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식량난 우리가 해결할 수 있다" 자신감 피력
연구자의 책무·윤리의식 강조 "연구는 스포츠다"
원장된 후에도 5시 출근해 연구·9시부터 기관장

지난 6일 오후 숨진 채 발견된 정혁(57)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원장은 감자 연구에 인생을 바쳤고, 인공 씨감자 대량생산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사람들은 그를 '감자 박사'로 불렀다. 정 원장은 또 누구보다 연구자의 성실한 자세와 윤리의식을 강조했다. 단순히 강조만 한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변에서는 본인의 잘못이나 실수 여부를 떠나 조금이라도 명예에 금이 가는 일이 생기면 그것을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또 크든 작든 책임을 다른 사람한테 미루는 성격도 아니라는 것이 지인들의 설명이다.

◆"감자로 식량난 해결"…인공 씨감자 대량생산 기술 최초 개발

정 원장은 먹거리 문제나 '식량난' 해결과 같은 인류의 숙제를 풀어야 한다는 자부심과 책임의식으로 연구에 임했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남다른 '감자 사랑'을 자랑했다. 그는 어디를 가든, 누그를 만나든 "감자는 다른 단백질 공급원이 필요한 쌀이나 밀과는 달리 그 하나만으로 모든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완벽한 구황작물"이라며 "식량이 부족한 국가에 인공 씨감자를 공급하는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농민들도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 원장은 1992년 생명연에서 세포조직 배양기술을 이용해 어른 주먹만한 종전의 씨감자를 콩알만한 크기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인공 씨감자 기술을 개발, 세계 32개국에서 특허를 받기도 했다. 세계 4대 작물 중 하나인 감자 농업분야 녹색혁명의 신호탄으로 평가받으며 주목을 받았고, 캐나다와 기술 이전 계약을 체결해 대량 생산의 길을 열기도 했다.

북한에 인공 씨감자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직접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 기술은 구슬 크기 인공 씨감자를 시험관에서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것으로, 씨감자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운송 보관이 쉬워 기존 한 트럭분의 씨감자를 인공 씨감자로 대체하면 박스 하나에 넣을 수도 있다.

지름 0.5~1㎝의 크기에 무게 1g에 불과하지만 3.3㎡(1평)의 땅에서 10~15kg의 감자를 생산할 수 있다. 무엇보다 생존력도 강하고 바이러스 감염 등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정 원장은 이 공로로 생명공학연구대상(1996), 대산농촌문화상(1996), 과학기술 우수논문상(1997), 과학기술훈장(2002) 등을 수상했다.

◆연구에 살고 연구에 죽었다…30년 외길 인생

서울대 원예학과를 졸업한 정 원장은 같은 대학에서 원예학 석사를 마친 뒤 1985년 미국 일리노이대 원예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6년 생명연의 전신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부설 유전공학연구소에 입사해 식물세포연구실장, 생물자원그룹장, 해외 생물소재허브센터장 등을 지냈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는 교육 과학기술부 프론티어 연구개발사업 자생식물 이용기술개발사업단장을 지냈으며, 2011년 5월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제10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지난 4월 대덕넷 강연 프로그램인 '셸위토크(Shall we talk)
'에 참석해 강연을  하고 있는 정혁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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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원장은 누구보다 연구자의 성실성과 책임의식, 엄격한 윤리의식을 강조했으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늘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생명원 원장으로 취임한 이후에도 새벽 5시부터 연구원에 나와 연구에 전념하고 9시부터 원장 집무에 임하는 등 한시도 연구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주변에서 "원장답지 못하다", "다른 뜻이 있는 것 아니냐", "원장일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쑤근거리는 소리도 들어야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연구자는 어떤 일을 하든, 무슨 직책을 맡든 '연구 현장'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소신 때문이다.

정 원장은 지난해 취임 직후 대덕넷과의 인터뷰에서 "원장을 하면 행정에 치어서 이전에 진행하던 연구에서 손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이번 기회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행정과 연구를 병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연구는 원장 집무 시간 외에 하는 것으로 새벽에 연구를 하니 집중도와 효율성이 3배 정도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연구자의 책무를 항상 강조했다. 그는 "모든 해결책과 성과는 바로 손에서 나오는 겁니다. 내가 믿는 단 하나의 모토죠. 손에 물 한방울 안묻히고 성과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건 위선입니다. 연구책임자가 직접 실험을 하고, 이끌고 나가야 막혔던 문제도 뚫리고 연구성과도 얻을 수 있습니다." 눈 감기 전 '죽음'을 생각할 만큼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으면서도 각종 행사에 직접 참석하고 일을 챙기는 등 원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한 것도 그의 이러한 소신 때문이었다.

◆"연구도 스포츠처럼"…연구 분야에서의 '스포츠맨십' 강조

자신의 건강관리에도 엄격했던 그는 만능 스포츠맨으로 불렸다. 특히 테니스에서는 본인 스스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선수급' 실력을 자랑했다. 지난해 기자들과의 식사자리에서 "모 연구원의 누구 박사가 최고라고 하더라"고 한 기자가 농담을 건네자 "그 분과 꼭 게임을 성사시켜달라"고 할 정도로 승부욕도 강했다.

그리고 정 원장은 연구에서도 스포츠맨십이 정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스포츠를 통해 인생 철학을 체득했다. 최선을 다하고, 겸허하게 결과를 받아들이고, 패자를 위로한다. 이런 스포츠정신, 스포츠맨십이 연구계에서도 퍼져나가야 한다"며 "무엇보다 스포츠에서는 요령이 통하지 않는데 바로 그것이 스포츠가 아름다운 이유"라고 강조했다.

또 "상대를 이기려면, 좋은 성적을 내려면 체력도 기르고 남다른 기량을 연마해야 한다"며 "결국 공짜로 얻는 게 없는데 연구도 이와 똑같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그는 스포츠처럼 즐겁게 연구에 임할 수 있는 연구원을 만들고 싶어 했다.

남다른 결과를 내고 싶고, 뭔가를 세상에 남기고 싶다면 남이 하지 않는 노력을 해야하고, 무엇보다 즐거워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30년 가까운 연구생활을 통해 터득한 진리였다. 정 원장은 늘 "재임기간 동안 연구를 즐겁게 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고, 그런 연구원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을 예정"이라고 자신의 경영철학을 밝혀왔다.

정 원장이 다른 세상으로 떠나기 전 '구설수'에 오른 것은 사실이다. 본인의 잘못이거나 실수일 수도 있고, 다른사람의 잘못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책임을 미루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고, 요령 피우지 않았으며, 본인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비보를 접한 과학계와 연구현장 종사자들이 진심으로,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참으로 아까운 과학도이자 리더를 잃었다"고 비통해하는 이유다.

 

▲지난 5일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열린 국제공동R&D센터 현판식. 이 행사는 정혁 원장이 참석한 마지막 공식행사가 됐다.  현판 바로 왼쪽 옆에서 정혁 원장이 웃고 있다.<사진=연구개발특구지원본부 제공> ⓒ2012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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