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에 있었던 작은 사건은 지금도 가끔 우리 부부의 이야깃거리가 되며 웃게 만든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집사람과 동네 산책을 나갔다. 산책길에 있는 키 큰 가로수 아래에서 사람들이 밤알을 줍고 있었다. 지난밤에 불었던 세찬 바람 때문에 밤들이 길거리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집사람과 나도 보도와 아스팔트에 떨어진 밤을 호주머니에 가득 담고는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밤을 삶아먹기로 했다. 푹 삶은 밤알 하나를 입에 넣고 깨무는 순간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로 씻어내도 입 안 가득 남아 있는 역한 맛은 커피를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가라앉힐 수 있었다.

밤송이에 들어 있는 모양을 보면 영락없는 밤인데 진짜 밤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너도밤나무'였다. 나무에 이름을 붙인 한국 사람도 아마 나처럼 실수를 했던 모양이다. "너도 밤나무냐?"라는 불평을 할 만큼 밤 같아 보였다. 독일 사람들은 이것을 주로 가축 사료로 쓴단다.

이 너도밤나무는 독일에서 가장 흔한 나무 중에 하나이다. 높이가 40 미터에 이를 만큼 자라고 목재는 가구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독일의 유명한 숲인 슈바르츠발트 (우리말로 '흑림')에도 이 수종이 많다고 한다.

KIST유럽연구소 주변에도 숲이 있다.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 차를 몰고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나는 행복감을 느낀다. 어떤 날은 마치 동화의 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뿌연 비안개가 나무 숲 언저리에서 맴도는 것을 볼 수 있다. 눈 오는 날이면 눈꽃으로 치장한 나무들이 전혀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여준다. 햇빛이 나는 날에는 나무숲 사이로 햇살이 비쳐온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독일의 숲.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독일의 숲.
숲은 비행기를 타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더 확실하게 보인다. 숲속으로 난 고속도로, 숲속에 만들어진 도시가 확연하게 나타난다. 1964년에 독일을 방문하셨던 박정희 대통령은 비행기에서 이런 풍경을 본 후 한국 땅에 그린벨트를 지정하고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게 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독일의 숲과 고속도로는 우리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숲속 산책길은 낮에도 혼자 다니기에 오싹한 느낌이 들만큼 음산하다. 키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서 햇빛이 아래쪽까지 잘 내려오지 않는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숲이 시커멓게 보이는 것이다. '흑림'이라는 이름도 그 때문에 붙은 것 같다.

나무가 많으니 새들도 많다. 아침에 새소리에 잠이 깰 만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런 새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독일에서는 벌목작업을 겨울에만 한다. 새들이 산란하고 새끼를 키우는 시기를 피해서 벌목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겨울 동안에 KIST유럽연구소 맞은편에 있던 숲의 일부분이 사라져 버렸다. 헬름홀츠 연구소 건물을 지을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우리로서는 가까이에 좋은 연구 파트너를 둘 수 있게 되어 반갑다. 그렇지만 나무를 베어낸 자리가 횅하게 비어있는 것을 보노라면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나무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나는 과학기술분야 연구 시스템을 설명할 때 곳잘 나무에 비유한다. 나무는 뿌리와 줄기,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나무의 열매는 어디에 열리는가? 모두 다 잘 아는 사실이지만 열매는 뿌리도 아니고 줄기도 아닌 가지 끝에 열린다. 가지가 가늘다고 그것을 잘라버리면 열매를 얻을 수 없다. 연구현장에서 연구를 직접 수행하는 연구자들의 연구주제는 나무에 비유하면 가지에 해당된다.

정부 차원의 과학기술계획은 나무의 뿌리에 해당한다. 튼튼한 뿌리가 있어야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나무의 줄기는 과학기술분야 정책과 기획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나무에서 눈에 가장 잘 띄는 부분이다. 정책을 잘 수립하고 사업을 잘 기획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연구자들의 연구주제는 그런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아주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들이다. 그러다보니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정책입안자들 입장에서는 무시하기 쉽다. 그렇지만 줄기에서 가지로 갈라지는 부분에서 연구자들의 의견을 반영해야만 연구의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줄기는 가지를 위해 존재하고 가지는 열매를 맺기 위해 존재한다. 연구를 수행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성과 창출을 위한 것이다. 과학기술분야 정책과 기획은 연구자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져야 한다. 그럴 듯 해 보이기만 하는 정책, 기획을 위한 기획은 연구자들의 연구를 방해할 뿐이다.

KIST 유럽연구소 내에 있는 나무, 키가 크다.
KIST 유럽연구소 내에 있는 나무, 키가 크다.
독일의 나무들은 대부분 한국에 있는 나무들보다 키가 크다. 비슷한 수종인데도 키가 더 크다. KIST유럽연구소 마당에 있는 소나무만 하더라도 그렇다. 자연환경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비가 여름철에 집중적으로 내리지만 독일에서는 일 년 내내 골고루 온다. 그래서 숲은 항상 습기를 적당히 머금고 있는데, 이것이 나무의 성장을 돕고 산불을 예방하는 것 같다.

그런데 독일에 유난히 키가 작은 나무들이 있다. 모젤 강 주변의 경사진 언덕에 포도나무가 촘촘히 심어져 있다. 이곳에서 자라는 포도나무는 대부분 '리즐링'이라는 품종으로 백포도주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그런데 그 포도나무들은 한결같이 어린 아이 키 정도로 작다. 아마도 수확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나무를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한 것 같다.

좋은 포도를 얻기 위해서 꼭 키 큰 포도나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은 키의 포도나무가 열매를 수확하기에 더 좋은 것이다. 연구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큰 규모의 연구소에서 꼭 좋은 연구결과가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포도나무가 심겨진 환경일 것이다. 햇볕이 잘 드는 곳, 배수가 잘 되는 곳, 추위와 더위를 중화시키는 강물이 있는 곳이 포도나무가 자라기 좋은 환경이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연구 성과를 잘 낼 수 있는 환경조건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요소를 찾아서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연구 성과를 효과적으로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달에 한국 출장을 다녀왔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고국의 땅에는 독일의 숲 대신에 산이 있었다. 산속으로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산골짝마다 마을이 보였다. 한국의 산에는 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자원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나라 산을 보면서 깨닫는다. 독일이 숲을 자랑하듯 산은 우리나라의 자랑거리이다. 독일에서 살더라도 이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장.
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장.
대한민국 4.0시대를 여는 시기로 성숙된 의식과 시스템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이에 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장은 독일의 과학기술과 그 발전의 바탕이 되는 사회·문화적인 환경에 대해 생생하게 전달해 줄 것입니다.

이 소장은 독일에서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편지나 일기 형식으로 쓸 예정입니다. 이호성 소장은 KAIST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바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근무를 시작, 17년 동안 시간·주파수 표준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광펌핑 세슘원자시계를 개발해 국제적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2003년 이후에는 표준연의 주요보직을 맡아서 후배들의 연구를 지원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연구재단에서 나노·융합단장으로 2년간 근무한 바 있습니다. 2012년 9월 KIST유럽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해 한국과 유럽연합을 잇는 가교역할을 위한 국제협력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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