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화 반세기 과학화 100년-인물편③]'과학'이라는 '시금석' 놓은 이들
이원철 우장춘 이태규 안동혁 최형섭 김순경 이휘소 이호왕 허문회 등

아무것도 없었던 시기, 절망과 답답함만이 가득했던 그때 그 순간에도 과학이라는 희망을 놓지못했던 이들이 있었다. 과학과 기술로 국가를 재건하고자 노력했던 이들, 바로 과학자였다. 그러나 열악한 상황은 이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꿋꿋이 자기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개척해 나갔던 그들 덕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 그 많은 과학자들을 찾아 기억하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원철, 우장춘, 이태규, 안동혁, 최형섭, 김순경, 이휘소, 이호왕, 허문회 박사 등 9명의 인물을 조명한다.

◆ 천문기상학을 개척한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 이원철(1896-1963)
 

▲이원철 박사. ⓒ2012 HelloDD.com
"'원철별'을 아십니까?"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 이원철은 우리나라 천문학과 기상학 분야를 개척하는 데 앞장선 과학자다. '원철별'로 널리 알려진 자신의 천문학 연구를 통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에게 자부심을 안겨줬고,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천문학 교육에도 힘썼다.

해방이후에는 중앙관상대 초대대장으로 기상인력을 키우고 관련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기상업무체계를 구축했다. 원철별로도 알려진 독수리자리 에타별에 대한 연구는 그의 업적 중 최고로 인정받고 있는 부분이다.

그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독수리자리 에타별이 시간에 따라 팽창과 수축을 되풀이하며 밝기가 변하는 맥동변광성임을 정교한 분광학적 관측과 계산으로 밝혔냈다. 이 연구는 당시 천문학계에서도 매우 앞서가는 연구주제로, 해외과학학술지에 상세히 발표됐다.

그의 학문적 성취는 당시 식민 지배를 받던 우리 민족에게 자긍심을 심어줬고, 독수리자리 에타별은 원철별로 소개돼 널리 알려지게 됐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원철은 연희전문학교의 교수가 되어 12년간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치고 행정책임을 맡으며 학교의 운영과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당시 국내 여건상 미국에서 수행했던 천문학 연구를 계속할 수는 없었지만 대학교육과 YMCA의 대중강연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열정과 재능을 교육에 쏟았다. 해방을 맞은 후에는 조선시대 천문과 기상업무를 담당했던 관상감의 재건에 적극 나서 조선총독부 기상대를 관상대로 재조직하고 초대 대장을 맡았다.

1961년까지 관상대 책임자로서 기상 및 천문분야의 인력을 키우고, 법과 제도를 확립해 우리나라 천문기상 행정의 정착에 기여했다. 또한 관상대 직원을 중심으로 한국기상학회를 조직하여 우리나라에 기상학이 뿌리내리게 했다. 또한 인하공과대학 설립과정에 참여했고, 초대학장으로 선임돼 신설대학의 기초를 닦았다.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과대학의 통합과정에 합동위원으로 참여했고,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비록 강단에 서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교육과 관련된 역할을 맡으면서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YMCA 재단이사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자신의 전 재산을 YMCA에 기부하여 마지막까지 사회봉사를 실천했다.

이원철은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로서 원철별로 널리 알려진 자신의 연구를 통해 식민지시기에 민족적 자긍심을 높여줬다. 학위를 마친 뒤에는 귀국해 연희전문학교에서 12년 동안 천문학을 가르쳤다. 해방 이후에는 국립관상대 초대대장으로 15년 이상 일하면서, 기상 및 천문분야의 인력을 키우고 관련된 법과 제도를 마련했다.

