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조문환 선생

ⓒ조문환 선생

오늘 섬진강과의 데이트는 관촌역에서 시작된다.
만남과 이별의 정점, 출발이기도 하고 만남이기도 한 것이 바로 역이다.

관촌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봄비가 내렸다.
섬진강은 웬일인지 관촌역에서 서쪽으로 급선회하여 옥정호쪽으로 내달렸다.
철로는 철로대로 강은 강대로 제 갈 길을 가는 듯이 보였다.

좀 미안한 말이지만
관촌역에서는 내가 익히 가졌었던 역의 서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내 특유의 감성호르몬 분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어릴적 철길은 나의 가장 소중한 놀이터였다.
집과 철길이 불과 50미터도 채 되지 않아 늘 기차의 기적을 듣고 살았다.

친구들과 철로에 귀를 대고 기차가 어디쯤 오는 지 알아맞히기도 하고
기차가 지난 다음에는 철로로 뛰어들어 거센 태풍과도 같은 바람을 맞서서
폐부까지 파고들어오는 그 시원함을 만끽했었다.

누가 더 레일을 멀리 걸어가는 지 친구와 내기도 했었고
여름이면 목개불 놓고 동네 어른들이 더위를 쫓았던 곳도 철길이었다.

그러기에 역과 철길은 늘 나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로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관촌역에서는 추억을 더 이상 반추할 수 없었다.
그것이 오늘의 일반적인 역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관촌역에서는 더이상 이별이라든지 만남이라는 것은 있어 보이지 않았다.
단지 감정 없는 화물들의 운송,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만이
그림자처럼 남아 있어 보였다.
 

ⓒ조문환 선생

관촌역에서 불과 시오리만 걸어가면 신평면이다.
섬진강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 같은 것이 있어 보인다.
강변에는 마치 도열해 있는 환영객처럼 마을들이 양쪽으로 즐비하다.

그래서인지 어느 마을도 섬진강을 등지고 있는 것은 없다.
강과 마을은 늘 마주보고 있다.
관촌면도 그랬고, 신평면도 그랬다.

그러나 두 마을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관촌이 외향적이라면 신평은 내향적이다.

사람을 짓누르는 듯 크고 현란한 간판들,
뭔가 더 보여줄 것을 찾아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시끌벅적한 관촌면,
억센 시골 남성들이 주먹이라도 쥐고 달려들 것만 같은 동네가 관촌이다.
그 거친 모습 속에서 이국적인 역동성을 느꼈다.

그러나 신평은 그렇지 않았다.
없는 듯 있었고 있는 것마저도 감추고 수줍음을 타는 듯 했다.
5일장인 신평장은 무싯날이라 장옥들이 굳게 닫혀 있었고
시장을 지키는 송아지 크기의 개들만이 짖고 있었다.

마치 근대화시대를 조명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세트처럼 옛날 정서가 물씬 풍겨났다.
 

ⓒ조문환 선생

마담이 반겨줄 것만 같은 창조찻집은 '영업 중' 간판이 나부꼈고,
수궁반점은 쿵쿵거리며 면빨 뽑아내는 소리가 길거리로 튕겨져 나왔다.

아랫이용원은 할 일이 없는 동네 영감들이 죽치고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는 모습이
흐릿한 유리창으로도 훤히 볼 수 있었다.

아직도 통통통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정미소,
뿐만 아니라 할 일 없이 길거리를 다니는 동네 사람들조차
정교한 시나리오 속에 움직이는 배우 같아 보였다.

마치 동네가 하나의 잘 보존된 박물관처럼...

동네 정류장에서 전주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영감님은
묻지도 않는 말에 정치인들을 향하여 욕을 퍼부으셨다.

그렇지요 영감님! 정치인들이 뭘 한 게 있어요?
이렇게 선거철만 되면 간이라도 빼 줄듯 저자세에다 야비하기까지 하고
코가 땅에 닿도록 굽신거리고 비굴하기까지 하지만 선거 끝나면 그만인 걸요.
영감님 속 시원하게 욕 더 퍼부으세요...

이런 말로 영감님의 말씀에 맞장구라도 쳐주고 싶었다.

그래, 나는 신평면이다.
비록 촌스럽더라도 그 속에 진한 여운이 남아 있는 니에게 더 끌린다.
세상이 뭐라고 하더라도 이대로 있어 다오!

그러나 관촌면 소재지를 걸을 때에는 나의 마음은 자동잠금장치라도 설치된 듯
철커덩 소리를 내며 큰 철문이 내려와 닫히는 느낌이었다.

그 현란하고 인공미가 흘러넘치는 대형 간판들의 군락지를
카메라에 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관촌에서는 사진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관촌 대 신평, 내 마음 속에서는 신평이 한판승을 거두고 말았다.
 

ⓒ조문환 선생

만개들을 지나 강을 또 한 번 휘감아 돌면서 넓은 삼각주를 이루었고
그 삼각주는 사질양토로 퇴적되어 기름진 옥토로 변해 있었다.

순간 코를 찌르는 듯한 매쾌한 냄새가 온 들판을 휘감아 돌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 뇌리 속에 확실히 입력되어 있는 바에 따르면 이것은 겨울을 태우고
봄을 싹튀워내는 향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삼각주를 비롯하여 온 언덕과 들판은 검정색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마치 검은 먹으로 물들여진 화선지처럼,
온 강가는 검은 파스텔톤으로 칠해져 있었다.

옅은 안개로 강 언덕과 널따란 삼각주는 한편의 대지예술 같아 보였다.
그 검정색 파스텔톤 바닥 틈사이로 파란 색 새 생명이 돋아나고 있었다.
마치 흑인 아이들의 웃음 속에 드러난 하얀 이빨처럼 수줍은 얼굴을 쏘옥 내밀었다.

녀석들, 용케도 살아났구나!
그 들끓는 화염 속에서도 이렇게 새 생명을 꽃피우다니...

그 생명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손이 있다면 손을 잡고 싶었고 입이라도 있다면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다.

버들강아지는 용케도 살아남아 잠시 구름을 비집고 나온 태양에 반사되어
그 몸둥아리에서 발하는 빛에 눈이 부셨다.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기 위해서는 이처럼 태워야 한다는 비밀을...

생명은 그냥 태어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희생,
남모르는 아픔,
심지어는 불꽃에 나를 태워야 하는 운명의 순간도 있어야 하리!

우리는 모두 그런 누군가의 희생의 산물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작은 생명,
깨알보다 더 작은 새 생명이 나에게 가르쳐 주는 비밀은
나를 태워야 새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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