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문환

두우산, 너를 호국의 산으로 명명하노라!(두우산 ~ 배알도) 
마지막에 가까이 갈수록 가슴이 떨린다.
처음에도 그랬었다.
첫 눈이 진안고원을 덮어 설국이 되었을 때
자칫 그에게 접근을 허락받지 못할 운명이었지만
데미샘으로부터 접근을 허락 받은 것은 축복이었다.
한 발 한 발 데미샘으로 가까이 갈수록 내 가슴은 조렸었다. 

강은 산에서 시작해서 산에서 그 종점을 이룬다.
섬진강의 마지막 지킴이 두우산은 불과 수백미터에 지나지 않는 작은 산이다.
아래로 고포리가 있고 저 멀리 갈사만과 광양만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두우산 바로 발아래 강 건너는 망덕포구가 두우산과 마주하고 있다. 

생각보다 두우산은 접근을 쉽게 허락하였다.
6백리를 강과 함께 흘러왔던 섬진강사나이에 대한 일종의 예의일까?
초겨울 정취가 그림이었다.
백운산으로 떨어지는 태양에 억새가 눈부시다. 

구부능선에는 양 갈래 길이 나 있었다.
길을 가다보면 흔히 만나는 일이다. 오른쪽일까? 왼쪽일까?
그 갈림길에서 운명이 결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섬진강을 걷는 길에서는 강은 늘 나의 나침반이었다.
길이 아니라 강만 따라 걸으면 되었으니까....
내 마음의 흔들림을 다잡아 주는 것도 섬진강이었으니까...

 

▲ 조문환

정상으로 가까이 가니 두꺼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 마리 두 마리가 아니었다.
등산로 변에 서 있는 바위들이 모두 두꺼비 형상같이 보였다.
섬진강에 살았던 두꺼비가 여기까지 올라왔었나 보다. 

섬진강의 섬(蟾)자는 두꺼비를 뜻한다.
고려 말에 왜구들의 침략에 두꺼비들까지 맞섰다는 것이다.
그 미물과 같은 동물들이 그랬다면 사람들이야 오죽했겠는가? 

드디어 정상이다.
저 멀리 아득히 천왕봉이 산들을 지휘하고 있다.
백운산, 노고단, 구재봉, 형제봉이 그를 호위하고 있다.
이들은 강의 마지막 질주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산 그림자가 늘어지고 어둠이 내리니 강물은 더 빛나기 시작했다.
달이 뜨는 월길, 해가지는 상저구, 재첩의 옛 영화를 누렸던 신방촌포구...
큰 허리를 휘감아 돌아가는 강의 위용이 넘쳐났다. 

작은 고기잡이배가 파문을 남기고 섬진강교를 지나 하동포구로 올라가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진다.

 

▲ 조문환

정상에는 더욱 뚜렷한 진짜 거북이가 강의 북쪽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눈은 천왕봉과 접점을 이루는 듯하다. 

거북바위 바닥에는 또 하나의 호국의 증거가 남아 있다.
음각으로 새겨진 검(劍)이다. 

길이가 석자 정도 되는 형상이 뚜렷하게 생긴 검이다.
칼끝은 북쪽을, 손잡이는 남쪽으로 놓여
거의 정확하게 섬진강과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비록 세월 속에 그 겉모양은 무디어 졌지만 그 속에 비장함은 살아 있었다.
“죽도록 너의 운명과 같이 하리라!”검에서 그런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거북바위에서 남쪽으로 오십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는
또 하나의 호국의 잔상이 남아 있다.
허물어진 봉수대다.  

이 봉수대는 섬진강이 안기는 갈사만과 광양만을 응시하고 있다.
축조기법에 따르면 신라시대 축조된 것과 닮았다고 하나
주변에서 발견된 유물은 조선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그랬으니 아마도 1천년은 넘게 섬진강을 지키고 섰으리라! 

이 봉수대는 금오산 봉수대에
섬진강하구와 남해안의 정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 봉수대에서 힘이 느껴졌다.
허물어지고 훼파된 봉수대와 무디어진 검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낀다. 

이 시대에 누가 이 허물어진 봉수대를 다시 축조할 것인가?
누가 끝이 무뎌진 검의 칼날을 다시 세울 것인가?

 

▲ 조문환

강 건너 바구리봉을 넘어가는 태양이 정확히 봉수대의 끝점을 통과한다.
해시계와 같이 시간을 알려주는 듯하다.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에 매일 반복된 일상이었을 것이다. 

두꺼비, 섬진강과 평행을 이룬 작은 검, 봉수대...
키 작은 두우산에서 발견한 호국의 산증인들이다. 

퍼즐을 맞추듯이, 난해한 형상의 모자이크를 통해 완성된 그림을 상상하듯이,
깨어진 그릇을 끼워 맞추듯이 이들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내가 이 시간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수 천 년을 지나오면서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 흘려 놓은
피의 대가를 먹고 있는 것이리라! 

두우산 발 아래로 역사의 DNA가 담겨져 있는 섬진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다.
전율이 느껴진다.  

천년 이천년 된 과거의 일들이 오늘의 나의 일들과 연결되고 하나의 맥이 되어
내 몸속 깊은 곳에 까지 넘쳐흐르는 듯하였다.
밤이 새도록 이들과 함께 섬진강을 지켜주어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바람 한 점도, 구름 한 조각도, 비 한 방울도...
오늘의 나를 있게 하기 위해 그 허송세월과 같은 세월을 보내고 또 보내었다.
아! 나의 존재여!

하산을 해야 하는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 몇 시간도, 단 한 밤도 같이 있어 주지 못하는 나약함에 미안함이 들었다.

 

▲ 조문환
 

강 건너 망덕포구에 가로등이 하나 둘 밝혀진다.
강과 바다의 접점인 섬진대교로 전조등을 길게 밝히고 차량들이 바쁘게 다닌다. 

배알도와 망덕을 잇는 태인대교에는 바구리봉을 넘어선 태양이 걸렸다.
그 빛으로 섬진강은 하나의 화려한 조명이 내려앉은 초대형무대가 되었다. 

객석이 된 고포와 용포마을, 섬진대교 건너 배알도와 망덕포구에서는
뜨거운 갈채라도 터져 나올 듯하였다.

갯벌에서도 온갖 현란한 작품들이 연출되고
그 언저리에 쉬고 있던 통통배도 적절히 몸을 움직이며 호흡을 맞춰주었다. 

이 모두가 섬진강 환타지가 아닐까? 

피니쉬 라인을 통과한 섬진강과 6백리를 함께 몸으로 때우면서 사계절을 보낸
섬진강 사나이의 개선을 환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호국의 산 두우산에서의 그 전율과 배알도의 화려한 공연이 겹쳐져
나를 섬진강환상곡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한다.

두우산, 난 널 호국의 산으로 명명하노라! 

지난 1천 년 간 외적의 방패를 넘어,
앞으로 천 년 만 년 섬진강을 지키고 섰으라! 

그 섬진강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넘어,
갈사만과 광양만을 적시고 태평양의 자양분을 이루어
인류의 번영과 영화를 이루는 시원이 되라!

[출처] 섬진강 에세이 (99)|작성자 월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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