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급 10만RPM 고속회전기술 기반해 생명의료장비 생산
원주-대덕 저울질끝 본사 대덕이전 "묘한 인간미에 끌렸다"

M16 소총에서 발사되는 총알의 분당회전속도는 18만rpm이다.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회전속도는 대략 1만rpm 내외. 주행중인 승용차는 2000~3000rpm 사이를 오르내린다. 그 이상이 되면 자동차 엔진은 슬슬 굉음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비전과학(대표 윤경주)이 만드는 생화학적 고속원심분리기는 최대 10만rpm이라고 하는데 총알만큼이나 빠르게 회전한다는 그 속도를 좀처럼 가늠하기가 어렵다.

윤 대표는 "그 정도면 분자와 원자가 분리되는 상태"라고 설명한다. 비전과학은 국내 몇 안 되는 고속원심분리기 제작회사 중 하나다. 기술력의 잣대인 속도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강자다. 5만rpm 이상의 원심분리기를 만들 수 있는 회사로는 국내에서 유일하다. 10만rpm급 원심분리기도 세계에서 5번째로 개발했다. 현재 주력 수출제품의 속도는 6만5000rpm이다.
 

▲제품전시실을 소개하는 윤경주 대표. 빼곡하게 걸린 특허증과 상장들이 34년 업력의 무게감을 증명하고 있다.  ⓒ2012 HelloDD.com

'원심분리기'는 원심력을 이용해 성분이나 비중이 다른 물질을 분리·정제·농축하는 기계이다. 의료·생명과학 분야에서는 필수 연구장비에 해당한다.

비전과학은 초고속원심분리기를 대표선수로 배양기·챔버·쉐이커·멸균기에 이르는 다양한 실험 및 연구기자재를 생산한다. 이외에도 건조기·항습기·항온기·교반기·무균작업대까지 이루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가짓수의 제품을 만든다.

윤 대표는 "기능과 형태별로 묶으면 20개 그룹, 각각에서 파생된 아이템으로 따지면 모두 200여 종의 장비를 만든다"고 밝혔다. 그의 목표는 비전과학을 의료기기와 바이오, 생명과학을 아우르는 종합메디컬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고속원심분리기부터 눈 만드는 제빙기까지…"회전 하면 비전과학, 비전과학 하면 회전"
 

▲비전과학의 이모저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고속원심분리기, PCB를 설계중인 연구원, 각종 제품들로 가득한 전시실, 비전과학의 효자상품이 되고 있는 하얀눈나라 제빙기. ⓒ2012 HelloDD.com

비전과학의 작년 매출액은 약 75억원. 윤 대표는 올해 매출액도 비슷하리라고 전망했다. "경기침체로 내수가 크게 줄었습니다. 34년간 회사를 운영하며 올해처럼 일이 안 밀리고 편했던 게 처음인 거 같아요(웃음). 다행히 떨어진 내수 이상으로 수출이 크게 늘어 마이너스 성장은 면할 것 같습니다. 올 한해는 대덕에 적응하고 내부를 추스르는 시기였으니 이제 새 터전에서 본격적으로 비상을 시작해야지요."

비전과학은 꼭 1년전인 작년 12월 대덕테크노밸리에 새 둥지를 틀었다. 윤 대표는 유전공학 개념의 도입기인 1977년 경기도 부천에서 창업했다.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관련 학자들에게서 "수입장비가 너무 비싸니 국내에서도 시험장비가 개발되면 좋겠다"는 얘기를 듣고부터다.

