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군 백운면 반송~석전~무등마을
글·사진 조문환 선생

▲나도 떠 내려 갈래요...얼어붙은 겨울강에 재첩잡이 배가 묶여 있다. 날이 풀리면 저 배도 춤출 것이다. ⓒ조문환 선생.

실개천처럼, 엄마의 탯줄처럼 가느다랗게 꼬불꼬불 흘러내려오던 섬진강은
석전마을을 지나 무등마을에서 내동산을 만나 크게 휘감아 돌았다.

팔공산과 마주하고 있는 내동산은 887미터의 고봉이다.
이제 갓 태어난 섬진강이 이처럼 고봉을 마주하고서야 어찌하겠는가?
부딪치면 돌아가야지.

내동산에는 효험이 좋은 샘물이 있다는 말도 들었다.
여름이면 이곳에 흐르는 샘에서 등목을 하면 아무리 심한 땀띠라도
금방 사라질 정도로 약발이 센 곳이라 한다.

원신암, 유동마을을 지나 반송마을에 당도하니 사람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돌아간 듯 인기척이 서려있는 방앗간이 있었고
한 길가에 자리한 주막을 겸한 정류장도 아직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몽주의 조카로 충절을 지켰던 최양선생의 유허비가
마을 입구의 소나무와 절묘한 조화를 이뤄 더더욱 사람냄새를 느끼게 했다.

 

▲반송마을 앞 섬진강, 그 어느 곳에도 구겨짐이 없었다. 아! 세상모두가 이처럼 맑았으면! ⓒ조문환 선생.

고독을 즐긴다고는 하지만 평생 고독만 즐길 수 없는 실정이다.
고독도 사람에 부대낀 후에야 진정한 고독이 될 수 있다.
그 부대낌의 정도에 따라 고독의 정도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黑이 있어야 白이 있는 것처럼, 고독도 사람과의 조우가 있은 후에 가능하다.

그간 나의 길고 짧았던 여행 속에서 가장 볼품 있었던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사람이 풍경을 만들었고 사람이 이야기를 만들었으며, 사람 사는 구경이 최고의 볼거리였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알프스,
떼제베 속에서 보았던 남프랑스의 광활한 초록대지,
달력 속에나 볼 수 있었던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그림 같은 마을들,
티끌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던 항구도시 깐느,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사람이 어울린 시끄러운 시골장터만 하지 못하였다.

비록 사람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한 여행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사람을 통해 위안을 얻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방앗간, 고드름, 낡은 간이 정류장.... 이런 것들이 사람냄새를 느끼게 했다. 반송마을이다. ⓒ조문환 선생.

반송마을은 어쩌면 섬진강의 첫 기착지와도 같았다.

최양선생의 유허비와 함께 마련된 정자가 섬진강을 내려보고 앉았고,
이십 리 이상 달려왔던 섬진강도 이쯤에서는 한순간 쉬어갈 법 하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도 누군가의 쉼터가 되면 좋겠다.
아무나 걸터앉아 나를 통하여 쉼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의 존재의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인생이 될 것 같다.
 

▲섬진강이 나즈막이 흐르는 곁에 자리잡은 허름한 비닐하우스, 세월이 고추를 말리고 있었다. ⓒ조문환 선생.

석전마을은 섬진강을 닮은 사람들의 공동체와도 같았다.

스물 가구 정도 작은 동네, 사람이래야 겨우 마흔 여명,
가장 젊은 축에 든 사람도 예순이 훨씬 넘었다.

박헌승선생은 올해로 일흔 다섯이다.
아저씨라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할아버지라고 부르기에도 어중간한 연세였다.
그러나 연세에 비하여 훨씬 젊어 보이셨다.

인기성 발언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젊어 보인다는 말에 빙그레 웃으셨다.
대문을 기웃거렸을 때 그는 마당에서 인삼재배를 위한 목재를 다듬고 있었다.

선생은 태어나서 한 번도 마을을 떠나 살아 본적이 없는
말 그대로 석전마을 토박이다.
 

