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박용기 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박사

산이 높아 정상에 서면 은하수라도 잡을 수 있다는 뜻을 가진 한라산(漢拏山). 제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다. 오래 전, 성판악에서 얼마간 산행을 해 본 적은 있지만 겨울 한라산을 오르긴 처음이었다. 물론 백록담이 있는 정상에 도전한 건 아니지만 해발 1700m의 윗세오름에 오른 것은 나로선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위에 있는 세 개의 오름이라는 뜻을 가진 윗세오름은 붉은오름, 누운오름, 그리고 족은오름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라고 하는데, 나로선 그냥 눈꽃으로 빚어놓은 하나의 높고 아름다운 산이었다. 전날 아래쪽에는 비가 내리고 산행을 하는 날에는 날씨가 추워져 눈꽃을 감상하기엔 최적의 날씨였다. 정말로 어리목 주차장에서부터 펼쳐진 눈꽃의 향연은 윗세오름 정상을 넘어 영실로 내려오는 내내 나에게 겨울 한라산의 신비로움을 만끽하게 하였다.
 

▲눈꽃의 향연은 겨울 한라산의 신비로움을 만끽하기에 충분했다. ⓒ2013 HelloDD.com

바람은 강하고 때로는 발이 깊숙이 쌓인 눈에 빠지기도 하여 숨이 차올랐지만, 펼쳐진 눈꽃의 비경이 너무도 아름다워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손은 추운 줄을 몰랐다. 백록담이 있는 정상의 남쪽 화구벽이 가까이 보이는 대피소에 들러 이제까지 먹어보았던 라면 중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 따끈한 사발면 한 그릇을 먹고 나니 그제야 내가 점심도 거르고 산행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윗세오름 정상을 넘어 영실로 향하는 내리막 길 초엽에 펼쳐진 병풍바위와 줄 지어 서있는 오백 나한, 그리고 그러한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눈꽃의 환상적인 풍경은 나의 발길을 오래도록 그 곳에 머물게 하였다.
 

▲펼쳐진 비경이 너무도 아름다워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손은 추운 줄 몰랐다. ⓒ2013 HelloDD.com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눈꽃의 환상적인 풍경은 나의 발길을 오래도록 그 곳에 머물게 하였다. ⓒ2013 HelloDD.com
 

▲나무에 아름답게 피어난 눈꽃은 사실 눈이 아니고 서리이다. ⓒ2013 HelloDD.com

나무에 아름답게 피어난 눈꽃은 사실 눈이 아니고 서리이다. 나무나 풀에 이처럼 피어난 서리를 상고대라고 한다. 상고대는 낮은 구름이나 안개 속의 물방울들이 나무에 얼어붙어 만들어진다. 바람이 비교적 강하게 불면서 온도가 섭씨 영하 2도에서 영하 8도 사이에 잘 만들어 진다고 하는데 보통 바람의 방향으로 눈꽃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안개나 구름 속에 섭씨 0도 이하에서도 액체상태로 과냉각되어 있던 미세한 물방울들이 나뭇가지에 달라붙으면서 순간적으로 얼어 만들어 진다고 한다. 일정한 조건이 맞아야만 이렇게 아름다운 상고대를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무엇 하나 쉽게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그러니 변화무쌍한 한라산의 날씨를 생각한다면 만일 다른 겨울에 다시 이곳에 온다 해도 이와 꼭 같은 풍광을 또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삶이 또한 그러하리라. 조물주의 섭리에 따라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 새롭고, 하지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을 보내며 살고 있다.

시인 오석만은 겨울 한라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면서 그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소망하였다. 나도 겨울 한라산의 윗세오름에 오르면서 시인이 만난 바로 그 한라산을 만나 그 순간은 자연의 일부가 되었던 것 같다.

겨울 한라산(오석만) 바람이 시작되는 곳을 아는가? 구름이 넘나들며 백록이 목을 축이던 한라에 서서 멀리 출렁이는 바다가 바람을 해맑은 하늘에 마구 뿌려 대는 비취빛 사랑은 누구의 숨결인가? 하늘과 땅 사이에 온통 피어있는 하얀 눈꽃들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그대와 손을 꼭 잡고 순백의 눈꽃 세상에 푸우욱 빠져 차가운 바람도, 힘에 겨운 무게도 하얀 사랑으로 이겨내는 푸른 나무들처럼 다시 태어나 겨울 한라산에 매달려 있는 고드름이 되어도 좋고 따스한 햇살에 녹아 떨어지는 한 방울 물방울이어도 좋다 그대 눈 속에서 출렁이는 파도로 하얗게 피어오르는 하얀 나비라도 좋고 끝도 없이 부딪치는 파도에서 시작되어 겨울 한라산 백록을 넘나드는 구름이라도 좋다.
 

▲자연의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무엇 하나 쉽게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2013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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