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별적 정년연장안은 현재로선 최선의 대안
우수한 사람 인정 통해 연구 분위기 진작시켜야

연말이다. 한 해 동안 어수선했던 것을 정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며 차분해지는 시점이다.
그럼에도 연구 현장 곳곳은 플래카드가 어지러이 내걸려져 차분과는 거리가 있는 분위기다.

과학계, 특히 출연연으로 대표되는 대덕연구개발특구는 사실 숙제를 많이 안고 있다. 국민들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아왔다. 연구 장비 등이 부족해 연구에 어려움을 겪던 시절도 있었고, 정권초마다 구조조정 이야기에 시달리 연구 분위기가 불안했던 때도 있었다. 아직도 PBS나 관치 과학 등등 개선해야할 과제가 산적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크게 보아 군사정부 시절도 그렇지만 특히 민주화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를 거치며 지난 20년 내내 평균 10%이상 예산이 늘어왔다. 특히 김영삼 문민정부에서는 20% 대, IMF 외환위기를 맞이한 김대중 국민정부에서도 15%대 예산이 늘었고, 노무현 참여정부에서는 특구 지정, 이명박 정부에서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등등의 혜택을 받아왔다. 다른 부문의 예산은 줄이면서 절약한 돈으로 과학기술에는 투자해 온 것이다.

그 투자에 비해 성과는 어떠한가?
안정적 연구를 저해하는 여러 요인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커다란 성과를 기반으로 연구환경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지난 20년간 국민들을 행복하게한 과학적 성취가 크게 잡히지않는다는 것이다. 원전 수출과 위성 성공, KSTAR 핵융합로 준공 등의 성과가 있기는 하지만 세계적 과학기술 혁신에는 못미쳤다.

과학자들은 민간 부문과의 비교를 싫어한다. 민간은 수익을 내야하고 목표가 명확하니 성과가 나오고, 출연연은 인프라에 해당되는 연구를 하니 다른 잣대가 적용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맞다. 하지만 출연연 연구원들은 출연연에서 쓰이는 예산이, 80%가 망한다는 자영업자를 비롯해 치열하게 세계 경제 전쟁 현장에서 살아남아 돈을 벌어온 기업들의 세금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무겁게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면 지나친 주장일까?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연구 현장의 현실 가운데 하나가 예의 플래카드이다. '선별적 정년 연장 도입 중단', '정년 환원 쟁춰'. '정년차별 철폐' 등등의 구호가 적힌. 각 출연연 노조들과 이들의 모임인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은 이를 위해 플래카드를 내걸은 것은 물론 집행부의 심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연구현장에 이런 플래카드가 나붙게 된 배경은 정부가 일부 연구원들의 정년 연장을 허용하는 정책을 내면서부터이다. 그동안 연구원발전협의회 등 과학계는 정년 연장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IMF 외환위기시 고통분담 차원에서 정년을 65세에서 61세로 낮추었는데, 교직원들은 환원이 된 반면 연구원들은 안됐으니 이를 다시 연장해달라고 그동안 계속 요구해왔다. 그런 가운데 예산 등의 문제로 어려운 것을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일부 수용한 것이, 전체는 다 어려우니 일부 연구원들에 한해 정년 연장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를 놓고 KIST 등 일부 연구원은 수용했고, 대덕에 있는 출연연은 노조와의 동의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발목이 잡혀 있는 상태이다. 일부에서는 물리적 충돌 일보 직전까지도 간 것으로 전해졌다.

10년전 대덕단지의 모델이었던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아카뎀 고로독(학문도시)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러시아 핵물리학 연구소 소장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5세. 그가 소장이 된 것은 40대초. 20여년을 넘게 소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는 연구소의 기관장이 종신적이어서 그토록 오랜동안 근무할 수 있었다. 노소장을 보면서 생각한 것이 이들은 '천재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연구원장의 임기가 종신직이라면 선임할 때 많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3,4년 임기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20,30년을 기관장으로 있으면서 성과를 낼 사람을 뽑아야 하고, 그러려면 그 사람은 특출난 사람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우리 현실을 되돌아 보았다. 연구원, 선임연구원, 책임연구원, 보직자, 원장으로 이뤄진 위계구조 속에서 조직원은 있지만 천재는 인정되기 어려운 시스템이 아닌가 여겨졌다. 업적이 뛰어난 사람은 뛰어나다고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차별로 받아들일 때 그 사회는 동맥경화에 빠진다. 우수한 사람이 재능을 발휘할 동기가 없어지고, 잠재력을 지닌 사람이 도전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현재 연구현장에 나부끼는 플래카드는 차별을 금지하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차별이 아니라 차이이다. 20여년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사람은 인정해서 그 사람한테 더 혜택을 주어 성과를 내자는 것이다. 차별은 인종 피부 출신 등의 선천적인 요소에 따른 대우를 말하는 것이고 차이는 그 사람의 능력이나 업적 등 후천적 요소에 따른 대우를 말하는데, 연구 업적에 따른 다른 대우, 즉 차이는 인정해주는 것이 전체의 효율성 증진에 필요하지 않을까?

정년 대상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에 대해 말을 못하고 있다. 연말이면 시한을 넘기며 책상을 정리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좀 더 일할 수 있음에도 떠나야 하는 것은 개인의 입장에서도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더 나아가 우수한 사람이 20, 30년에 걸친 노하우를 한꺼번에 없애는 격으로 조직에도 손해가 아닐까? 그럼에도 정권이 바뀌고, 연말인 이 시점에 목소리가 높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면 그런 안타까운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이 높은게 현실이다.

이 제도의 대상이 되는 연구원들 가운데도 반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유는 누구는 우수하고, 누구는 평범하냐는 자존심의 문제이기 때문이란 이야기가 들린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비록 지금의 나한테는 그런 자존심이 건드려질지라도 우수한 사람은 옆에 있도록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아 이익이 아닐까? 우수한 사람들이 평가받을 때 나도 그 혜택을 받을 가능성이 있고, 더 크게는 우수한 후배들이 조직을 떠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해 여건이 더 좋아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다같이 떠나는 식으로 하면 당장의 자존심은 세워질수 있으나 이를 지켜보는 우수 인력은 속으로 짐쌀 준비를 하고 있지는 않을까?

기술원이나 행정원들에게도 이 제도를 시행 내지는 전면적 정년 연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장수시대인만큼 충분히 주장할 수 있는 의견이라고도 본다. 이는 시간을 갖고 논의를 해야할 내용이라고 본다.

현재 정년이 보장되는 조직이 얼마나 될까? 신분보장된다는 공무원들도 정년까지 근무하는 경우는 드물다. 중간에 자리가 알선되기는 하지만 정년을 못채우고 나가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공기업이나 출연연 정도가 정년이 보장되는 조직이 아닐까?

일부에서는 현재 정년 연장을 둘러싼 논의를 배부른 소리라고 지적한다. 주인인 국민은 찬밥 먹고 있는데,그 주인의 돈으로 연구하는 출연연은 따뜻한 밥이 부족하다는 투정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이야기한다.

내년은 대덕단지 출범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73년 국민1인당 소득 3백달러인 때, 즉 하루 1달러 소득인 때 미래를 보고 세운 것이 연구단지이다. 과학자들도 열심히 연구해 2만 달러 국가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최근 20년 동안은 큰 성과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고들 이야기한다.

새해 과학기술계에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지금은 그 변화에 대응하고, 국가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을 고민하는 시점이 아닐까 한다. 그런 점에서 일단 정부의 대책에 따르면서 개선책을 논의하는 것이 파이를 키우는 길이 아닌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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