍다." LG화학기술연구원을 방문한 이들이 내뱉은 말은 놀랍게도 감탄사였다. 김 전 총장은 "한국의 금성이 세계의 금성으로 발전했다"며 "이후에도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성과 창출을 목표로 노력을 경주해 나가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특히 그들은 LG가 자랑하는 3D TV와 리튬 전지를 탑재한 전기자동차 모형 앞에서 기술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며 호기심을 나타냈다.  유진녕 LG화학기술연구원장은 "그동안 우리나라는 외국의 선진기술을 받아와 그 기술을 세계 최고로 만드는데 주력해 왔던 것이 사실"이라며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세계에서 처음, 세계에서 유일한 기술을 선도하기 시작했으며 리튬전지가 그 대표적 사례"라고 설명했다. 

오 전 수석은 리튬 전지를 탑재한 전기자동차 모델을 보고 "전기값과 휘발유값을 비교하면 어떤 것이 더 경제성이 뛰어난가"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유 원장은 "지금은 배터리가 값이 비싸서 국가적으로 사용하자라고 이야기를 못하고 있지만, 전기를 만들 때 화석연료를 쓰지 않고 원자력을 사용한다면 효율은 더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오 전 수석은 이같은 대답에 "재미난 일을 하니까 밤에 잠도 안 오겠다"며 "큰일을 해냈다. 앞으로도 국가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한전원자력연료(KNF)를 방문해 기관 현황보고를 듣고 있는 오 전 수석과 김 전 총장 일행. ⓒ2012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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