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연 김순욱 박사·김정숙 연구원 '블랙홀 관측' 뒷이야기
4년의 기다림 속 마침내 현상 포착…21세기 기초과학 중요한 자료

블랙홀 제트의 발생 이론을 관측으로 증명한 김순욱 박사(좌)와 김정숙 연구원(우).
블랙홀 제트의 발생 이론을 관측으로 증명한 김순욱 박사(좌)와 김정숙 연구원(우).
'찰나'는 불과 3시간 만에 사라졌다. 그 찰나는 길다면 길고, 짧으면 짧을수도 있었던 4년 기다림의 대가였다. 1∼2년 사이 불과 며칠 정도의 시간에만 짧게 나타나는 블랙홀의 제트 분출 포착은 그래서 더 값졌다. 더군다나 국내 열악한 천문 연구 환경을 딛고 성공한 최초의 사례였기에 더욱 더 관심이 집중됐다.

수상한 움직임이 생겨도 모르는 곳이 우주다.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를 전부 감시하는 건 불가능하기에, 우주에서 일어나는 찰나는 중요한 기초과학의 자료가 된다. '블랙홀 제트' 현상 역시 마찬가지다. 제트는 블랙홀이 방출하는 에너지 입자로, 블랙홀 중심의 위 아래로 길게 세워진 기둥에서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현상을 말한다.

제트는 블랙홀이 별을 끌어당길 때 나온 물질이 쌓이고, 또 주변 환경이 맞아 떨어졌을 때 발생한다. 시작 시점 포착은 물론, 언제까지 발생하는지에 대한 것도 예측이 불가능했다. 그 불가능한 예측을 국내 연구진이 해냈다.

주인공인 한국천문연구원 김순욱 박사와 김정숙 연구원을 만났다. 지난 21일 자료를 통해 그들의 연구 성과가 공개 된 이후, 어마어마한 관심을 받았다는 그들. 그래도 여전히 인터뷰는 쑥스러운 듯 보였다. 끈질긴 기다림으로 짧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 과학적 이론을 증명해 낸 두 명의 과학자들은 마침 더 큰 스케일의 연구를 시작하기 위해 준비에 골몰하던 중이었다.

큰 스케일 연구의 발단은 올해 4월 발표한 '별 탄생 과정의 이론을 뒤집었다'는 내용의 연구였다. 국제공동연구진에 속해 함께 연구를 진행해 왔던 김정숙 연구원은 은하계 내 W75N 지역의 원시별을 전파망원경 네트워크를 통해 관측한 결과 원시별이 항성으로 진화하는 과정이 이전에 알려진 것과 반대임을 밝혀냈다.

기존 이론은 원시별이 분출물을 양쪽 극방향으로 분출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방향성 없이 모든 방향으로 분출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구진의 실측에서는 1999년에 먼저 방향성 없이 분출물을 뿜어내던 원시별이 2007년에 이르러 양쪽 극방향으로 분출물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원시별은 안정적인 항성으로 진화하기 직전 단계로, 기체를 내뿜으면서 크기는 줄어들고 밀도가 단단해지는 상태의 천체를 말한다.

연구진이 별의 탄생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은하계 내 W75N 지역에 주목한 것은 태양계로부터 4000광년 정도 떨어져 가까운 곳인 데다 수많은 별들이 탄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순욱 박사는 "1000여 년의 기간 동안 일어나는 변화를 10년 동안 관측으로 알아낸 것은 운이 좋았던 것도 있다"며 "외국 연구자가 분출물을 내뿜는 별들을 비교한 결과를 보고 별의 나이를 추론한 결과 이상한 점을 느껴 연구를 진전시켰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원시별은 태어난 지 수천년 정도 된 별로 막 핵융합을 시작해 수소를 태우고, 기체를 내뿜으면서 별이 되기 위해 애쓰는 단계였다"고 덧붙였다. 이번 성과를 통해 최근 독일과 캐나다 천문학자들이 시뮬레이션을 통해 원시별이 분출물을 내뿜는 과정이 기존 이론과는 반대라고 했던 것이 증명된 셈이다.