이처럼 그는 기상업무의 기틀을 닦은 우리나라 천문학과 기상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연구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과학자로서 그의 연구는 박사학위 논문 이후 계속되지 못했지만, 교육을 통해 인재들을 키워내고 기상업무체계를 구축한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 종의 합성을 입증하고 채소종자의 자급을 실현한 유전육종학자, 우장춘(1898-1959)
 

▲우장춘 박사. ⓒ2012 HelloDD.com
우장춘은 '종의 합성'이론을 실험적으로 입증하여 세계 유전육종학의 발전에 이바지한 과학자이다. 그는 6·25전쟁으로 피폐해진 조국 땅에 돌아와 채소를 비롯한 감자, 귤 등의 우량종자를 개량해 종자 생산과 자급을 실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또한 연구기관을 세우고 연구 인력을 배출하는 데 힘써 한국 농학의 뿌리를 다졌다. 우 박사는 배추와 양배추의 교잡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유채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그 과정을 유전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종간잡종과 종의 합성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현존하는 식물을 실험을 통해 합성한 최초의 예로 알려져 있으며, 이 과정에서 제시한 배추, 양배추, 유채의 게놈 구성의 상호관계는 '우장춘의 트라이앵글'이라고도 불린다. 해방 후 우리나라는 일본에서 들여오던 각종 종자의 반입이 중단돼 커다란 곤경에 처했었다.

특히 김치 등을 만드는 데 필요한 채소류는 당시 식생활의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재료였다. 이때 우 박사는 일본에서 귀국해 농업과학연구소 초대소장으로 취임해 우량종자를 확보하고 개발해냈다. 당시 최첨단 기술인 자가불화합성을 활용해 한반도에서 잘 자라며 우리 입맛에 맞는 한국 배추와 무를 개발했고, 척박한 땅에 잘 자라는 강원도 감자와 겨울 추위를 견디는 제주도 감귤의 재배법도 확립했다.

이외에도 우 박사는 종자개량 및 육종연구를 담당할 원예시험장(현재의 원예연구소)를 창설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데에도 힘썼다. 많은 우수한 젊은이들이 최신 유전육종과 종자개량에 대해 배우며 학문적 기초를 다졌으며, 국가연구소 및 민간종묘회사에 진출해 우리나라 원예학과 육종기술이 급속한 발전을 이루는 데 주춧돌이 됐다.

우 박사는 과학자로서 크게 두 단계의 시기를 살았다. 하나는 일본에서 유전육종학에 대해 학문적으로 세계적인 성과를 거둔 시기이고, 또 하나는 우리나라에서 육종기술의 기반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우량종자의 확보와 보급을 위해 노력한 시기이다.

일본 개인회사에서 농장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은 이 두 단계의 중간에 해당하는 전환기와 준비기의 성격을 지녔다. 우 박사가 일본에서 귀국한 후 뛰어난 연구업적을 계속 이어가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한국에서 그의 활동은 육종학을 시작하고 그 기반을 세우는 일에 중요한 기여를 한 개척자로서 그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우리나라 화학계의 성장에 기여한 이론화학자, 이태규(1902-1992)
 

▲이태규 박사. ⓒ2012 HelloDD.com
이태규 박사는 일본과 미국을 넘나들며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를 했던 화학자다. 1931년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식민지 출신이라는 차별을 뛰어넘어 같은 대학의 교수가 됐으며, 해방 후에는 한국 화학계의 터를 다졌다.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리-아이링' 이론 등 우수한 논문을 내놓으며,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이론화학자로 활동했다. 또한 미국 유타대학과 한국과학기술원에서 후학양성에도 많은 공헌을 하여 한국 화학계의 성장에 기여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이 박사는 경성대학 이공학부장과 국립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장으로서 학문 연구와 교육의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 1946년에는 대한화학회(창립 당시의 이름은 조선화학회)를 창립해 한국 화학계의 기틀을 다졌다.

미국 유타대학의 교수가 되어서는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을 지도해 한국 화학계를 이끌 인재로 길러냈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 KAIST 명예교수로 초빙되어 귀국한 이후에도 연구 활동을 계속하여 대학이 연구하는 곳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불어넣었다.

