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장 "한국 너무 마음 급하다"
"'빨리빨리'로 경제성장…연구는 장기적 안목으로 질 높여야"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다. 한국에서와 달리 독일은 모든 시스템이 느리게 움직였다. 인터넷이나 전화를 신청하면 접수 후 통신회사 직원이 집을 방문하기까지 2주가 걸렸다. 방문한 후에도 설치까지는 약 2주를 더 기다려야 한다.

인터넷 설치에만 약 1개월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장의 유럽 적응기는 '빨리 빨리'에서 '느리지만 정확하게'로 시작됐다. KIST 유럽연구소는 한국 과학기술의 국제화 촉진과 유럽연합과의 기술교류 및 공동연구 거점 확보, 한국 기업들의 기술 개발 활동의 전진기지 구축을 위해 설립됐다.

독일 잘란트 주의 수도인 자브뤼켄 시에 위치한 잘란트대학 캠퍼스 안에 자리잡은 KIST 유럽연구소는 주변에 많은 연구소와 대학이 자리잡고 있어 공동연구의 이점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이 소장은 지난 9월 부임했다. 그에 따르면 KIST 유럽연구소는 규모는 작지만 의미와 역할은 매우 중요한 연구소다.

전 세계 10여 개 나라에서 모인 60여 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는, 명실공히 국제적인 연구소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 곳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막중한 수장 역할이다. 그는 "연구소가 독일 법인으로 설립될 당시 프라운호퍼연구협회(FhG)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독일식 연구시스템이 많이 적용돼 있다"며 "외부 과제를 계약하는 경우에도 한국에서는 결재 과정에 여러 사람들의 서명이 필요하지만 이곳에서는 소장 서명 하나만 있으면 된다. 과제 책임이 소장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소장의 권한과 책임이 막중하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연구소 운영시스템이 한국에서와 같이 완전히 정착돼 있지 않아 사안별로 소장이 직접 판단해 결정해야 하는 일이 많다. 소장이 연구소 전 체 일을 손금 보듯 파악해야만 한다.

그래야 연구소가 제대로 운영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독일에서 거주한 경험도 없고, 독일어도 모르는 이 소장에게 있어 유럽연구소장 직은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그런 그가 달리 생각한 이유는 발상의 전환에 있었다.

이 소장은 "독일어를 잘 한다고 해 꼭 연구소를 잘 운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 부담은 줄어들었다"며 "한국에서 한국말을 잘 하는 사람이 기관장을 맡는다고 기관이 모두 잘 운영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소장의 책무는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의지다.

그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시키려는 노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이곳에 부임한 이후에 연구소 내에 독일어 강좌를 개설하고 여러 사람들과 같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동호회 모임 등을 만들어 연구소 내 소통 문화를 형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 "연구는 느긋하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해야 성과나올 수 있어"
 

▲KIST 유럽연구소. ⓒ2012 HelloDD.com

소장 직은 맡은 지 한 달 남짓 된 시간 동안 그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유럽인들의 생활에 서서히 적응돼 가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Lansam aber sicher(느리지만 확실하게)'를 어릴 적부터 가르친다고 한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일을 처리해나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이곳 사람들은 깨달은 것 같다. 이러한 불편한 점이 어쩌면 독일의 장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국 사회와 유럽 사회의 차이가 두 지역 과학자들의 차이로 나타난다.

한국 과학자들은 대부분 마음이 급하지만 독일을 비롯한 유럽 과학자들은 느긋하다는 이야기였다. 이 소장은 "한국 과학자들, 저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대부분 마음이 급하다. 실적을 보여야만 다음 과제를 수주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점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래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일하기 보다는 단기적인 실적 생산에만 마음이 가게 된다.

느긋할 틈이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대부분의 독일 공공기관은 호봉제를 채택하고 있다. 인센티브 제도가 없어 잘하든 못하든 받는 월급은 같다. 그래서 굳이 잘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대신 느긋하게 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소장은 "연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열심히 한다. 느긋하게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연구하다보면 위대한 성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라며 "대신 새로운 도전이나 발전을 추구하지 않고 생활에 안주해 사는 사람들은 많다. 그것은 단점에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단점은 피하되 장점은 습득해 배워야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 소장은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 즉 정확하고 철저한 부분은 배워야 한다. 이런 부분은 느긋하고 느린 삶 속에서 이뤄질 수 있다"며 "삶의 질을 높이는 것도 느린 삶 속에서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빨리빨리' 정신이 우리를 오늘날과 같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느리게 정확하게' 살면서 과학기술의 질 뿐 아니라 삶의 질도 높이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피력했다.

