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科技중심 국정운영' 옳은 원칙·방향 잡고도 출발부터 삐걱
지엽적인 문제라고 그대로 넘어가면 미래과학부 '미래' 없어

어떤 일이든 원칙과 명분이 중요하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디테일이다. 아무리 옳은 원칙과 명분을 세워도 세부사항에서 어긋나면 그 원칙과 명분은 금이 갈 수밖에 없다. 역대 정권에서 범한 그런 실기(失機)를 우리는 숱하게 목격했다. 국정운영의 올바른 방향을 잡고도 사람을 잘못 써서, 혹은 세부 정책을 잘못 펼쳐서 반발에 부딪히고 원칙까지 손상된 사례가 적지 않다. 디테일의 위력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미래창조과학부와 원자력 진흥 정책, 구체적으로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소관 부처 문제를 놓고 빚어지고 있는 논란을 허투루 넘겨서는 안된다. 과학기술 중심의 국정운영, 미래창조과학부를 통한 창조경제 실현이라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방향과 원칙이 한 개 정부출연연구기관의 부처 이관을 놓고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만약 이 문제를 사소하게 치부한다면 출발부터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박근혜 당선인의 과학기술 중심 국정운영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고 있다. 꼭 과학기술계나 이공계 분야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국정운영의 철학에 이의를 제기할 국민은 많지 않다. 원칙적으로 옳은 방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정철학은 미래창조과학부 신설로 가시화됐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밝혔듯 미래창조과학부를 통해 국가 성장동력의 양대 핵심축인 과학기술과 ICT를 창조경제의 원천으로 삼겠다는 원칙과 방향도 대체로 옳다. 일자리를 창출하고, 미래 먹거리를 적극 발굴하는 전담 부처로서의 미래창조과학부에 그래서 많은 이들이 희망과 기대를 표출하고 있다.

디테일에서도 과학기술계의 목소리가 거의 모두 반영됐다. 무엇보다 그동안 교육과학기술부와 지식경제부 산하로 분산되어 있던 정부출연연을 모두 미래창조과학부 산하로 이관한 것은 현장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반영했다는 점에서 박수를 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기존 교과부의 원자력 진흥 업무를 산업통상자원부(전 지경부)로 이관하고, 그 중심기관인 원자력연구원까지 산업통상자원부로 보내기로 한 방침은 이해하기 어렵다.

원자력 관련 연구개발을 산업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겠다는 뜻이라면 그동안 우리나라가 숱한 난관을 극복하고 기술적 자립을 이뤄낸 원자력 연구개발 역사를 전혀 모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원자력안전위원회의 미래창조과학부 이관으로 선수-심판의 분리 필요성에 따른 것이라면 너무 무원칙적이고 임기응변적인 처사에 불과하다. 국가 성장동력의 핵심축인 과학기술을 통해 창조경제의 원천으로 삼겠다는 당선인과 인수위원회의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원자력연구원의 연구용원자로 '하나로'에서 실험을 수행하고 있는 모습. 대다수 과학기술인들이 원자
력 연구는 거대 융합 과학기술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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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원자력 R&D는 그동안 안팎으로부터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왔다. 원자력 기술자립을 원하지 않는 원자력 강국으로부터 견제를 받아야 했다. 내부적으로는 부처이기주의에 따른 곱지 않은 시선도 받았다. 1980년대 한국표준형원전 개발이 시작되자 산업계와 일부 부처에서는 "어느 세월에 우리 기술로 원전을 만드느냐"고 발목을 잡았다. 중소형원전 개발에 착수하자 "시장성이 없다"며 딴지를 걸었다.

이러한 숱한 난관을 극복하고 우리나라가 당당히 원자력 기술자립을 이룬 것은 원자력연구원이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흔들림없이 과학기술 전담 부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약 원자력 연구개발의 도전을 산업적, 경제적 측면에서 접근했다면 한국표준형원전이나 세계 최초의 인허가 획득이라는 쾌거를 올린 중소형 원전 'SMART'는 탄생하지 못했다. UAE에 원전을 수출하며 원자력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위상이 바뀌지도 못했을 것이다. 거대 과학기술이라는 기본적인 토대 위에 과학기술 전담 부처가 이를 튼튼하게 뒷받침해주고, 무엇보다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이 힘을 실어줬기 때문에 모두 가능한 일이었다.

원자력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연구개발 분야에서도 원자력연구원의 산업통상자원부 이관에 반대하고 있다. 종합 과학기술인 원자력은 다양한 분야의 연구개발사업과 연구기관을 총괄하는 미래창조과학부에서 담당하는 것이 시너지 창출에 효과적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당면한 상용원전 관련 R&D에 치중할 수 밖에 없어 장기적으로는 원자력 기술의 경쟁력 퇴보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금 돌아가는 모양새는 이미 결정된 사항이기 때문에, 시간이 없기 때문에, 혹은 너무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릴 수 없다는 이유로 이같은 방침을 그대로 고수하겠다는 분위기다. 그렇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도 재검토가 필요하다면 조정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면 더 서둘러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반영해야 한다.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릴 수 없다면 미래창조과학부를 왜 신설하는지 큰 틀에서 다시 점검해야 한다.

과학기술 현장은 물론 국민들로부터 환영받고 있는 과기중심의 국정운영, 그리고 미래창조과학부를 통한 미래먹거리 발굴이라는 원칙과 방향이 지금 의심받고 있다. 무엇보다 현장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고서는 이같은 원칙이 성공할 수 없다. 원자력 진흥 업무의 산업통상자원부 이관, 그리고 원자력연구원의 이관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 지엽적인 사안이라고 이 문제를 그대로 밀어붙인다면 시작부터 삐걱거릴 수 밖에 없다.

단추가 잘못 끼워진 옷을 입고 화려한 파티장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잘못 끼운 단추는 풀러서 다시 첫 단추부터 잘 끼우는 방법 외에는 없다. 디테일을 외면하고 방치해서 전체적인 원칙과 명분까지 훼손시키는 우(愚)를 범하는 일만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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