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조문환 선생

포동교를 지나 임실로 접어드니 언제 다시 진안골에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까닭 없는 서러움이 몰려왔다.

이것도 소유욕일까?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는 설렘보다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는 아쉬움이 더 크게 몰려왔다.

진안은 숨은 진주 같았다.
좀처럼 속을 드러내 놓지 않는 진주!
나는 근 석 달 동안 진안을 안고 돌았다.
진안의 땀 냄새, 흙냄새, 사람냄새에 취했었다.

그는 다소 감정을 숨겼다.
값싼 헤푼 웃음을 뿜어대는 동네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무표정인 듯 하지만 진한 정을 간직하고 있는 동네였다.

이제 진안을 등에 지고 임실로 향한다.

안녕, 진안이여!

너는 민족의 강, 섬진강을 잉태하였고
순환, 순리, 우회의 진리와
일체의 외식(外飾)을 거부하도록 내게 가르침을 주었다.

너는 낮은 자리에 앉기를 권했고
비천한 자리에 있어도 비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너는 나의 거울이다.
안녕 진안이여, 섬진강과 영원하라!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물소리는 작아지고 강은 넓어졌다.
막동들을 지나 방동교를 넘어서니 길은 길대로 강은 강대로 갈라졌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나의 발걸음은 물길로 돌아섰다.
저 멀리 공수봉과 성미산이 말의 귀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이방인의 발자국소리를 듣는 듯 하다.

방동마을 앞 섬진강둑은 수 백 년 된 참나무 군락이 하나의 숲을 이루어
방미산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몸으로 막아내고 방동마을을 감싸 안았다.

이 나무 하나 하나가 섬진강과 서로 호흡을 같이 했을 것이다.

섬진강이 마르면 나무도 말랐고,
섬진강이 울면 나무도 서러웠을 것이며,
섬진강이 봄으로 춤추고 뛰놀 땐, 그 또한 행복했으리라!

봄의 시작을 알리는 경칩도 지났지만,
봄이 그처럼 쉽게 온다면 그것은 진짜 봄이 아니다.
아직도 얼었던 강이 다 녹으려면 달포는 더 있어야 한다.

기다림,
봄은 그 기나긴 기다림이 있은 후에야 진짜 봄이다.

터벅터벅 느리게 걷는 발걸음으로 눈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보니
저 멀리 오원교가 로마시대 거대 수로처럼 성미산과 공수봉에
양다리를 턱 걸치고 서 있는 듯 하다.

마치 골리앗이 다윗을 깔보듯, 시위하듯,
섬진강을 짓누르듯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최근에 생겨난 순천과 완주를 잇는 고속도로 건설로 생겨난 기형적 다리다.
양복에 갓 쓴 언발란스, 속도제일주의가 낳은 기형아다.

그를 나무랄 일도 아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니까!

나 또한 저 다리를 수 차례 건넜었고,
그 문명의 이기에 감동했었으니 공범 중의 공범이 아닌가?

조금만 지체되고 교통이 막히면 안달을 하는 나이고 보면
어쩌면 저 다리는 내가 만들어낸 나의 욕심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내 탓입니다'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장면이다.

강은 물리적으로는 분단의 선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서적으로는 분명 연결의 통로이자 끈이다.
그 어느 것보다 끈끈한 혈맹체로 묶어내는 데는 강만 한 것이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섬진강을 노래했는가?
얼마나 많은 나그네들이 섬진강을 탐했겠는가?

상류에 뿌려진 씨앗 하나가 하루에서 문명으로 잉태된 것도
강이 만들어낸 역사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엮어내고 너와 나의 공간을 묶어내는
아교와 같은 것이 강이다.
그래서 강은 생명을 낳고 문명을 낳고 역사를 창조한다.

아직 탯줄과 같은 작은 강 위에 골리앗 같은 다리들이 놓여지고 있다
물리적 분단을 참아낼 인내심이 부족한 것이다.
속도를 탐하고 크기를 갈구하며 높은 것을 염원하는 시대가 만들어 낸 결과다.

단 몇 초간 인터넷의 버벅거림이 사람을 늙게 하고,
아파트 평수나 브랜드로 사람의 수준과 인격까지 평가되는 세상이다.

자연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었던 사찰도 대규모의 불사를 일으켜
속세로 나아가기를 경쟁하듯 하고,
매머드급 교회당은 바벨탑이 되어 천국에까지 이르게 하는 형국에
과연 부처님과 예수님은 이 세대를 향하여 무엇이라 할 것인가?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으셨다.

내가 너무 현실을 무시하고 과거로의 회귀에 집착하고 있는지 모른다.

광속으로 치닫고 있는 속도 지향주의의 세상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만 가는 마천루를 닮은 세상에,
무엇이 감속페달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섬진강은 오늘도 없는 듯이,
작고,
낮고,
느리게
바다를 향해 굽은 길을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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