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박용기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박사

▲ 안개 낀 아침의 한강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은 서울을 신비한 도시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2013 HelloDD.com

큰 딸이 성수동의 한강변 아파트로 이사를 한 후 가끔 딸 집에 머물게 되면서 한강의 새로운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었다. 안개가 자욱한 이른 아침부터 눈부신 한 낮을 거쳐 석양이 서울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녘을 지난 후 어둠이 서울을 포근히 감싸는 저녁 늦은 시간까지 한 자리에 서서 조용히 흘러가는 강물과 강가로 펼쳐진 강남의 스카이라인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나에게 매우 드문 일이었다.

서울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2학기때부터 대학원을 마치고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기까지 17여년 동안을 살면서 젊은 날의 모든 기억이 만들어진 익숙한 곳이지만, 서울을 떠난 지 벌써 36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낯 선 곳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강 건너 보이는 강남의 풍경은 지금도 생소한 느낌이 든다.
 

▲날이 밝아오면 넓게 드리워진 하늘 밑으로 한강변에 펼쳐진 강남의 스카이라인이 이방의 도시에 와 있는 느낌이 들게 한다. ⓒ2013 HelloDD.com
내가 한강과 무슨 큰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겐 오랫동안 간직해온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1960년 초등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오게 되었는데, 터널을 지나면 코끝에 까만 검댕이가 묻는 증기기관차가 끄는 완행열차는 정읍을 출발하여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무려 9시간 이상이 걸려 노량진 역을 지나 한강 철교에 들어서고 있었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잘 보이지 않았는데 어렴풋이 한강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때 함께 있던 막내누나가 나에게 역사 수업을 시작했다.

"이곳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쳤던 노량 앞바다야."

그 소리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감격에 겨워 밖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난생 처음 보는 어둠이 깔린 한강은 정말 큰 바다처럼 넓고 거대해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렇게 큰 강을 본 적이 없는 누나 역시 '노량진'이라는 팻말이 쓰인 역을 막 지나온 터라 강 폭이 1 km가 넘는 한강을 보면서 노량 앞바다로 착각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노량진 앞의 한강과 남해의 노량 앞바다가 전혀 다른 곳인 것을 안 것은 그 후로 한참을 지난 뒤였다. 지금도 기차를 타고 노량진을 지나 한강철교에 들어설 때면 그때의 일이 기억나 내 입가에는 나만 아는 미소가 일곤 한다.
 

▲햇빛이 부서지는 한 낮의 한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때로는 마치 강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2013 HelloDD.com
처음 서울에 올라와 산 곳이 왕십리 부근이어서, 초등학교 시절 겨울이면 한양대학교 앞쪽에 있던 미나리꽝에서 썰매를 타고, 여름이면 그리 멀지 않은 중랑천과 살곶이다리 근처까지 놀러 다녔던 기억이 있으니 한강의 본류는 아니지만 지류와는 약간의 인연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강은 크게 변하지 않았겠지만 강변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기 이전과 이후의 모습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높이 솟은 빌딩과 아파트, 수없이 건설된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를 끊임없이 오가는 차량의 행렬, 그리고 한밤중에도 환하게 밝혀진 강남의 스카이라인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강을 하루 종일 보고 있노라면 때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였다. 안개 낀 아침의 한강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은 서울을 신비한 도시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날이 밝아오면 넓게 드리워진 하늘 밑으로 한강변에 펼쳐진 강남의 스카이라인이 이방의 도시에 와 있는 느낌이 들게 한다.
 

▲한강은 계속해서 변해가고 있는 주변의 모습이나 흐름과 반대 방향으로 불어오는 바람과는 상관 없이 늘 같은 모습으로 낮은 곳을 택하여 흐르고 있었다. ⓒ2013 HelloDD.com
또 석양 빛에 곱게 물든 한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하루 동안 겪었던 어려웠던 일들은 흐르는 물위에 띄워 보내고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으로 위로를 받으라는 말을 건네오기도 한다. 늦은 밤에도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분주한 삶은 강변도로 위에 아름다운 빛의 궤적을 만들어 놓는다.

그런데 햇빛이 부서지는 한 낮에 한강의 흐름을 한참 보고 있자니 물 흐름의 방향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분명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를 터인데, 강물 위에는 서에서 동으로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며 내가 방향을 잘 못 알고 있나 여러 번 확인했지만,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작은 물결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까를 한참 고심하다가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나와 비슷한 의문을 가진 사람이 또 있었다. 이러한 의문의 답은 바로 바람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겨울철엔 대부분 북서풍이 불기 때문에 강물의 표면에서는 바람의 영향으로 물결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생긴다는 것이다. 겨울철 한강의 평균 수심은 5 ~ 6 m 정도라고 하는데, 겉으로 보이는 표면의 작은 물결과는 반대로 물줄기는 조용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즉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석양 빛에 곱게 물든 한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하루 동안 겪었던 어려웠던 일들은 흐르는 물위에 띄워 보내고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으로 위로를 받으라는 말을 건네온다. ⓒ2013 HelloDD.com
한강은 변해가고 있는 주변의 모습이나 흐름과 반대 방향으로 불어오는 바람과는 상관 없이 늘 같은 모습으로 낮은 곳을 택하여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큰 강이 보여주는 자연의 섭리 앞에서 세상을 이처럼 내가 가야 할 길을 따라 순리대로 살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종환시인의 '강'이라는 시가 마음에 들어왔다.
 

가장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간다
가장 더러운 것들을 싸안고 우리는 간다
너희는 우리를 천하다 하겠느냐
너희는 우리를 더럽다 하겠느냐
우리가 지나간 어느 기슭에 몰래 손을 씻는 사람들아
언제나 당신들보다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흐른다

▲늦은 밤에도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분주한 삶은 강변도로 위에 아름다운 빛의 궤적을 만들어 놓는다. ⓒ2013 HelloDD.com

▲새벽까지도 환하게 밝혀진 강남의 스카이라인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으로 낮은 곳을 택하여 흐르면서 자연의 순리를 조용히 들려주고 있는 한강과 그 위에 투영되어 어른거리는 반영이 오히려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3 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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