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일단 자살에 무게-유족·생명연 "실족사 가능성"
연구소기업 분쟁·의혹제기 투서 등으로 스트레스 극심
과기계 "대쪽같은 분이었는데…참 연구원 잃었다" 애도

지난 6일 정혁 한국생명공학연구원장이 숨졌다는 비보를 접한 과학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현직 원장이 사망한 것 자체가 전에 없던 초유의 일인데다, 훌륭한 인품과 뜨거운 연구열정으로 연구현장에서 많은 존경을 받아왔던 인물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생명연은 물론 연구현장 종사자들은 충격과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여기에 경찰은 일단 자살에 무게를 두고 정확한 사인규명에 착수했지만, 유족과 생명연은 "실족사일 가능성이 크다"며 정 원장의 '자살설'에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어 사인을 놓고도 논란이 예상된다.     

◆경찰 "자살에 무게"…유족·생명연 "실족사 가능성"

정 원장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일단 정 원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쪽에 무게를 두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하고 있다고 잠정 발표했다. 경찰에 따르면 정 원장은 지난 6일 오후 6시37분께 연구원 내 자생동(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 건물 앞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다 경비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그날 오후 8시께 숨졌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폐쇄회로 TV에 2층 계단으로 혼자 올라가는 모습이 녹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자생동 건물은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고, 옥상 현장에 남겨진 족적 등으로 보아 제3자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타살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옥상에는 1m 높이의 난간이 있어 실족사로 보기도 어렵다"면서 "정 원장이 벽면과 환풍구를 차례로 밟고 올라간 뒤 난간에서 뛰어내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정 원장의 정확한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유족과 협의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부검을 의뢰할 예정이다.

하지만 유족과 생명연 측은 자살로 성급하게 결론내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반발한다. 생명연은 7일 원장 사망사고에 대한 공식입장을 발표하고 "정혁 원장이 지난 6일 미확인의 사고로 사망한 것과 관련해 생명연의 공식 입장은 자살로 추정할 만한 타당한 이유와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라며 "정 원장의 사망은 최근 낙상사고 후유증에 따른 심한 어지러움증으로 인한 실족사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밝혔다.
 

▲정 원장이 투신한 자생동 건물 앞. 폴리스 라인이 쳐있다. ⓒ2012 HelloDD.com

◆대쪽같던 그에게 드리운 연구소기업의 그림자…"스트레스에 몸부림쳤다"

"정 원장은 연구소기업을 자기 손에서 놨어야 했어요. 자신은 깨끗하다며 뭐가 무섭냐고 하시던 정 원장의 모습이 생생하네요." 남들이 볼 때도 그의 성품은 대쪽같았다. 한 번 옳다고 생각한 일이면 끝까지 해내야 직성이 풀렸다.

대쪽같던 그에게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생명연 연구소 기업 '보광리소스'가 세워진 지난해였다. 대부분의 생명연 관계자들은 정 원장의 자살이 보광리소스 사기 사건과 관련돼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보광리소스는 정 원장이 세운 연구소기업으로, 김현국 전 대표와 세계 식량위기를 해결하자는 큰 취지에서 만들어진 기업이다.

정 원장은 씨감자 관련해 1992년 세포 조직 배양기술을 이용해 어른 주먹만한 종전의 씨감자를 콩알만한 크기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 세계 32개국에서 특허를 받은 바 있다. 이는 세계 4대 식량작물 중 하나인 감자 농업 분야 녹색혁명의 신호탄으로 평가받으며 주목을 받았다.

캐나다와는 기술 이전 계약을 체결해 대량 생산의 길을 열기도 했다. 생명연 원내에 인공 씨감자 국내외 실용상업화를 위해 연간 200만개의 인공 씨감자를 생산할 수 있는 시범생산공장(Pilot Plant)을 완공해 본격 가동 중에 있으며, 지난해 초에는 중국 대련시에 연간 1000만개 생산 규모의 인공 씨감자 배양설비(플랜트)를 턴키베이스 방식으로 짓는데 합의, 계약을 체결(300만 달러)하고 본격적인 기술이전 작업을 진행했었다.

그러나 김 전 보광리소스 대표가 사기성 국내외 투자 계약 분쟁에 휘말리면서, 피해를 본 투자자들이 관리 감독 책임을 물어 생명연 측에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인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그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급기야 병원에 입원을 하는 등 업무 공백을 빚었다.

이틀 뒤 퇴원했지만 근무 중 낙상사고를 당해 또 다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이밖에도 생명연 박사가 기술이전 계약료를 부풀렸다는 의혹이 제기됐었고, 인사 문제와 관련해 정 원장이 측근을 기용했다는 등의 투서가 이어져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통폐합부터 시작된 생명연 흔들기…"스트레스의 시작은 이때부터"
 

▲2008년 제기된 통폐합 이야기에 반발했던 생명연 연구원들. ⓒ2012 HelloDD.com

생명연은 다른 출연연보다 유독 외압이 많았던 기관이었다. 본격적인 생명연 흔들기의 시작은 2008년 제기된 KAIST와의 통합설이었다. '대학과 출연연 연계방안'에 의해 KAIST와 생명연의 통합이 제기됐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생명연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대응했었다.

당시 생명연은 전 직원 비상대책위 체제로 정부와 청와대의 결정에 반발했다. 결국 통폐합 문제는 사그러들었지만, 이후 해양연과 해양대의 통합설이 현실성있게 제안됐고 이와 함께 생명연의 통폐합설도 다시금 수면 위로 부상했다.

끊임없는 통폐합설에도 정 원장은 끄떡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은 정부와의 갈등에 많은 고심을 거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정 원장은 인터뷰를 통해 "계속 통합 반대를 외치고 있는 상황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의견을 전했다"며 "그러나 교과부에서 일방적으로 통합을 추진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전 계획에서 발전된 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생명연 관계자는 "정 원장만큼 정부에 강력하게 대응했던 사람도 없었다"며 "그만큼 연구원을 지키려고 했고, 당위성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소 운영만큼이나 연구 활동에도 신경을 썼었다.

그때부터 스트레스가 쌓였었던 것 같다. 알게 모르게 위에서 받았던 압박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최근에는 생명연 모 박사가 기술이전 계약료를 부풀렸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이어 정 원장의 인사스타일에 대한 불만도 공식적으로 나오는 등 연달아 정 원장은 악재에 휩싸였다. 여러 안 좋은 상황이 겹쳐지면서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으며 건강도 악화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SNS에서도 정 원장 추모 이어져…"한국, 과학자가 살 수 없는 나라"
 

▲트위터로 올라오고 있는 정 원장의 사망 소식. ⓒ2012 HelloDD.com

정 원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SNS에서도 추모가 이어졌다. 과학자에서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정 원장의 사망 소식 기사를 리트윗(RT)으로 퍼뜨리며 애도를 표하고 있다. 아이디 IHK1848 님은 "어제 밤 늦게 믿기지 않는 문자를 받았다.

내가 정말로 존경하는 테니스매니아 정혁 박사님의 사망소식. TV에서 생명연 원장 사망기사를 확인 후 눈물이…. 지난 주 점심 내기 테니스 게임까지 했는데… 차 트렁크에 있던 테니스가방을 집에 놓아둔다"고 애통한 심경을 밝혔다.

한 네티즌은 이같은 소식에 격앙해 "우리나라는 과학자가 도저히 살 수 없는 나라같다. 과학자들을 못 살게 들들볶으니 어떻게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세계적인 과학자들을 매장하더니 이제는 죽음으로까지 몰아갔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 이는 명백한 '명예 살인'이다"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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