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D 최장기근속 장성조 연구원 "나라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일했다"
1973년 과학장교 1기로 입소…연구日誌만 20권 '국방 R&D 산증인'

"과학장교 1기로 군에 갔을 때만해도 군수품 중에서 국산은 군복과 군화뿐이었지요. 심지어 철모와 숟가락까지도 모두 미제였어요. 소총조차 생산하지 못하던 우리가 잠수함과 항공기까지 개발하기까지 지난 세월 ADD의 일원으로 함께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8월 초 국방과학연구소(ADD·소장 백홍열) 42주년 창설기념식에 참석한 장성조 책임연구원의 감회는 남달랐다. 1973년 과학장교 1기로 입사해 햇수로 40년차, 입사 동기들은 하나둘 정년을 맞아 떠났고 그에게는 ADD '최장기간근속자' 기네스 주인공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40년을 한결 같이 매일 아침 8시 출근해 시험장비들을 살피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장 책임연구원. 그의 사무실엔 그가 보낸 세월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20권 넘는 연구일지와 각종 프로젝트 자료들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닌 ADD의 발자취다. 

◆ ADD 공채 1기는 전설의 과학장교, 군에서 실무 익힌 뒤 연구시작

"국방부에서 새로 만든 연구소가 있는데 서울에서 근무할 수 있다고 해서 지원했어요. 당시 공대생들에게는 연구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으니까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는 ADD 입소를 신청할 때만 해도 ADD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잘 몰랐다. 

과학장교 1기는 ADD에서 직원을 최초로 공개 채용한 공채 1기라 할 수 있다. 72년 연말 과학장교 공개채용 내용이 일간지에 공고됐고 전국 병무청에도 공군간부후보생 및 해군간부후보생 모집 공고와 함께 과학장교 모집공고가 붙었다. 지원 자격조건은 공과대학 졸업자(예정자 포함)였다. 

장성조 책임연구원은 공군간부후보생으로 지원할 생각으로 병무청에 갔다가 과학장교 모집공고를 보고 응시했다. ADD에서 필기시험을 보고 당시 서울 공릉에 있던 육군사관학교에서 장교후보생 체력검증을 실시했다. 

과학장교는 2기까지 선발한 후 특례보충역제도가 시행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과학장교는 지금의 특례보충역제도와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 최종관문을 통과한 과학장교 1기 30명은 육군과 공군, 해군, 해병대로 보내져 장교훈련을 받은 뒤 소위로 임관해 군인이 됐다. 임관 후 6개월간 현역 군인으로 군의 실무를 익히며 경력을 쌓은 뒤 1974년 1월 ADD로 돌아와 연구원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신입직원 교육 프로그램이 없이 바로 실무에 투입됐어요. 당시 신설된 항공파트에 배치돼 미사일 개발 사업에 참여하게 됐는데 실제 미사일을 본 적도 없이 일을 하려니 앞이 캄캄했죠. 미사일 정비교범부터 읽기 시작해 외국의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육군의 대포와 수류탄 등을 개발하던 ADD는 70년대 중반 우리나라 최초 지대지유도무기인 '백곰' 개발에 나섰다. 당시 육군에서 사용하던 나이키 미사일을 모델로 도면도 없이 실물을 본떠 신관부터 탄두, 유도조종장치, 추진체 등 모든 것을 우리 기술로 개발하는 것이 목표였다. 당시에는 무모한 도전 같았지만 연구원들의 노력으로 성공, 다음 모델인 '현무'는 실전에 배치되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세계는 월남이 패망, 미국에서는 카터가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북한은 이미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으며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 등을 일으키며 도발했다. 미군이 철수하면 우리가 북한을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위기감이 사회 전반에 팽배했다. 

"당시에 연구개발 경험이 있는 전문가가 부족해 미국의 장비를 모방하는 연구부터 시작했어요. 시계를 만드는 회사서 신관을, 농기구 회사서 포를 만들 만큼 열악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개발한 무기를 가공·생산할 장비가 없었다. 당시 정부는 방위성금을 모아 창원에 기계공단을 육성함으로써 방위산업을 지원했다. 장 책임연구원을 비롯한 ADD 연구원들은 창원공단에 어떤 어떤 장비가 필요하다는 조언부터 시작해 실제 공장 가동에 대한 기술지원까지 다양한 지원활동을 펼쳤다. 

출연연 전반적으로 연구환경이 열악한 시기였지만 ADD는 방위성금으로 비교적 많은 예산이 배정된 편이었다. 

