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코이카 중장기자문관으로 스카웃 최위찬 지질자원연 박사
그에게 내려진 특명 "동티모르인이 지질조사 가능하게 교육시켜라"

"늙은이가 지금까지 일자리 안 잃고 여기저기 불려다닌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아십니까. 이번 일 역시 마찬가지에요. 제 능력이 필요하다면 어디든 가야죠. 그게 지금, 오늘을 후회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니까요.

"올해로 67세. 출연연에 입사해 전문연구위원의 자리까지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최위찬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박사가 4일 한국을 떠났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어디에 있는지조차 생소한 동티모르로. 앞으로 2년간 그는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없는 동티모르에서 코이카 중장기자문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출발 이틀 전 만난 그는 동티모르 아이들에게 전해 줄 선물을 챙기느라 부산한 모습이었다. "한국에서는 별 거 아닌 이런 볼펜같은 것도 그쪽에서는 아주 신기한 물건으로 통하거든요. 아이들이 아주 좋아합니다. 연구원 차원에서도 이것 저것 챙겨주네요.

다들 좋아할 것 같아요." 그는 기술 전수를 위해 파견되는 과학자의 모습보다 봉사를 위해 떠나는 봉사대원같은 모습이었다. 최 박사는 "올해 1월에 창설·개최된 국제동티모르지질학회에서 제가 가르친 학생 8명이 논문 발표를 했는데, 이것이 국제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며 "그 성과를 인정받아 코이카에서 중장기자문관으로 동티모르에 기술전수를 하러 갈 수 있게 됐다"고 동티모르로 가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했다.

지질도는 도로건설, 산업 입지, 도시계획 등에 없어서는 안되는 국가 기반 사업의 기본 중 기본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당시 제일 먼저 한 일도 지질도 작성이었다. 동티모르는 우리나라의 강원도 크기만한 작은 나라지만 지질도가 없었다.

지질조사에 대한 이해는 물론, 기술과 지식이 전무한 탓이었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동티모르는 너무나 열악했다. 무엇보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건 여성 인권에 대한 문제였다.
 

▲동티모르국제학술대회에서 최 박사 제자가 발표한 자료의 마지막 슬라이드. 그에 대한 애정이 엿보인다. ⓒ2012 HelloDD.com

최 박사는 그의 제자가 된 8명의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레이디 퍼스트'의 개념부터 가르쳤다. 그는 "동티모르가 가톨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신학적인 부분이 추가돼 전통적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문화가 깔려 있었다"며 "여성의 존재는 땅보다 더 밑에 있다.

그래서 한 마디 따끔하게 하고 난 후 '레이디 퍼스트'의 개념을 계속해서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한국과 같은 고속 성장을 하고 싶었던 그들의 입장에서 최 박사의 말은 곧 법이었다.

최 박사는 그들에게 '국제 사회에 나가서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너희 민족은 뒤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야단쳤다. 그들의 사고는 산에 갈 때도 늘 위험한 곳은 여성이 먼저, 그 다음이 남성이었다. 그러나 최 박사와 함께 지질조사를 하려면 그 방식은 바뀌어야만 했다.

남성들이 앞서서 길을 내고 여성이 그 길을 통과했다. 그들 역시 처음에는 힘들어했지만 습관이 되자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학술대회에서 아이들을 만났더니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레이디 퍼스트'라는 개념을 동티모르에 전파해주고 있다고요. 한 번에 모든 것이 변화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도 이러한 변화가 동티모르 발전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뿌듯합니다."

◆ "미션! 자국민이 지질조사를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배가시켜라"
 

▲동티모르에서 교육을 진행 중인 최위찬 박사(가운데 파란색 옷). ⓒ2012 HelloDD.com

사실 코이카보다 동티모르 정부가 최 박사를 더 원했다. 그의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어간 셈이었다. 2년 전 연구원에서 동티모르 지질도 사업을 처음 수행했을 때 애로점이 많았다. 지질도 작성과 지질조사에 대한 기술전수를 동티모르 인들을 상대로 진행해야 했는데, 웬만큼 진행이 잘 안됐다. 기술 전수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전문가가 훈련 대상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현장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경우 지질도를 위한 지질 조사의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진다.

최 박사는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술 전수 부분을 자기가 맡겠다고 나섰다. 다른 연구원들에게는 지질 조사를 맡기고, 최 박사는 교육 부분만을 맡아 수행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최 박사의 생각에 모두 동의했고, 그때부터 동티모르와 최 박사의 진한 인연이 시작됐다. 그는 "우리나라처럼 교육팀을 따로 편성해서 처음부터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곳이 없었다고 하더라"며 "그 교육 결과가 올해 초 열린 학술대회에서 빛났고, 동티모르와 코이카 쪽에서 계속 교육을 진행해 달라고 요청이 왔다.

