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더 다가가기
내가 섬진강을 따라 나서기로 마음먹은 것은 지난 해 말쯤이다.

“섬진강가에 사는 사람으로서, 섬진강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으로서,
섬진강 육백리길을 한 번도 같이 따라 걸어보지 못하고서야
과연 섬진강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일종의 자책감이 작용했었다.

나는 이 여정을 시작하면서 몇 가지 나름대로의 원칙을 세워두었다.

무엇보다 섬진강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주변에 화려한 볼거리가 있을지라도 섬진강 곁에 붙어 있지 않다면
쳐다보지 않기로 했었다.

섬진강이 주는 말만 듣고 기록하기로 했다.
섬진강을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얘기들도 일단은 제쳐두었다.

할 수 만 있다면 섬진강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었다.
넓은 길, 편안한 길이 유혹하더라도 섬진강과 같이 흐르지 않는 길이라면
힘이 들더라도 과감히 거부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세 가지 원칙을 지금까지 준수해 오고 있다.

섬진강 외에는 한 눈 팔지 않았음을 자부한다.
비록 섬진강을 더 잘 조망하기 위해 산에 올라간 기억은 있어도
결국 이는 섬진강을 탐하는 나의 욕심 때문이었다.

섬진강이 화려한 모습만 간직하고 있었다면
나의 섬진강 길 따라나서기는 오래전에 중단되었을 것이다.
굳이 화려함을 보려면 섬진강이 아니어도 좋기 때문이다.

가까이 갈수록 있는 모습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섬진강 진솔함이
나를 섬진강으로 이끌어 내었다.

여기에 나에게 들려준 섬진강의 미세한 음성이 있다.
이것들이 나를 물가로 끌어 내렸고 나의 무릎을 꿇게 했다.

데미샘, 그 작은 웅덩이에서 그는 작은 것이 아름답고 진실임을 말해 주었다.

옷 벗은 나뭇가지를 통해서만이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데미샘 오름길을 통해서다.

자연과 사람은 서로 닮아 간다는 것은
석무마을 경로당에서 촌로들로부터 따뜻한 점심식사를 대접받고 난 후였다.

진짜 봄은 화려한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 아니라
얼음 속에서도 안간힘을 다해 봄을 준비하는 2월의 버들강지로부터였다.

역사는 거대한 박물관에서나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옛 추억을 지켜내는 마령사람들의 가슴속에서,
그들의 인생행로가 묻어있는 작은 정미소에 영원히 살아 있었다.

양지쪽 언덕빼기에 송아지와 함께 누워 되새김질을 하는 누렁이 황소와
그의 긴 하품과 그 입에서 뿜어 나오는 하얀 입김,
그를 보면서 행복해 하는 촌로의 모습에서 진정한 평화를 발견했다.

함부로 얼음위에 올라섰을 때 나를 놀라게 했던 얼음 깨지는 소리를 듣고
섬진강도 포효(咆哮)한다는 것을 알았다.

임실군 신평면에 있는 창조다방에서
문화란 옛것에서 지켜내는 인내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영혼의 재탄생이라는 것을
섬진강가에 핀 매화가 바람에 흩날릴 때 발견했다.

단지 아름답기만한 정취는 사람을 매혹시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영혼을 퇴색시킬 수 있다는 것을 옥정호가 알려주었다.

거친 세월에는 거친 자연이,
폭정아래에는 그 폭정에 항거하는 백성이 있다는 것을
섬진강 댐 아래 칼처럼 날을 세운 돌맹이와 바위,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은 물푸레나무가 증언 해 주었다.

완벽함이란, 찻잔에 달이 내려앉은 상태라는 것을
평사리 섬진강 달빛차회에서 달빛을 우려 마신 후부터였다.

추억은 종종 덕치초등학교 아이들이 건넜을 징검다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맛깔진 노래는 해질녘 다슬기 잡이 아주머니들의 귀갓길에 부르는 노래였다.

섬진강의 주인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와 거미
바위 위에 할 일 없이 누워있는 잠자리, 그리고 고향을 찾아 온 제비였다.

바람이 불면 꽃이 흔들리고 꽃은 흔들리면서 핀다는 사실을
주체할 수 없는 거센 바람을 즐기는 자귀꽃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문명과 역사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공로는 더더욱 아니라,
이 땅을 영원히 살아갈 것처럼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서 기록된 것임을
‘근면, 자조, 협동’의 구호가 새겨진 퇴색된 새마을 창고에서 찾아냈다.

우리는 언젠가 이 땅을 떠나야 한다는 운명이라는 것은
신평면의 작은 마을 간이 버스정류소에서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완행버스를 기다리는 노년의 신사에게서 발견했다.

섬진강 더 다가가기

너는 내가 다가갔을 때 웃어주었고
내가 손 내 밀었을 때 날 포옹해 주었으며
네게 가까이 다가감으로서 너의 체취와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너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본 것은 허상이고
네 앞에서 무릎 꿇지 않고 본 것은 나의 교만이다.

너는 내가 가까이 다가 갈 때 얘기 해 주었고 보여주었고 안아주었다.

너에게서 들은 것만이 진실이다.
너에게서 본 것만이 사실이다.

너의 작은 파도소리만이 영원한 노래이고
너에게서 시작된 바람만이 참된 시가 된다.

[출처] 섬진강 에세이 (82)|작성자 월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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