1988년 법인으로 전환한 비전과학은 두 해 뒤 부천시에 새 사옥을 마련하는 등 꾸준히 성장을 거듭했다. 윤 대표는 "원래 차분한 성격에 공수부대에서 복무하며 익힌 인내심이 기술개발에도, 사업에도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인내심 많은 엔지니어이기도 한 윤 대표는 요즘도 틈만 나면 연구실에 내려가 이것저것 두들기고 만들어보며 시간을 보낸다. "메디컬 장비가 여러가지로 재미있다"는 그의 기술자적 호기심은 회사에 큰 이익을 안겨준 '엉뚱한 효자상품'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하얀눈나라'라는 이름의 제빙기가 그것이다. 원래 실험실에서 온도변화를 막기 위해 쓰던 장비를 외식업에 접목시킨 것. 이 제빙기에서는 겨울철 자연 상태의 눈과 똑같은 눈이 만들어진다. 흔히 쓰는 빙수기계와 사뭇 다른 빙질에 이곳저곳에서 주문이 쏟아졌다. 용인 에버랜드에는 직영제품이 설치되고, 고급횟집에서도 무채 대신 눈을 깔고 있는 곳이 늘고 있다. 회가 저절로 숙성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란다. 과일빙수를 즐기는 필리핀에서는 아예 프랜차이즈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윤 대표는 연구든 생산이든 하기 어렵고 험한 일은 직원보다 본인이 먼저 나서서 해보는 편이다. 그는 "일이 너무 좋아서이기도 하고 직원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다는 고마움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비전과학에는 백발 성성한 기술자들이 눈에 많이 띈다. 모두 부천 시절부터 30년 넘게 윤 대표와 함께해온 동료들이다. 회사 설립 34년간 단 한 차례도 권고사직이 없었다는 것은 윤 대표의 큰 자부심이다.

◆"2013년은 비전과학 고유의 컬러를 찾는 해…대덕서 더 큰 도약 이루겠다"
 

▲제품생산라인.  ⓒ2012 HelloDD.com

부천서도 충분히 잘 나가던 비전과학이 굳이 연고도 없는 대덕으로 본사를 옮긴 것은 무슨 까닭일까? 연구소와 대학들이 주요 고객인 만큼 대덕과 왕래가 없던 것은 아니다. 10여 년 전에는 기계연구원-중국과학기술원과 함께 국책연구과제를 진행한 바도 있다. 하지만 애당초 의료산업 벤처들이 집적화된 원주를 물망에 두고 있던 그에게 '대덕'은 뜻밖의 인연으로 다가왔다.

윤 대표는 "공장 증설의 필요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지역 사람들이 보여준 인간미가 결심을 굳히게 했다"고 말한다. 윤 대표는 "기관 관계자도 이웃들도 무엇 하나라도 성심성의껏 도와주려는 모습에 묘한 끌림이 있었다"며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우리에게도 무언가 큰 동기부여가 되지 않겠냐"는 믿음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정밀기계 제작의 특성상 꼭 필요로 하는 금형과 도장 등의 제조업 인프라가 부천보다 떨어진다는 아쉬움도 있다. 그러나 작년과 올해 인근 지역에서 뽑은 13명의 특성화고교 졸업자들을 보면 인력들의 타고난 성실성과 바른 자세 등은 훨씬 만족스럽다는 게 그의 평가다.

윤 대표는 내년을 비전과학 고유의 컬러를 찾는 해로 삼을 생각이다. 비전과학 하면 원심분리기, 비전과학 하면 가장 먼저 '회전'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또 "올해는 이사를 잘 마무리하고 재도약을 준비하는 해로 삼았으니 내년에는 이웃한 기업인들과도 더 활발히 교류 폭도 넓히고 대덕을 발판으로 더 큰 꿈을 성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게 그의 2013년 신년 계획이다.
 

▲비전과학에서는 유독 백발 성성한 노장과 젊은 기술자가 부자 같은 모습으로 일하는 조합이 눈에 띈다.  ⓒ2012 HelloDD.com

▲원심분리기 등의 핵심부품인 로타를 가공하는 제작실. 고속회전 기계를 만드는 만큼 고성능 모터부터 마찰열을 줄이는 냉동과 진공 기술까지 정밀한 기술력을 요하는 작업이 많다. ⓒ2012 HelloDD.com

▲비전과학 직원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옥상정원. 추운 날씨에도 겨울배추가 푸릇푸릇하다. 이곳에서 윤 대표와 직원들은 함께 벌레도 잡고 잡초도 뽑으며 많은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2012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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