▲철 받침대가 세월을 떠 받치고 있다. 섬진강의 나이 만큼 이들도 나이를 먹어 가는가 보다. ⓒ조문환 선생.

수입이 얼마나 되어요?
보도시 (겨우) 먹고 사는 거이지뭐
농사지어봐야 내게 돌아오는 거 별로 없어
기계 값 주고 뭣떼고 뭣떼고 나면 하나도 남는 거 없어

이 동네 자랑이 뭔가요?
자랑거리 없어 돌밭이야 돌밭, 그래서 石田마을이야
그래도 그의 말 속에는 세상을 향한 원망도 자신에 대한 후회도 없었다.

그냥 세상을 살아온 것뿐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섬진강이 흐르는 것처럼 그의 삶도 자연의 일부였다.

그렇다면 나의 살아온 것도 앞으로 살아가야 할 것도 그렇지 않을까?

욕망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부른다!
삶과 죽음이 자연의 일부이듯이,
나의 살아가는 것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면 일이 수월하지 않을까?

 

 

▲섬진강을 닮은 박헌승 선생, 그의 앞 집 대문에는 "송아지 나가요!"가 이웃을 배려하는 듯 하고, 설 날 호박시루떡을 만들기 위해 마당 한켠 비닐하우스에는 호박말랭이가 익어가고 있었다. ⓒ조문환 선생.


점심때가 되었다고 하면서 우리를 데리고 간 경로당에 들어서자
된장국 냄새가 코를 확 찔렀다.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거실에 상도 없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계셨고
남정네들은 작은방에 진을 치고 있었다.

무 밥, 무 왁다지, 무국, 무 무침, 무김치 온통 무 식단으로 꾸려져 있었다.
난생처음 먹어 본 무밥은 언제 소화되었는지 모르게 배가 꺼져버렸다.

아흔이 넘으신 할머니는 아직도 검은머리가 그대로였고
이 동네에서는 일흔은 청년,
여든 정도는 되어야 노인 축에 들어가고 그래도 심부름은 다 해야 한다.

적어도 제대로 된 어른 대접을 받으려면 아흔은 되어야 한단다.

말이 동네지 모두 한 가족이었다.
생명공동체 운명공동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 한 사람 얼굴 찌푸리지 않았다.
밥이며 국이며 더 먹으라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이 날 밥을 먹은 것이 아니라 인정을 먹었다. 땅바닥에서 먹었지만 그 어느곳 보다 성스러웠다. ⓒ조문환 선생.

식사 후 음료수 사 드시라고 돈 얼마를 드렸더니

이렇게 하는 거 아녀,
밥 먹는 거 갖고 함부로 이렇게 하면 안디야!
밥 먹었다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드리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래도 그것이 아녀, 그런 식으로 우리를 보지 말어~

한사코 받지 않으려는 할머니들과 한바탕 씨름이라도 벌어진 듯하였다.
어찌나 한꺼번에 달려들던지 젊은 나도 이겨낼 방도가 없었다.

그들 속에서 섬진강이 보였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고 때묻지 않은 순수가 보였다.

섬진강이 그들을 닮았는지 그들이 섬진강을 닮았는지는 내 알바 아니다.
 

▲누가 이 길을 먼저 갔을까?
섬진강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결국은 이들이 아닐런지?
ⓒ조문환 선생.

그들의 얼굴 속에는 분명 섬진강이 흐르고 있었다.
꾸미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세월,
그들의 얼굴에 섬진강의 물결과 잔상이 진하게 배여 있었다.

석전마을에서 만난 섬진강 사람들,
나 또한 섬진강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저들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지
자문을 해 볼 일이다.

사람을 닮은 강, 강을 닮은 섬진강 사람들이
한 주간 내내 내 눈에 아른거렸다.
 

ⓒ조문환 선생.

ⓒ조문환 선생.

▲일명 메치기 고기잡이 광경을 목격했다. 대형 망치로 돌을 내려치면 고기가 순간 기절하는 방식이다.
순간 고요했던 섬진강은 울렸다. 이렇게 섬진강의 겨울은 익어만 가고 있다.
ⓒ조문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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