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 박용기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아내가 열심히 골라놓은 숙소는 비록 사진에서 보는 것 만은 못하였지만 바다 전망이 좋은 위치에 자리한 아담한 펜션이었다.
아내가 열심히 골라놓은 숙소는 비록 사진에서 보는 것 만은 못하였지만 바다 전망이 좋은 위치에 자리한 아담한 펜션이었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올 여름은 최악의 폭염으로 기록된 1994년 이래로 가장 더운 여름이었으며 제주도에서는 열대야가 47일째 발생해 1994년의 최다기록인 46일을 넘어섰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잠 못 이루는 밤이 앞으로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라니 벌써부터 내년 여름걱정까지 들게 한다. 기상청에 의하면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의 1년 중 열대야 평균 날 수는 8.2일인데 비해 2100년경이 되면 열대야가 70일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때는 내가 이 세상에 없어 나와 상관은 없는 이야기 이지만, 그래도 이제 두 돌이 안된 외손녀들을 보면서 그 아이들이 노년이 되어 고생할 생각을 하니 꼭 나와 상관이 없는 일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여름엔 덥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잠시 휴가를 떠날 수 있어 좋다. 우리 가족도 더위를 피해 남해의 바다로 휴가를 다녀왔다. 이번 여행에는 이제 19개월이 된 외손녀와 둘째 딸아이가 함께 하였다. 아내와 나는 서울에서 바쁜 직장생활을 하는 딸의 아이를 맡아 키우고 있는데, 이 외손녀가 외할머니에게 찰떡처럼 붙어 잠시도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는다. 태어나서 지금껏 하루도 외손녀 시중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내가 어떻게 좀 홀가분하게 휴가를 가볼까 궁리를 하였지만 만만치가 않았다. 그래서 외할머니와 외할머니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외손녀와 모처럼 딸과 함께 휴가를 보내고 싶은 우리 딸이 엮이어 하나의 패키지가 되고 나는 운전기사 겸 가이드로 함께 휴가를 떠나기로 하였던 것이다.

45도 경사 비탈에 108개 층층계단, 680여 개의 논이 계단식으로 펼쳐진 다랑이 논들은 바다를 향해 흘러가다 어느 순간 절벽 위에 서게 되고 발 밑으로 탁 트인 푸른 바다와 만나게 된다.
45도 경사 비탈에 108개 층층계단, 680여 개의 논이 계단식으로 펼쳐진 다랑이 논들은 바다를 향해 흘러가다 어느 순간 절벽 위에 서게 되고 발 밑으로 탁 트인 푸른 바다와 만나게 된다.
비록 귀여운 혹을 떼어 놓고 홀가분하게 떠나는 여행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나서는 여행인지라, 아내는 별로 좋아하지도 더욱이 익숙하지도 않은 인터넷 검색을 밤늦도록 하면서 가장 멋진 펜션 찾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끝에 남해군의 남면 가천 다랭이 마을 가까운 곳에 숙소를 하나 정하게 되었다. 사진으로 보는 숙소의 내부와 바다 전망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아내가 열심히 골라놓은 숙소는 비록 사진에서 보는 것 만은 못하였지만 바다 전망이 좋은 위치에 자리한 아담한 펜션이었다. 특히 까다로운 외손녀의 마음에도 드는 것 같아 안심이었다. 더욱이 저녁 빛으로 물든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며 잔잔한 음악과 함께 바비큐로 저녁을 즐길 수 있도록 해준 숙소의 서비스는 정말 훌륭하였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먼 바다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환상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먼 바다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환상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한 이번 여행의 주 목적은 육아와 일에 지친 두 여인들에게 ‘일단 일상과 집을 떠나 탁 트인 바다를 보게 한다’ 였으며, 그동안 함께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던 ‘엄마와 딸의 오붓한 시간 갖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를 구경하러 나서기 보다는 바다가 잘 보이는 방에서 에어컨 바람을 쏘이며 뒹굴뒹굴하다가 맛있는 밥을 먹고 해안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는 정도로 아주 느슨한 여정을 잡기로 하였다.

남부지방에서 볼 수 있는 노랑하늘타리꽃.
남부지방에서 볼 수 있는 노랑하늘타리꽃.
그래도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둘째 날 새벽 바다가 부르는 소리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모두 잠이 든 새벽에 조용히 카메라를 챙겨 가까운 다랭이 마을로 향했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먼 바다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환상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45도 경사 비탈에 108개 층층계단, 680여 개의 논이 계단식으로 펼쳐진 다랑이 논들은 바다를 향해 흘러가다 어느 순간 절벽 위에 서게 되고 발 밑으로 탁 트인 푸른 바다와 만나게 된다. 남해를 몇 번 여행해 보았지만 이곳만큼 탁 트이고 아름다운 바다를 보지 못하였다. 마을 길을 따라 바다로 내려가는 곳곳에는 노랑하늘타리, 사위질빵, 그리고 누리장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해안은 절벽과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다랭이마을엔 배를 댈 수 있는 포구가 없다.