이처럼 그의 끊임없는 연구와 교육 덕분에 우리나라의 화학계는 다른 분야에 비해 일찍 정착하여 성장할 수 있었다. 이태규는 일찍이 교토제국대학 교수 시절에 양자화학을 일본에 소개하고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반응속도론, 유변학, 액체이론 등에 관한 우수한 논문을 발표하며 뛰어난 화학자로 발돋움했다. 특히 유타대학에서 시작한 유변학(rheology) 연구는 이론화학자로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1955년 아이링과 공동으로 발표한 논문 '비뉴턴 유동이론'은 그동안 이론적 접근이 어려웠던 비뉴턴 유동현상을 다루는 일반공식을 제시한 것이다. 이 연구업적은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으로 불리며 국제학계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이 박사는 촉매 반응 및 반응속도론, 액체 이론, 유변학(rheology) 등 이론화학의 여러 분야에서 연구 업적을 남겼다. 그 중 가장 유명하고 공들인 연구 분야는 유변학 분야였다. 유변학은 물질의 변형과 흐름 현상을 연구하는 20세기 들어 성립된 최신 분야인데, 이태규 는 유변학 중에서도 이론적 취급이 매우 어려운 비(非)뉴턴 유동에 대해 연구했다.

비뉴턴 유동이란 물체의 변형속도가 외부의 작용(응력 stress)에 정비례하지 않는 경우를 말하는데, 그 둘이 정비례 관계에 있어 점도(viscosity)가 일정한 뉴턴 유동에 비해 훨씬 복잡하여 이론적 접근이 쉽지 않았다. 이 박사는 비뉴턴 유동현상을 취급할 수 있는 일반 이론, 즉 점도의 일반 공식을 제시하여 1955년 아이링과 함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이론은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으로 불리며 당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 우리나라 산업기술과 공업의 기초를 다진 화학공학자, 안동혁(1907-2004)
 

▲안동혁 박사. ⓒ2012 HelloDD.com
안동혁 박사는 해방직후 산업기술의 기반을 앞장서서 닦은 대표적 화학공학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유지(油脂) 연구와 공업용수 조사에서 많은 연구 성과를 냈으며, 해방 후에는 중앙공업연구소 소장으로서 산업기술의 재건과 발전을 위해 크게 힘썼다.

특히 1950년대 상공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자금(Fund), 에너지(Force & Fuel), 비료(Fertilizer)로 대표되는 3F 산업정책을 추진해 한국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안 박사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경성고등공업학교 교수와 중앙시험소 연구원이 되어 산업적으로 중요했던 유지(油脂) 연구와 공업용수 조사에 매진했다.

그가 이룩한 중요한 성과로 꼽히는 공업용수조사 사업은 1937년에서 44년까지 전국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이는 해방 이후 중앙공업연구소(중앙시험소의 후신)에서 재간행되어 우리 나라 공업 발전을 위한 중요한 기초 정보가 되었다.

또한 그는 일본으로부터 중앙시험소와 경성공업전문학교 등 과학기술기관을 접수해 해방된 한국의 과학기술 건설을 주도했다. 그는 새로운 기술수요에 대비하기 위해 경성공업전문학교와 중앙공업연구소(중앙시험소의 후신)에 새로운 전공 분야를 설치하고 기술 인력을 보충했다.

그가 조직한 조선공업기술연맹과 산하 단체는 산업재건에 커다란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 과학기술단체의 모체가 됐다. 1953년 상공부 장관이 된 안 박사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한국 산업의 재건을 위해서는 산업의 가동에 요구되는 에너지와 연료(Force & Fuel), 농업 생산에 사용될 비료(Fertilizer), 그리고 이 같은 산업 건설에 자금(Fund)이 필요하다는 '3F정책'을 내세웠다.

이 정책의 추진으로 전력, 비료와 더불어 판유리, 시멘트, 철강 등 주요 산업의 건설이 시작되어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경제개발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일반 대중에게 과학기술을 알리고, 사회에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일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930년대 대중과학잡지인 '과학조선'의 간행에 기여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과학시대'라는 대중과학잡지를 간행하고, 여러 과학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다. 안 박사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연구원과 모교인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며 이 두 기관에서 유지 연구와 전국적인 수자원 조사 등을 수행했는데, 이 중 공업용수조사 사업은 그가 이룩한 중요한 성과로 꼽힌다.