올해 3월에 마음의 준비를 했고, 결정난 건 6월이었다"고 설명했다. 최 박사 때문에 본의아니게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까지 생겼다. 최 박사가 갈 자리에 원래는 포르투갈의 한 교수가 있었다. 정부 석유광물자원부의 어드바이저로 있었던 그 교수는 최 박사에게 자리를 내어준 셈이됐다

. 동티모르 쪽에서는 코이카에서 지원이 어려우면 자신들이 체류 비용을 댄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최 박사의 능력을 필요로 했다. 그는 "자기 나라 국민들을 위해 잘 해준다면 이 곳에서 뼈를 묻어달라고 할 정도였다. 많이 의지를 하는 것 같다"며 "자국민이 지질 조사를 할 수 있도록 능력을 키워달라는 게 그들의 요청사항이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하고 있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 "나를 통해 우리나라를 믿게 하자"…반복 학습이 포인트
 

▲최 박사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꼼꼼히 메모하며 배우는 동티모르 학생들. ⓒ2012 HelloDD.com

동티모르가 그에게 반한 건 그만의 교육 과정때문이었다. 수많은 선진국들이 동티모르 지질 조사를 위해 방문했지만, 자국민들의 관심을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알아서 배워야 한다'는 교육 방식 때문이었다.

최 박사는 "세계 어디를 가든 똑같다. 알아서 배워야 한다는 게 암묵적인 지침으로 돼 있다. 나 역시 그렇게 배웠다"며 "그런데 나중에 생각하고 보니 이상했다. '이렇게 배웠으면 더 빨리 알았을텐데'라는 생각을 했고, 가르쳐 주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생각해낸 방법은 반복 학습이었다. 모르면 알 때 까지 반복해서 가르쳤다. 몰라도 야단치지 않았다. 인내하며 기다렸다. 페이스를 유지하다 보니 제자들의 능력이 일취월장했다. 그는 "원래 교육을 싫어한다. 대학 강의도 한 번 정도 나갔을 뿐이다.

가르치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지질조사 부분은 다른 것 같다"며 "나 역시 영국에서 기술을 배웠는데, 영국 사람들은 젠틀하다. 그런 부분이 생각나더라. 동티모르에서도 영국 사람들이 과거에 나에게 해줬던 것처럼 가르쳐주면 금세 되겠다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 곳에서는 '친절한 Grand Father'로 불린다는 최 박사. 그는 "그 나라에서는 나를 통해 우리나라를 믿을 수 밖에 없다. 자부심이라기보다 한국의 위상을 떨어뜨리지 않는 선에서,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 처럼 모르면 알 때 까지 반복해서 가르쳐주고, 기다려주고 할 참이다"라며 "우리나라도 이제 베풀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야외 지질 조사 부분이니 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알려주고 올 생각이다"고 덧붙였다.

◆ 우리나라 국민성 취약…지원 자체만 봤을 때 일본의 100분의 1
 

▲야외 지질 조사에서는 어떤 곳이든 학습장이 된다. 차를 칠판삼아 배움을 진행하는
동티모르 사람들.
ⓒ2012 HelloDD.com

그가 생각할 때 동티모르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이었다. 새마을 운동은 당시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 국민들이 하나의 마음으로 움직였던 합심, 그리고 의지, 열정의 표상이었다. 동티모르 역시 하나의 계기가 필요했다.

그 계기를 우리나라가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심어줬으면 한다는 최 박사.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의 지원을 보면 솔직히 부끄러울 정도다. 일본과 상대적으로 많은 차이를 보인다. 경제적 격차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감각적인 지원면에서 우리가 일본을 따라가지는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쉽게 말해 일본은 마케팅에 기반해 지원한다. 도시도 하나 뚝딱 세워주고, 도로 포장도 해주는 등 일본을 각인 시킬 수 있는 마케팅에 지원 활동을 덧입힌다. 일본이 돈을 100을 쓴다면 우리나라는 1도 쓰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몽고를 가도, 중국을 가도 열악한 곳은 너무 열악합니다. 일본과 중국이 안 좋다고는 하지만, 지원 부분에서는 국경을 넘나들어요. 실제로 일본이 손 뻗쳐 놓은 것을 보면 장난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 봉사자들이 나가서 봉사를 해도 정부 차원에서의 지원 퀄리티가 높으면 신명이 나죠. 우리나라가 원조를 받다가 원조를 해주는 나라로 됐지만 아직까지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 그의 어깨가 무거울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최 박사는 "돈으로 해 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며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돈으로 인식되는 그 무엇보다 더 큰 선물을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안겨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년 간 동티모르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자신의 의지를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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