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렛 요한슨이 출연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네덜란드 화가 페르메이르(영어 발음 베르메르)의 작품에 얽힌 사연을 꾸며 그린 영화다. 서양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페르메이르는 그 유명세에 비해서 삶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아 작품 속 모델인 하녀와의 로맨스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는데, 스칼렛 요한슨의 알 수 없는 표정이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뉴욕의 심장이라 불리는 센트럴 파크 근처에 '뮤지엄 마일'이라는 미술관 거리가 있다. 미술 애호가라면 누구나 첫 걸음에 달려갈 만한 메트로폴리탄, MOMA, 구겐하임 등 유명 미술관들이 줄지어 서 있는 매력적인 곳인데, 웬만큼 체력 좋은 미술 애호가가 아니고서는 메트로폴리탄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해도 체력이 바닥나고 말 것이므로 전략적으로 둘러 볼 필요가 있다.

그 중 '프릭 컬렉션'은 2시간이면 여유 있게 돌아볼 만큼 자그마한 규모이면서도 뮤지엄 마일을 대표하는 대형 미술관들 틈에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미술관이다. '프릭 컬렉션'은 프릭이라는 사업가가 평생에 걸쳐 수집한 미술품과 저택을 기증하여 공개된 곳이다.

이 곳은 여느 미술관과는 느낌이 다르다. 캔버스 틀에 의해 객체화 된 작품을 단순히 모아 둔 장소로서의 미술관이 아니라, 미술 작품이 본래의 위치에서 기능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프릭 컬렉션의 작품들은 캔버스 외부의 공간과도 조화를 이룬다. 관람객이 곧 수집가의 관점이 되어, 최초의 감상자가 어떠한 취향으로 어떠한 조화를 의도했는지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관람객은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프릭 컬렉션 '프라고나르'의 방<사진=프릭컬렉션 홈페이지에서 인용>
프릭 컬렉션 '프라고나르'의 방<사진=프릭컬렉션 홈페이지에서 인용>

나에겐 특히 부셰의 방과 프라고나르의 방이 즐거웠다. 로코코 양식을 대표하는 부셰와 프라고나르는 스승과 제자 관계인데, 현대인에게는 제자인 프라고나르가 더 인기가 많은 듯하다. 로코코가 귀족들의 사랑과 유희를 소재로 한 화려하고 장식적인 미술 양식이었던 만큼, 대부호 저택의 응접실에 안성맞춤이었다.

사방을 돌며 걸려 있는 프라고나르의 사계절 연작, 18세기 유럽 풍으로 꾸며진 가구와 소품들,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 등 방 안의 모든 것이 프라고나르가 그린 연인의 사랑 놀음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프릭 저택의 응접실은 프라고나르의 작품을 걸기에 최적의 공간이었고, 이 공간은 프라고나르의 작품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그 작품을 메트로폴리탄의 벽에서 보았다면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기억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프릭 컬렉션은 부셰와 프라고나르 외에도 여러 거장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특히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세 개나 소장하고 있다. '세 개나'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페르메이르의 작품이 희귀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남아 있는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겨우 37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릭 컬렉션보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미술관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5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4개), 워싱턴 내셔널갤러리(4개) 밖에 없다. 페르메이르의 작품 37점을 모두 관람하러 세계 곳곳의 미술관을 찾아다니는 애호가들이 있을 정도이니, 페르메이르는 놓쳐선 안 되는 컬렉션이다.

나도 프릭 컬렉션에 들어서면서 페르메이르의 작품에 대한 기대가 많았다. 하지만 저택을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발견할 수 없었다. 부셰, 프라고나르, 와토의 방을 지나, 렘브란트, 고야, 다비드, 앵그르, 코로, 밀레, 드가, 르누아르, 휘슬러 등 거장들의 작품들 사이에서도 페르메이르는 보이지 않았다.

프릭 컬렉션의 거의 모든 작품을 둘러본 후에야 뜻밖의 장소, 2층으로 올라가는 길목의 복도에서 페르메이르를 만날 수 있었다. 계단에 발을 디디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았는데 그나마 2층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당황스러움도 잠시였다. 어두침침한 복도의 벽에 페르메이르의 엽서 같은 작품이 먼지 날리는 조명을 받으며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 또한 조화로운 배치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복도에 걸려 있는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을 감상하며 프릭 컬렉션이 매우 색다른 방식의 감상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프릭 컬렉션은 작품 고유의 역할을 보여주고 공간과의 상호 작용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미술관에서는 보기 힘든 조화의 미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 프릭 컬렉션의 전시는 최고라기 보다는 최적이다.


이정원 ETRI 선임 연구원.
이정원 ETRI 선임 연구원.
이정원 선임연구원은 책과 사람에 쉽게 매료되고, 과학과 예술을 흠모하며, 미술관과 재즈바에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펜탁스 카메라로 순간을 기록하고, 3P바인더에 일상을 남깁니다. 시스템과 팀워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습관과 절차 자동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 연구원은 이정원의 문화 산책을 통해 자연과 인류가 남긴 모든 종류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정원 연구원은 서울대학교 전기공학부에서 공부하고 동 대학에서 의용생체공학 석사를 마쳤습니다. 현재 ETRI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KAIST에서 바이오및뇌공학과 박사과정을 진행 중입니다.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