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리젠토. 시칠리아에는 겨울이 없다. 한겨울인데 우리나라 가을과 같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구름과 신전이 조화를 이루어 아끼는 사진.
아그리젠토. 시칠리아에는 겨울이 없다. 한겨울인데 우리나라 가을과 같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구름과 신전이 조화를 이루어 아끼는 사진.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은 포에니 전쟁을 묘사한 부분일 것이다. 포에니 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가 118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맞붙은 역사적인 전쟁이다.

전쟁사에서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꼽히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로마의 스키피오가 등장한 2차 포에니 전쟁이 하이라이트이며, 3차 포에니 전쟁 결과로 카르타고는 불에 타고 소금이 뿌려진 채 버려진 땅이 되었다.

그 역사적인 포에니 전쟁의 발발 원인은 두 제국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지중해의 섬, 시칠리아였다. 당시 카르타고가 일부 점령하고 있던 시칠리아는 곡창 지대였던 데다가 이탈리아 본토가 육안으로 보이는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시칠리아의 점유권을 두고 사달이 났던 것이다.

시칠리아는 카르타고와 로마가 국가의 명운을 걸고 싸울 만큼 매력적인 땅이었다.

시칠리아 여행에서 첫번째 볼거리는 에트나 화산이다. 섬 가운데 높이 솟은 에트나 산은 현재도 활동을 멈추지 않은 활화산이다.

눈이 덮인 산머리에 용암이 흘러내린 자국이 선명하며, 화산 꼭대기에서 피어나는 연기가 구름과 섞이는 장면은 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시칠리아 특유의 풍경이다.

시칠리아는 지중해의 화산섬답게 자연경관이 좋기도 하거니와 봄, 여름, 가을의 삼계절 기후를 가지고 있어서 특히 겨울 피한지로 유럽의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여행객들이 시칠리아를 찾는 이유는 또 있다. 고대 그리스 유적이다. 시칠리아에는 그리스 다음으로 많은 유적이 남아 있고 보존 상태는 오히려 그리스의 유적들보다 낫다고 하니, 서양 문명의 뿌리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이 곳은 두말할 나위 없이 좋은 답사지이다.

시칠리아에서 가장 볼 만한 그리스 유적지는 아그리젠토와 타오르미나다.

아그리젠토 콘코르디아 신전.
아그리젠토 콘코르디아 신전.

아그리젠토는 '신전의 계곡 (Valle dei Templi)'으로 유명한 곳이다. '신전의 계곡'은 그리스 신전들이 띄엄띄엄 서 있는 일종의 자연 성벽인데, 주변은 올리브와 아몬드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서 산책길을 걷는 동안 도시의 유적지와는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신전의 계곡'의 하이라이트는 콘코르디아 신전이다. 보존 상태가 매우 훌륭하여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함께 거대한 그리스 신전의 위용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콩코르디아 신전과 멀리 마주 보며 쌍벽을 이루는 헤라 신전은 기둥 몇 개가 파괴된 채로 남아 있는데, 포에니 전쟁 때 훼손된 것을 전쟁 후 로마가 복구한 것이라고 한다.

헤라의 신전.
헤라의 신전.

'시칠리아의 진주'라 불리는 타오르미나는 이탈리아 본토를 마주 보는 관문 메시나에서 멀지 않다. 괴테가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남긴 기록이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라는 책으로 남아 있는데, 아그리젠토를 지나쳤던 괴테도 타오르미나에는 들렀다.

타오르미나의 대표적인 유적지는 고대 그리스 극장이다. 괴테가 객석에 앉아 '세상에 어떤 관객이 이처럼 멋진 광경을 눈앞에 둘 수 있겠는가' 하며 찬탄하였다는데, 나 역시도 이렇게 아름다운 배경을 가진 무대가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극장이다.

이 극장은 음향 전달 효과가 뛰어나서 지금도 여러 공연이 이 극장의 무대에 오른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유적이 아닌가 싶다.

'여행을 왜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날씨와 편의 시설을 찾는 휴양, 유명한 구경 거리를 보러 가는 관광, 역사의 숨결을 느끼려는 문화유적 답사, 타국의 문화와 사람들의 생활 양식을 경험하기 위한 일상 여행. 각자 상황에 따라 적절한 의미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시칠리아는 휴양, 관광, 문화유적 답사 모두 합격점을 줄 만한 곳이다.

몇 년 전 서울대학교 컴퓨터그래픽스 연구실에 들렀을 때 한 대학원생의 모니터 바탕화면에서 '신전의 계곡'을 발견하고 반갑게 알은체 한 적이 있다. 아그리젠토에 언제 다녀왔는지 물었더니,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이라고 했다.

지금쯤 그 학생의 버킷리스트에서 한 줄 지워져 있기를 바라면서, '신전의 계곡'에 부는 바람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이야기 나누는 친구로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린다.

타오르미나 그리스 극장.
타오르미나 그리스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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