이는 해방 이후 중앙공업연구소(중앙시험소의 후신)에서 다시 간행되어 우리나라 공업발전을 위한 중요한 기초정보가 됐다. 그는 해방 직후 한국 현대 과학기술 및 산업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중앙시험소, 경성공업전문학교 등 일제강점기 과학기술기관을 접수하여 재편했으며. 과학기술자들을 조직해 과총과 대한화학회, 대한요업총협회 등의 단체들의 창설에 기여했으며, 1950년대 중반에는 상공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전력과 비료, 판유리, 시멘트 등 주요 기간산업의 건설을 추진하여 한국 현대 산업의 기반을 마련했다.

◆ 우리나라 과학기술 행정의 기틀을 세운 금속공학자, 최형섭(1920-2004)
 

▲최형섭 박사. ⓒ2012 HelloDD.com
최형섭 박사는 우리나라 과학기술 행정의 기틀을 세운 금속공학자다. 이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고,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연구소의 설립과 운영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7년 반을 재직하며 대덕연구단지 건설 등 현대적 과학기술체제를 마련했다.

공직에서 은퇴한 뒤에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개발도상국에 적합한 과학기술개발 모델을 제시해 여러 나라의 과학기술정책 수립에 도움을 줬다.

최 전 장관은 민족이 부강하려면 지하자원 개발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으로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채광야금학을 공부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나라에 필요한 제련공학을 연구해 철광석을 비롯한 비황화광물의 분리, 선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논문으로 195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귀국해 낮에는 원자력연구소에서, 밤에는 자신이 주도해 설립한 금속연료종합연구소에서 금속공학 분야의 여러 주제를 연구했다. 특히 그의 '결정구조가 계면현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그 참신한 착상으로 국제학계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66년 KIST가 설립되자 초대소장으로 임명됐다. 운영이념으로 '연구의 자율성', '연구의 안정성', '연구 환경의 조성'을 내세웠으며, 해외에서 활동하던 우수한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을 유치하여 이 연구소를 짧은 기간에 국내 최고의 연구기관으로 정착시켰다.

1971년부터는 7년 반 동안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재임하며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한 기틀을 다졌다. 그는 과학기술개발의 세 가지 기본방향으로 '과학기술 발전의 기반구축', '산업기술의 전략적 개발', '과학기술의 풍토조성'을 내세웠다.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연구소와 학원이 공존하는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을 추진했고, 정보산업의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과학기술처에 정보산업국을 설치했다. 또한 기초과학의 육성을 위해 한국과학재단의 설립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 언제나 우리 민족을 소중히 여겼던 화학계의 큰 스승, 김순경(1920-2003)
 

▲김순경 박사. ⓒ2012 HelloDD.com
김순경은 이론 물리 및 화학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뤘으며 후진 양성에 노력한 우리나라 대표 화학자다. 해방과 6·25전쟁 이후 혼란기에 우리나라 화학 교육과 연구의 기초를 다졌으며, '군론'에 관한 저서 등 이론물리 및 화학분야에서 세계가 인정한 업적을 남겼다.

또한 재미과학기술자협회를 창립하여 초대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우리나라 과학기술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김 박사는 해방 후부터 17년 동안 서울대학교 화학과에서 후진을 양성했고, 미국에 건너가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도 한국 유학생들을 후원했다. 특히 그는 해방과 전쟁이라는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밑바닥에서부터 과학을 일으키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애썼다.

1960년 대한화학회 초대 간사장이 된 김 박사는 학회 운영 체제를 개편하고 활발한 추진력으로 학회활동에 생기를 불어 넣어 오늘날 대한화학회의 밑거름을 마련했으며 냉전 체제 속에서 소련의 반대를 무마해가며 1963년 국제순수화학및응용화학연합회(IUPAC)의 입회 승인을 얻어내 우리나라 화학계의 국제화에 기여했다.

김 박사는 평생 통계역학, 수리물리, 화학, 물리학 분야에서 72편의 이론논문을 발표하고 4권의 저서, 3권의 역서를 발간했으며 특히 '군론'을 완성한 대가로 인정받았다. 김 박사의 학술적 권위와 명성은 미국 브라운 대학교 화학과,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교 로렌츠 연구소,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미국 템플대학교 물리학과 등 세계 유수의 학술기관에서 그를 초빙했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이 그의 '군론'을 출판했다는 사실로 충분히 확인할 수가 있다.