약속을 잘 지키는 부분도 배워야 할 점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독일 사회는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 상식화돼 있는 나라다. 이 소장은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교통법규와 같은 제도를 잘 지킨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는 것을 극도로 조심해 한다"며 "국민들의 이런 성향이 강력한 법 때문인지, 역사적인 배경 때문인지, 교육 때문인지는 앞으로 살면서 좀 더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 "독일 연구시스템 장점에 한국 장점 접목시켜 새로운 모델 만들겠다"
 

▲KIST 유럽연구소 동심원 지도. ⓒ2012 HelloDD.com

"한국의 많은 출연연들이 1966년에 설립된 KIST(서울)로부터 잉태돼 태어났습니다. KIST 유럽연구소가 KIST처럼 유럽 지역에 기술 및 분야별로 특성화된 또 다른 출연연들을 생산하는 모태역할을 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저의 비전입니다.

" 독일의 연구시스템에 한국의 장점을 접목시킨 출연연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겠다는 그의 야심찬 포부가 유럽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학습에 나선 이유도 이런 목적 때문이다.

이 소장은 "이를 위해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제 임기 중에 이루려는 목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이 필요로 하면서 이곳 현지에서 잘 할 수 있는 연구주제를 찾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KIST유럽연구소는 인력이나 예산규모가 작기 때문에 이런 시범적인 시도를 하기에 아주 적합하다"고 말했다.

KIST 유럽연구소는 우리나라 출연연이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한 첨병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전 세계 나라는 물론 해외 과학자들과의 교류 역시 이 소장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 중 하나다. 이 소장에 따르면 KIST 유럽연구소는 유럽연합 여러 나라와의 공동연구 및 교류를 위해 설립됐다.

유럽연합의 FP7 프로그램에서 수주한 과제인 'KESTCAP' 및 'KORRIDOR'를 통해 여러 나라들과 공동연구를 수행한 경험도 있다. 현재도 스위스 및 스페인과 친환경 기술개발과 관련된 과제를 수행하고 있고, 최근 제조나노물질 위해성과 관련된 과제 수주를 위해 8개국 10개 기관이 참여하는 계획서를 작성하고 있다.

이 소장이 생각하는 글로벌 협력을 추진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해외 과학자를 한국으로 유치해서 활용하는 것과 한국 과학자를 해외로 내보내는 방법이다. 현재 한국은 전자 쪽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다.

해외의 우수한 과학자 또는 연구소를 유치해 활용하는 여러가지 프로그램들이 한국 내에서 시행되고 있고, 기초과학연구원 역시 해외 과학자를 단장으로 초빙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해외로 한국 과학자를 내보내는 부분은 개인 차원의 지원 프로그램이 대부분인 상황이다.

그는 "선진국의 과학기술 제도와 시스템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책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피상적이다. 현지에 거주하면서 그곳 사람들과 부닥치며 살면서 배우고 느낄 때 진정한 본 모습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소장은 "이런 차원에서 더 많은 출연연구소들을 해외에 설치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KIST 유럽연구소는 지난 16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출연연들이 해외에 진출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유럽으로 옮겨 간 후부터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의미를 실감하고 있다는 이 소장. 그는 "한국이라는 좁은 땅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다보면 서로 부닥치고 싸울 일이 많다"며 "더 넓은 곳으로 나오면 심각해보이던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차원에서 한국 정부는 사람들, 특히 과학자들을 해외로 많이 내보내는 정책을 펴야한다"며 "한국 사람들이 해외에서 자리 잡고 잘 살게 되면 그것이 결국 우리나라의 국력을 키우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이 소장은 "유럽은 미국에 비해서 한국 사람들, 특히 한국 유학생들이 많이 부족하다. 더 많은 학생들이 이곳에 와서 공부하고 또 정착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면서 "KIST 유럽연구소는 지금도 이런 역할도 하고 있지만 이런 역할을 더욱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출신의 이호성 소장은 표준연 광기술표준부장, 정책연구실장, 미래융합기술부장 등을 역임하고 한국연구재단 나노융합연구단장, 미국 국립표준기술원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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