이같은 그들의 활약에 세계 별 연구 대가들이 러브콜을 해왔다. 이론을 증명했으니 이제는 관측만 남은 셈이었다. 투자를 받고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선 참여하는 연구진의 수준이 관건이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조력자를 제대로 만난 셈이됐다.

별 탄생 분야에 더 애착을 갖고 있다는 그들. 김순욱 박사는 "9명이 같이 연구를 하는데 그 중 5명이 네이처에 논문을 게재했던 과학자들이다"며 "우리의 데이터를 통해 대가들을 모이게 했다는 점에서 뿌듯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들과 함께 더 큰 스케일에서의 연구를 진행하고, 또 성과를 창출해 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 "처음에는 물귀신 작전, 그 다음은 하고 싶어서"

두 개의 책상으로 꽉 차는 연구실.
두 개의 책상으로 꽉 차는 연구실.
겨우 두 개의 책상과 의자, 책장, 칠판이 자리할 수 있는 좁은 공간. 이 곳이 바로 국내 유일 블랙홀 관측을 전문 분야로 하는 박사들이 연구를 하는 곳이다. 그래도 그들에겐 이 곳만큼 연구하기 좋은 곳도 없다. 손만 뻗으면 옆 책상이 닿는 이 곳에서 그들의 연구는 쑥쑥 성장해나갔다. 자기 일에 몰두해 있다가도 서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은 아무 거리낌없이 말하면 그만이었다.

김정숙 연구원은 "박사님과 손 발이 제법 잘 맞는 편이다. 여러가지 일들이 중구난방 벌어질 때도 같이 이야기하며 해결해 나갈 수 있다"며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점은 여름철이라 그런지 1층이 시원하다"고 말하며 웃었다.

국내에서도 전문가가 희귀한 블랙홀 관측 분야. 소위 잘나가는 연구 분야도 많은데, 굳이 이 분야에 뛰어든 이유가 뭘까 궁금했다. 이 질문에 김순욱 박사는 "물귀신 작전에 당했다"고 설명했다.

김순욱 박사는 과학의 대중화에 많은 공헌을 한 이론핵물리학자 고 김정흠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의 아들이다. 그는 당연하듯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물리학과에서 소립자 물리학과를 석사 이수하고, 이어 천문학과에서 고에너지 천체물리학(박사)을 전공했다.

원래 그는 이론을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증명하는 연구를 주로 해왔다. 컴퓨터로 현상을 재현하는 게 그의 일이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을 돌아보니 관측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는 "일본의 저명한 과학자가 관측을 해보라고 계속 부추겼다"며 "국내에서 그 분야로 관측을 하는 과학자는 당시에 없었다. 거의 최초라고 보면 된다. 김정숙 연구원은 날 만나고 전공을 바꿨다"고 말했다.

김정숙 연구원은 28세의 나이에 김순욱 박사를 만나 연구를 시작했다. 그게 벌써 9년 전이니 그의 꽃다운 시절을 천문연의 연구실에서 보낸 셈이다. 그래도 보답은 있었다. 김정숙 연구원은 지난 4월 발표한 별 탄생의 최신 이론을 최초로 증명하는 논문을 게재한 데 이어서 이번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별의 탄생과 종말이라는 전혀 다른 두 분야의 박사 학위 논문 주제를 발표할 수 있게 됐다.

8월 졸업 예정인 김정숙 연구원은 국내 최초로, 그리고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블랙홀 마이크로퀘이사 분야의 박사 학위 수여자가 됐다. 김순욱 박사에 따르면 별의 탄생과 종말이라는 전혀 다른 두 극단의 분야를 박사 학위 주제로 동시에 다루는 예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김정숙 연구원은 "블랙홀 제트 분출 현상도 4년간 수차례 실패했었는데,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해 마침내 관측에 성공하고 논문이 나오게 돼 너무 기쁘다"며 "현재 상대론적인 제트 발생 과정에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은 수많은 의문들이 남아 있어서 차례 차례 그 수수께끼들을 풀어갈 예정이다"고 포부를 밝혔다.