해안은 절벽과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다랭이마을엔 배를 댈 수 있는 포구가 없다.
해안은 절벽과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다랭이마을엔 배를 댈 수 있는 포구가 없다.
오후에는 해변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다 작은 해수욕장에 들러 잠시 외손녀에게 바다를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 되는 그 아이에게 모래사장을 걷고 바닷물에 발을 담가 보게 하는 일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 같아서였다. 해변에서 함께 놀고 있는 세 여자를 카메라에 담으면서 외할머니와 딸 그리고 외손녀까지 3대가 어우러져 있는 가족의 아름다운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진화 생물학 분야에는 ‘할머니 가설’이라는 것이 있다. 나이가 들어 임신 능력을 상실한 여자들이 왜 오랫동안 더 사는 지를 설명하기 위한 가설이다. 이 가설에 의하면 나이 든 여성은 손자 손녀들에게 좋은 영양을 공급함으로써 손자 손녀의 생존력을 증가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손자 손녀들은 할머니의 유전인자를 일부 지니고 있기 때문에 손자 손녀가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할머니의 후대에 대한 유전적 기여도를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안개가 걷힌 오후 가천 다랭이마을 위에서 남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남해를 몇 번 여행해 보았지만 이곳만큼 탁 트이고 아름다운 바다를 보지 못하였다.
안개가 걷힌 오후 가천 다랭이마을 위에서 남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남해를 몇 번 여행해 보았지만 이곳만큼 탁 트이고 아름다운 바다를 보지 못하였다.
2009년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팀은 이러한 ‘할머니 가설’을 조금 다른 각도로 분석한 재미있는 연구결과 하나를 발표한 적이 있다. 독일, 영국, 일본, 캐나다의 16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의 자료와, 잠비아 말라위의 1950년부터 1997년까지의 자료를 조사하여 할머니가 양육에 참여한 경우의 유아 생존율을 비교 분석한 연구였다. 7개의 인구 집단 모두에서 손자의 생존율은 외할머니가 양육에 참여했을 경우가 친할머니가 참여했을 때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반면 손녀의 경우에는 친할머니나 외할머니 모두 비슷하게 생존율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친할머니의 경우 7개의 인구 집단 모두에서 손자의 생존율에는 오히려 부정적 효과를 나타낸 반면, 손녀의 생존율에는 6개 인구 집단에서 긍정적 효과를 보여주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X 염색체의 관련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외할머니의 X 염색체는 딸에게 50%가 전달되고 다시 손자와 손녀에게 모두 25%씩 전달된다. 친할머니의 X 염색체는 아들에게 50% 전달되고, 손녀에게는 이 50%가 그대로 전달되지만, 손자에게는 전혀 전해지지 않게 된다. 이러한 유전 정보 때문에 친할머니가 무의식적으로 손자보다는 손녀를 적극적으로 돌본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오후에는 해변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다 작은 해수욕장에 들러 잠시 외손녀에게 바다를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 되는 그 아이에게 모래사장을 걷고 바닷물에 발을 담가 보게 하는 일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 같아서였다.
오후에는 해변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다 작은 해수욕장에 들러 잠시 외손녀에게 바다를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 되는 그 아이에게 모래사장을 걷고 바닷물에 발을 담가 보게 하는 일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 같아서였다.
글쎄? 만일 이 논문의 결과를 다 믿는 다면 이제부터 손자는 절대 친할머니에게 양육을 맡기면 안 된다는 과학적 근거가 생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 육아 전문 잡지에 의하면, 우리나라 아이 양육자의 22 %가 외할머니로 11 %인 친할머니의 두 배나 된다. 어쩌면 이러한 연구 이전에 이미 엄마들은 이기적인 유전자의 이끌림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결과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비록 조용하고 홀가분하게 떠난 여행은 아니었지만 원래의 목표인 일상과 집을 떠나 탁 트인 남쪽 바다를 만나고, 그래도 좀 여유 있는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여름여행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더위와 싸움을 해야 했지만 이제 8월도 하순으로 접어들어 벌써 새벽 바람 속에는 벌써 가을의 냄새가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여행을 다녀 온 이후에도 귀여운 외할머니의 찰떡은 여전히 외할머니에게 딱 달라붙어 건강한 여름을 보내고 있으며, 외할머니는 외손녀에게 좋은 영양을 공급하여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해변에서 함께 놀고 있는 세 여자를 카메라에 담으면서 외할머니와 딸 그리고 외손녀까지 3대가 어우러져 있는 가족의 아름다운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해변에서 함께 놀고 있는 세 여자를 카메라에 담으면서 외할머니와 딸 그리고 외손녀까지 3대가 어우러져 있는 가족의 아름다운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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