김 박사는 1968년 미국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화학자 및 화공학자가 참여하는 재북미한인화학화공자협회를 창립해 초대 부회장 및 2대 회장을 역임했다. 1971년에는 미국의 과학, 공학 분야의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재미한국과학기술자협회(KSEA)의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회장에 추대됐다. 그의 공로로 KSEA는 이후 재미 과학자들이 조국의 과학기술 발전과 경제 부흥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무슨 일을 할 때든 언제나 우리 민족을 소중히 해야 한다"고 당당히 주장했던 김 박사는 평생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면서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을 지도했던 우리나라 화학계의 큰 별이다.

◆ 세계 정상급의 소립자 이론물리학자, 이휘소(1935-1977)
 

▲이휘소 박사. ⓒ2012 HelloDD.com
이휘소는 소립자 물리학 분야에서 세계 정상급의 이론가이다. 그가 연구한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와 참(charm)입자의 예견은 소립자 물리학 발전에 큰 획을 긋는 공헌으로, 이 연구업적을 토대로 7명의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내 대학교육 진흥에도 관심을 두고 인력 양성, 기자재 구입, 시설 확충 등에도 적극 지원하여 우리나라 기초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Benjamin W. Lee'로 더 유명한 이 박사는 소립자 물리학의 새로 전개되는 이론 선두에서 고에너지 물리학을 끊임없이 개척해 나아간 세계 정상급의 이론가였다.

그의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게이지 양자장론에서 재규격화 정립과 참 입자의 탐색에 관한 연구이다. 42세의 아까운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는 1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중 60여 편만으로도 10000회가 넘게 인용되었다.

이 박사는 우리나라 출생 물리학자 중 가장 뛰어났고 노벨물리학상 수상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과학자였다. 그가 제시한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는 소립자 물리학의 표준모형을 확립시켰으며, 그의 연구결과는 다른 여러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와인버그, 살람(1979년), 트후프트, 벨트만(1999년), 그로쓰, 윌첵, 폴리처(2004년) 등이 노벨상을 수상하게 됐다.

1974년 그는 참 쿼크의 존재와 관련해 'Search for Charm'이라는 획기적 논문을 발표해 참 쿼크가 존재할 경우 이들이 결합할 때 나타나는 입자들의 성질을 규명했고 그해 11월 J/ψ(제이/프사이) 입자를 발견한 리히터와 팅이 1976년 노벨상을 받게 됐다.

이 박사는 우리나라 기초과학 연구 진흥에 매우 큰 기여를 한 것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1974년 미국 AID 차관자금에 의한 서울대학교의 이공계 교육 증진 계획을 적극 지원했고, 이를 통해 국내 대학교육용 기자재를 구입하고 실험시설을 확충해 1980년대 우리나라 대학원 수준을 향상시켰다.

또한 실험물리학의 중요성을 강조해 우리나라가 고에너지 국제공동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했다. 교통사고로 인한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1970년대 유신체제에서의 핵무기 개발 시도와 관련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 '한국의 파스퇴르' 이호왕(1928-), 한탄바이러스와 서울바이러스 발견

▲이호왕 박사. ⓒ2012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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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파스퇴르'란 별명을 얻고 있는 이호왕 박사는 인류의 숙제로 남아있던 유행성출혈열 병원체인 한탄바이러스와 서울바이러스를 세계최초로 발견하고 예방백신과 진단법까지 개발한 미생물학자이다.

그의 연구 성과에 힘입어 바이러스학의 영역이 확대되고 인류가 이 세계적 질병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됐다. 그는 1969년 당시 휴전선 일대의 군인들 사이에 원인 불명의 출혈열 환자가 증가하는 것을 보고, 이 문제의 해결을 자신의 연구목표로 삼았다.

