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도 구재봉은 흔들리지 않는다.
(평사리~선장마을)

계절은 에스컬레이터가 아닌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간이동 하는 기술을 가졌다.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는 것은 순간이다.

악양 축지리에 대봉감이 다 따지고 까치밥 하나 남았을 때
섬진강에는 겨울이 찾아왔다.

섬진강에서는 계절이 한 박자 빨리 바뀐다.
봄이 먼저 오는 곳도, 가을이 먼저 떠나는 곳도 섬진강이다.

봄은 늘 섬진강 가 버드나무가지에 물이 올랐을 때 시작되었다.
버드나무 가지에 물이 차올라 그 물이 넘쳐흘러 평사리 청보리 들판을 적셔야
남쪽나라의 봄은 시작되는 것이다.

섬진강에 나서니 이미 강은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바짝 마른 모래, 작년보다 일찍 찾아온 독수리 떼와 청둥오리,
바람에 스치는 갈대들의 바삭거림 ....

가을은 이다지도 온 듯 하더니 어느새 가버렸다.


섬진강에 초겨울 바람이 몰아친다.
바람은 불어도 강물은 잔주름만 질 뿐 흐르는 물은 멈추지 않았다.
강가에 서 있던 대나무는 쓰러질 듯 쓰러질 듯, 그러나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어느덧 노란색으로 변해버린 갈대도 몸을 누일 듯,
그 가는 허리가 끊어질듯 하다가도 이내 제 모습으로 돌아온다.

평사리 백사장에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쳐 개치나루에 흩뿌려지더니
마을은 한바탕 모래바람으로 뒤덮였다.

어디 오늘 뿐이겠는가?
지난 해, 그 지난해, 아니 수백 년 수천 년 전부터 있어왔던 일이다.
그래서인가? 개치나루는 모래 회오리바람에도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평사리 아래 첫 동네 개치나루는 바람이 센 곳이다.
작년까지 어설프게 나마 서 있던 다리가 바람에 쓰러진 것도 올 봄이었다.

개치나루는 사람의 혼이 서려 있는 곳이다.
화개장터로 올라가던 나룻배가 반나절 쉬어가던 곳도 개치나루였다.
서희가 간도로 떠나기 위해 가는 나룻배를 탔었던 곳도 개치나루였다.
조준구가 떵떵거리며 나타났던 곳도 개치나루였다.

그래서 개치나루에는 사람냄새가 난다.

 

앵두나무천지 흥룡마을, 나의 형수님의 친정마을이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인지 개치에 비해 고요하다.
그래서 앵두가 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고 보존되었나 보다. 

구재봉아래 첫 동네 먹점마을은 강 건너 다압에서 보면 보일 듯 말듯하다.
고개를 쏙 내 밀고 강바람에 누군가 날려가지나 않을까 지켜보고 있다.
저 바람을 이겨야 내년 봄에 매화가 피어나리라.

그 아래가 범바구마을로 불리는 호암마을이다.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뛰어내릴 태세다.
강 건너 백운산과 바구리봉에 사자라도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평사리 건너 전라도 땅은 음달, 새터, 골안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다.
그 아래로 몇 발자국만 떼면 다압면사무소가 있는 항동마을이다.
여기서는 바구리봉이 잡힐 듯 하다.

전라도 땅은 네 시 반도 안 되어 이미 어둠이 내린다.
건 건너 경상도는 아직 환한 대낮인데도...

 

 

거센 회오리바람 불어와 대나무 쓰러질 듯 하고 개치나루를 휩쓸어 갈 듯 하여도
형제봉과 구재봉은 미동도 않는다. 

그래서 산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산에서 강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른이 되면 산으로 가지 않겠는가?

그래서 산은 세상을 등지는 사람도 받아줄 넓은 가슴을 가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산은 그 가슴이 다 문드러진 것 아니겠는가?

매화가 가장 먼저 터지는 선장마을에 초겨울 바람이 몰아친다.
그래야 겨울이 오고 봄이 올 테니까..
그래야 매화 피어나고 배꽃을 피워 낼 테니까...

바람불어도 좋은 산
바람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산

섬진강을 지키고 서 있는 구재봉은 바람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산이 좋다.

[출처] 섬진강 에세이 (96)|작성자 월광

 

저작권자 © 헬로디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