ADD는 70년대 번개사업을 시작하며 한국형 수류탄과 방탄헬맷 등을 개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국방기술의 자립을 통한 자주국방의 의지는 최고조로 올랐다. 박격포, 로켓발사기와 통신장비 등 기본 병기의 국산화 시대가 비로소 열렸다. 

◆ "ADD서 개발한 기술은 모두 시험장 거쳐갔죠"
 

▲ADD '최장기간근속자' 장성조 책임연구원. ⓒ2012 HelloDD.com
ADD에는 1977년 시험평가단이 신설됐다. 장 책임연구원은 재직기간 대부분을 개발된 장비가 실제 사용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환경시험 업무를 수행했다. ADD에서 개발된 기술들은 그가 있는 시험장을 모두 거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연구소나 학교 실험실에서는 모델을 이용한 실험을 많이 하는데 ADD는 실물을 다루고 야외실험도 많기 때문에 폭발시험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예를 들어 차량 운송시 발생하는 진동에도 '화약'이 안전함을 입증하는 실험의 경우 그보다 더 큰 진동에서 실험하기 때문에 늘 위험에 노출돼 있어요."

때문에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안전이 최우선이다. 집에서도 실험실에서도 늘 안전수칙 생각뿐일 때도 많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실험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작한 인공위성인 우리별 2호의 진동시험을 꼽았다.(참고로 우리별 1호는 영국에서 제작됐다.) ADD 개발품뿐 아니라 외부에서 요구하는 시험도 종종 하는데 당시 프랑스 발사장에서 요구하는 진동시험을 수행할 수 있는 장비가 항공우주연구원에 도입되기 전이어서 ADD에 진동시험 의뢰가 들어왔다. 

"ADD에는 진동시험 장비는 있었지만 인공위성 시험을 할 수 있는 클린룸 시설이 아니었어요. 임시로 시험장 안에 비닐을 씌워 비닐하우스와 같은 클린룸을 만들었죠."

우리별 2호는 다행히 모든 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 한 우물 깊게 파는 전문가가 ADD 기술력의 근간, 후배들에겐 열정 당부 

"ADD 직원아파트는 대전 최초의 중앙난방식 아파트였어요. 모 대학 가정과 교수님이 학생들과 함께 저희 집에 견학 왔던 일도 있었죠. 이때 연구소 총각들은 대전에서 일등 신랑감으로 인기가 많았어요."

ADD는 목표하는 연구환경을 만들기 위해 서울에서 대덕연구단지 인근으로 이전했다. 연구소는 총각들에게는 기숙사를, 기혼자에게는 직원 아파트를 지원하는 등 많은 배려가 있었다.

"동창회나 가족 모임에 나가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걸 개발하는지 물어보는 사람도 많았어요. 친구들이 자신은 어떤 일을 하는지 자랑할 때면 우리 연구소에서 하는 일도 자랑하고 싶은데 보안상의 문제로 기술 등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어서 아쉬울 때도 있었죠."

지난 일을 회상하던 장 책임연구원은 ADD의 많은 연구원들이 이곳을 평생 직장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많은 연구원들이 자기 연구분야를 갖고 매진하기에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이를 기반으로 더 우수한 기술개발을 할 수 있는 것이 조직 문화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처음 군에 입소할 당시 국산이라고는 군복밖에 없었지만 이제 대부분의 군수품이 국산화됐으며 최근에는 잠수함과 군용 항공기를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장 책임연구원은 "이 같은 성과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연구풍토가 밑거름이 됐기 때문"이라며 "우리 기술로 국민을 보호하고 국가를 지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ADD에 한 평생 몸담아 왔다는 사실은 자긍이고 보람이다"고 말했다. 

호적으로 1953년 생인 장 책임연구원에게 남은 시간은 앞으로 약 2년. 정년이 되는 만60세는 아직 청춘이다. 평생을 시험장에서 몸담아 온 만큼 퇴직 전 시험장비 업그레이드를 통해 시험능력을 향상시키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정년을 앞두고 후배들에게 하던 일을 잘 물려주려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우리 세대는 국가발전을 목표로 굉장한 의욕과 열정을 갖고 일했는데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그 부분이 약한 것 같다. 자기 일에 대한 열정을 갖고 조직의 전통과 문화를 지켜갔으면 좋겠다"고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ADD 정문에 선 장성조 책임연구원. 그는 "시험성능 향상을 위해 남은 2년 동안 최선을
다하겠다" 고 말했다.
ⓒ2012 HelloDD.com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