◆ "천문 연구에 있어서 망원경은 가장 중요한  도구"

블랙홀 마이크로퀘이사에서 제트가 나오는 그림
블랙홀 마이크로퀘이사에서 제트가 나오는 그림
그들의 이번 연구는 '제트 분출 시점을 이론적으로 예측하고 실제 관측까지 성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제트 분출 순간을 포착하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4년 만에 이뤄낸 결과다.

여기에는 서울·울산·제주에 설치된 전파망원경 세 개를 연결한 지름 500㎞짜리 우주전파관측망 'KVN'과 이를 일본의 우주전파관측망 'VERA'와 연결해 만든 지름 2000㎞의 전파망원경 네트워크가 큰 역할을 했다.

천문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있어 망원경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연구 장비다. 선진국들이 앞다퉈 망원경을 우주 궤도에 올리고 있는 것만 봐도 이 분야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알 수 있다. 우주를 통해 알려지게 될 현상은 기초과학을 이끌어갈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김순욱 박사와 김정숙 연구원은 이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일본에 매년 망원경 사용 허가를 위한 제안서를 써서 제출해야했다. 수많은 경쟁자 중에서 제안서가 선택돼면 망원경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제안서 작성부터 경쟁이 치열할 수 밖에 없다. 천문 연구의 경우 데이터 축적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1년만 제안서가 선택이 안돼면 연구의 지속성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김순욱 박사는 "대부분의 망원경은 자기 나라만 독립적으로 쓰지 않는다. 미국, 유럽, 일본, 호주 등이 보유하고 있는 망원경도 공유한다"며 그 이유로 데이터의 공유를 들었다. 천문 연구의 경우 워낙 범위가 넓어 독자적으로 수행해 나갈 수 없는 분야다. 욕심을 부려 다른 나라 연구자들을 소외시키면 그만큼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된다. 다른 분야보다 국제 공동 연구가 활발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망원경 선택도 연구 진행에 있어 중요하다. 성능이 좋으면 좋을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만큼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이 짧아지기 때문이다. 천문은 타이밍이기 때문에 오래 관측할 수록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반대로 성능은 낮지만 정확한 망원경을 사용할 경우, 화질이 좋은 이미지를 얻을 수 없지만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아진다.

김정숙 연구원은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 누구나 성능 좋은 망원경을 사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일단은 이론을 증명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며 "기회비용은 누구에게나 있다. 선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연구의 성격에 따라 망원경을 선택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처음엔 어려움이 많았다. 무엇보다 거리적 제약이 뒤따랐다. 일본의 망원경을 사용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득달같이 달려가야만 했다. 전화나 이메일을 통해 연락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당시는 일본도 망원경을 이용해 이제 막 제대로 된 관측을 시작하려고 하던 차였다. 그래서 데이터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김순욱 박사가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매번 일본에 가면 1∼2달 정도는 체류하며 관측을 진행했던 것 같다. 국내에 도움을 부탁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며 "망원경이 고장날 경우, 그 망원경에서 얻은 데이터는 무용지물이 된다. 고장 나기 전 데이터라도 사용할 수 없다. 그런면에서 망원경의 세팅은 중요한 문제다"고 회상했다.

천문 연구를 타이밍의 과학이자 확률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그들. 지금까지 이뤄낸 성과 역시 운이 좋았다고 답했다. 김정숙 연구원은 "날씨와 외부 조건들이 모두 맞아 떨어져야 제대로 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며 "자신의 선택에 따라, 아이디어에 따라 성과도 다를 수 있다. 장비 탓 할 건 없다"고 말했다.

천문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될 그들의 스케일 큰 연구가 향후 대한민국 천문 연구 역사상 가장 큰 '잭 팟'을 터뜨리게 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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