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령면 수선루, 큰시내들)
글·사진 조문환 선생

▲"우리들 세상"... 섬진강이 철새들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청동오리와 각양각색의 물새들은 물론 독수리까지 보금자리를 틀었습니다. 지금 섬진강은 철새들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 조문환 선생

겨울 섬진강이 아름다운 것은
그의 고운자태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뼛속까지 드러내 놓는 가난함,

모진 겨울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야윌대로 야위어
털 오라기 하나도 남지 않았음에도
지치지 않고 봄을 기다리는 겨울 강가의 가냘픈 갈대,

가문 강에 돌 하나, 풀 한포기도 드러나지 않는 것 없이
처참할 만큼의 솔직함 때문은 아닐까?

강둑에 서서 이방인과도 같은 나는 물끄러미 강바닥을 응시한다.

그 가난함에,
그 인내에,
그 처참할 만큼의 솔직함에 할 말이 없었다.

새해들어와 섬진강을 가기로 마음먹었었다.
오히려 가지 않은 날에는 섬진강이 눈에 더 아른거린다.
지나온 섬진강의 굽이굽이가 눈을 감아도 또렷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갈 때마다 섬진강은 나에게 새로운 음성을 들려주지만
그렇다고 매번 친근한 미소만 던져 주지는 않았다.

섬진강이 나와 이심전심인 줄 알았더니,
폭포수처럼 섬진강이 쏟아내는 그 음성을 다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나 섬진강과 찰떡궁합인 줄 알았더니,
나는 너와 상관이 없노라고 손사래 친다.

허기야 나 그렇게 쉽게 섬진강과 호흡을 같이 했더라면
나 그처럼 섬진강을 그리워하지 않았으리!

나 그처럼 섬진강과 찰떡궁합이지 않았기에
나 그처럼 섬진강을 느끼기 위해 몸이 달아있지 않겠는가?

마령은 사람을 잡아당기는 마력이 있는가 보다.
마령을 다녀 온 후 마령사람들의 인기척이 떠나지 않았다.
드라마 세트와 같은 거리에서 분장을 한 사람들이 반겨 맞아 줄 것 같았다.

 

▲섬진강을 걷다보면 이렇게 가난하고 이렇게 진솔한 강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섬진강은 늘 땡기는? 강인가 봅니다 ⓒ 조문환 선생

마령면 소재지를 살짝 스쳐지나온 섬진강은
곧바로 두 개의 작은 개천과 합수를 하니 바로 세동천과 은천이다.

은천은 섬진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섬진강과 하나가 되고
북에서 남으로 남하를 해온 세동천은
섬진강의 옆구리라도 찌를 기세로 내려오다 섬진강과 일순간에 합수를 한다.

세동천은 어찌나 섬진강과 닮았는지
어떤 것이 섬진강인지 어떤 것이 세동천인지
그 줄기를 따라오지 않고는 분간조차 어려워 보인다.

섬진강이 제 혼자 강이 아닌 것은 섬진강을 따라 걷다보면 알 수 있다.

산이 강을 낳고
강이 바다를 낳아
산과 강과 바다가 하나라는 것은
실핏줄과도 같은 섬진강을 걷고야 깨달았다.

 

ⓒ 조문환 선생

세 개의 물이 하나가 되는 강정리 월운마을에서
강은 변신에 변신을 꾀하려는 듯 강한 휘감아 돌기를 시도한다.

그 형상이 어찌나 힘차고 독특하던지 수선루(睡仙樓)에서 내려다 본 섬진강은
힘센 궁사가 시위를 강하게 당긴 활처럼 급하게 굽어졌고
그것이 연속으로 산을 휘감아 돌아 멀리서 보는 이를 어지럽게까지 했다.

강이 어떻게 이처럼 굽이쳐 쌍굽이가 될 수 있는지,
누군가가 이처럼 강의 형상을 조작하지 않았던들 있을 수 있었을까?

강물의 휘돌기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수선루다.
그 기괴한 강의 휘돌기를 시샘이라도 하듯이
수선루의 형상은 여느 정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산허리에 돌출된 바위틈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수선루는
마치 새둥지와 흡사하고 지붕이나 처마가 없이 바위가 이를 대신한다.

수선수의 섬진강은 차라리 호수가 되어 버렸다.

강물위에 보름달이라도 내려앉아 강과 달이 하나가 되고 곡주라도 기울인다면
이것은 신선이나 할 일이 아니겠는가?

수선루를 휘감아 돈 섬진강은 그 기세를 살려 큰시내들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산허리를 감싸고 돌았다.

그 휘감기가 어찌나 기묘하던지 쌍굽이치는 섬진강을 내 발 아래두고
그 전라의 모습을 또렷히 내려다 보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견물생심이랄까?
무슨 조화가 있기 때문일까? 강이 이렇게 휘감아 돌 수 있다니...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30분 이상 가파른 산을 올라야 했다.
아직 누구도 밟아 보지 않은 숲길을 헤쳐 올랐다.

바짝 마른 낙엽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고요한 계곡을 울렸다.
어찌나 낙엽이 두텁게 쌓였던지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차가운 날씨에도 깎아지른 듯한 산을 오르니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위를 당기는 활처럼 휘감아 도는 강의 위용을 볼 수만 있다면
이쯤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올라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보일 것만 같았던 섬진강의 쌍굽이는
빼곡하게 자란 나무들 때문에 오히려 더 가려져만 갔다.

하늘을 나는 새가 되지 않는 이상 그 굽이굽이를 볼 수 없었다.
아! 이 아쉬움....
 

▲마치 새집처럼 바위틈에 집을 짓고 앉은 수선루, 그 아래 섬진강은 차라리 호수다. 휘영청 밝은 달 아래 이곳에서 곡주라도 나누며 쌍굽이 휘감아도는 섬진강을 본다면 차라리 신선이 아닐까? ⓒ 조문환 선생

그러나 이내 나에게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그렇다 내가 보고 싶다고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높이 올라간다고 다 내려다 보이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수고해서 산을 오른다 해도
내 수고와는 상관없이 내가 소원했던 장면을 볼 수 없을 수 있으니,
그것이 세상일이고 그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길은 굽어야 제 맛이고,
강은 휘감아 돌아야 강 다웁고,
사람도 인생굽이를 넘겨야 비로소 사람냄새 나지 않겠는지...

강을 따라 걷고 산을 오르다 보니 자연에 순응하는 습성이 생겨났다.
산을 만나면 산을 휘감아 돌아가고 느리더라도 정도를 따라 흐르는 강,
곧을 길, 넓은 길, 평탄한 길만 가려는 세상에게
섬진강은 순리를 따라 돌고 돌아가라고 귀띔 해 주는 듯하였다.
 

ⓒ 조문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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