이 유행성출혈열(학술명: 신증후출혈열)은 선진국에서 약 20년간 연구했지만 원인 불명의 괴질로 판단된 연구 과제였다. 국내에서 연구비를 조달하는 일이 불가능했던 상황이라 미육군성 의학연구개발사령부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그러던 중 1976년 들쥐의 폐장에서 유행성출혈열 병원체인 한탄바이러스(Hantaanvirus)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뒤이어 1980년 서울 시내의 집쥐에게서 종이 다른 서울바이러스(Seoulvirus)를 발견하는 성과도 거뒀다. 이렇게 2종의 병원체 바이러스를 발견한 이호왕은 새로운 바이러스의 속(genus)으로 한타바이러스(Hantavirus)를 국제학계에 제안하고 공인받았다.

한탄바이러스를 발견한 뒤에는 예방백신을 개발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1985년 무렵에는 이 바이러스를 동물조직에 연속적으로 배양시킨 결과 병원성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녹십자사와 공동연구로 백신 연구개발은 활기를 띠게 됐고, 마침내 1990년 세계 최초의 유행성출혈열 예방백신 제조허가가 보건사회부로부터 나오고 한국 신약개발 1호가 탄생했다. 그는 간단하고 신속한 유행성출혈열 진단법을 일본 도쿄대학 토미야마 교수와 공동으로 연구해 1989년 새로운 진단키트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밖에도 1997년에는 한탄바이러스와 푸말라바이러스에 의한 유행성출혈열을 동시에 예방할 수 있는 혼합백신도 개발했다. 그 당시 유행성출혈열은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발병하여 매년 20만 명이 감염되고 그 중 7% 정도가 사망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그런데 이 질병의 원인과 예방책이 마련됨으로써 인류가 이 괴질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 통일벼를 개발한 세계적인 식물육종학자, 허문회(1927-2010)
 

▲허문회 박사. ⓒ2012 HelloDD.com
허문회 박사는 우리나라 주곡인 쌀의 자급을 가능하게 한 식물육종학자다. 1960-70년 당시 벼 육종기술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원연종 간 삼원교잡(유전적으로 거리가 먼 세 가지 종을 교잡)'을 통해 허 박사가 통일벼를 개발함으로써 우리 역사상 최초로 주곡인 쌀의 자급이 가능하게 됐다.

허 박사가 통일벼를 개발하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늘 쌀 부족에 시달려야 했었다. 지난 1960년대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는 잡곡 혼식 장려운동을 벌이며, 부족한 쌀의 소비를 억제하기 위한 다양한 시책들을 펴기도 했었다.

그러나 1972년부터 허 박사가 개발한 통일벼가 재배되기 시작함으로써 그 뛰어난 생산량에 힘입어 1976년에는 최초로 주곡 자급을 달성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녹색혁명이 완성됐다.

허 박사는 1960년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부임한 후 줄곧 우리나라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지난 1962년에 설립된 국제미작연구소(IRRI)에서 1964년부터 2년간 근무했으며, 이때부터 허 박사의 육종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통일벼 개발이 완료돼 품종화된 것은 1971년이었다.

통일벼는 반왜성 인디카에 자포니카의 특성을 삼원교배 방식을 통해 도입한 벼 품종이다. 통일벼는 키가 작으면서도 줄기가 두텁고 이삭이 크며, 잎이 곧게 뻗어 태양빛을 이용하는 효율이 높아 생산성이 좋다. 당시 재배됐던 자포니카 품종에 비해 30% 이상 많은 쌀을 생산할 수 있었다.

통일벼는 세계적으로 이제까지 개발된 벼 중에서 가장 높은 생산성을 낼 수 있는 이상적인 벼로 평가되고 있다. 허 박사는 통일벼의 키가 작은 유전자가 소속된 염색체상의 위치를 밝혔으며, 생산성이 높은 식물의 모양을 개발하기 위해 관련 유전현상을 구명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벼의 유전자 연구의 기반이 되는 유전자 돌연변이 벼 개발 및 분석 연구 등을 통해 21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었다. 특히 품질 육종시 문제가 되는 전분 특성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육종방법을 고안했다.

이는 야생벼가 가지는 불량 품질을 제거하면서 우수한 특성만을 재배벼로 옮기는 육종 방법으로 지금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허 박사가 발표한 논문들은 작물육종학 교과서에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많이 인용돼 한국 작물육종학의 위상을 높였으며, 육종기술들은 육종 현장에 적용되어 우수품종 육성에 이용되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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