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박용기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박사

아내가 열심히 가꾸는 덕분에 나는 겨울 내내 예쁘게 피어나는 장미꽃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내가 열심히 가꾸는 덕분에 나는 겨울 내내 예쁘게 피어나는 장미꽃을 구경할 수 있었다
끝날 것 같지 않게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도 결국 가고 봄이라는 말이 그리 낯설지 않게 들리는 때가 되었다. 이렇게 자연의 시간은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을 늘 느끼게 한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아직 겨울 기운이 차갑게 남아 있을 즈음부터도 봄의 냄새를 미리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곳이 있다. 바로 남쪽을 향한 앞 베란다가 그곳이다. 작은 텃밭 가꾸기가 꿈인 아내는 이 좁은 베란다도 소중한 공간으로 생각하면서, 화분에 여러 종류의 화초와 함께 몇 가지의 채소도 오목조목 키우고 있다.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상추, 들깨, 부추, 치커리 등과 함께 도라지, 아욱, 청경채 그리고 마늘까지 오목조목 좁은 공간을 잘도 활용하여 키우고 있다.

추운 겨울을 잘 이겨낸 난들이 꽃대를 키워내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추운 겨울을 잘 이겨낸 난들이 꽃대를 키워내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에 문외한인 나에게 아내는 식물들을 키우는 미다스의 손이라 생각된다. 25년 전쯤 뿌리도 없는 아주 작은 토막을 사다 키운 행운목이 거실의 천정에 닿고, 그것을 잘라 다시 심은 나무가 또다시 천정에 닿도록 키워 두 번이나 꽃을 피우고 지금 또 다시 꽃대가 올라오는 것을 보는 나에게 이러한 표현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워 대부분의 채소들이 사라지고 화초들도 고생을 하였지만, 날이 조금 풀리자 자연의 경이로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추운 겨울을 잘 이겨낸 난들이 꽃대를 키워내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겨울을 힘겹게 이겨낸 청경채 한 그루도 노란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지난 가을 열매를 맺었던 들깨의 씨가 떨어져 다시 앙증맞은 새 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얼마 전부터 우리 집 베란다에는 봄이 한창 진행 중이다.

겨울을 힘겹게 이겨낸 청경채 한 그루도 노란 꽃을 피우고 있다.
겨울을 힘겹게 이겨낸 청경채 한 그루도 노란 꽃을 피우고 있다.
계절이 바뀌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우리의 계절들이 참 예쁜 우리말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봄' 역시 순수한 우리말로 어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 것 같다. 그 중에 나에게 가장 그럴 듯 하게 다가오는 것은 최창렬씨가 '아름다운 민속어원'이라는 책에서 말한 설명이다. 그는 계절 '봄'은 '보다'라는 말의 명사형인 '봄'에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봄이 되면 겨울 동안 죽은 것 같은 나무와 풀에서 새싹이 돋고 꽃이 피며 벌과 나비 등 모든 생명들이 돌아와 활발히 움직여 세상이 볼 것으로 넘쳐나는 것을 새로 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가을 열매를 맺었던 들깨의 씨가 떨어져 다시 앙증맞은 새 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지난 가을 열매를 맺었던 들깨의 씨가 떨어져 다시 앙증맞은 새 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영어의 'spring' 역시 뭔가 생동감 넘치는 봄의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봄을 'spring'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약 500여 년 전인 16세기부터라고 한다. 샘물처럼 새싹이 솟아 오르는 계절 혹은 용수철처럼 생명력이 넘치는 계절이라는 의미로 봄을 'spring time' 혹은 'spring season'이라고 부르다가 아예 봄을 'spring'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전에는 봄을 'lent'라는 말로 불렀다고 하는데, Lent란 기독교에서 예수의 고행을 기리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부활절 일요일 전날까지의 40일간을 일컫는 사순절을 의미한다. 부활절은 춘분 다음에 오는 첫 만월 즉 음력 보름이 지난 후 첫 주일이 되므로 lent는 3월과 4월에 걸쳐있게 되어 봄의 시작과 일치한다. .

나에게 아내는 식물들을 키우는 미다스의 손이라 생각된다. 25년 전쯤 뿌리도 없는 아주 작은 토막부터 키우기 시작한 행운목이 거실의 천정에 닿고, 그것을 잘라 다시 심은 나무가 또다시 천정에 닿도록 키워 세 번이나 꽃을 피우는 것을 보는 나에게 이러한 표현은 결코 무리 가 아니다.
나에게 아내는 식물들을 키우는 미다스의 손이라 생각된다. 25년 전쯤 뿌리도 없는 아주 작은 토막부터 키우기 시작한 행운목이 거실의 천정에 닿고, 그것을 잘라 다시 심은 나무가 또다시 천정에 닿도록 키워 세 번이나 꽃을 피우는 것을 보는 나에게 이러한 표현은 결코 무리 가 아니다.
아내가 열심히 가꾸는 덕분에 나는 겨울 내내 예쁘게 피어나는 장미꽃을 구경할 수 있었고, 밖의 계절에 앞서 봄의 향기를 미리 맡을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 어찌 보면 아내와 나는 개미와 배짱이 같은 관계인 것 같다. 아내의 노력에 비해 나는 이러한 것들을 잘 가꾸는 일에는 소홀하면서 피어난 꽃이나 싹들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사진의 피사체로 활용하기만을 즐기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은퇴를 하게 되면 아내는 조용한 전원생활을 원했다. 하지만 좀 더 사회 활동을 하기 원하는 내가 그리 달가워하지 않자 아내는 무척 실망했었다.

봄이 되면 가슴 설레는 여자들뿐만 아니라 나처럼 배짱이족 남자들의 가슴 속에도 새싹이 돋고 향기 나는 아름다운 꽃잎 하나쯤은 품게 되는 게 아닐까?
봄이 되면 가슴 설레는 여자들뿐만 아니라 나처럼 배짱이족 남자들의 가슴 속에도 새싹이 돋고 향기 나는 아름다운 꽃잎 하나쯤은 품게 되는 게 아닐까?
물론 지금은 외손녀를 맡아 키워야 하는 상황이 되어 현실적으로 아내의 꿈이 실현되기 어렵게 되었지만, 작은 텃밭이라도 있는 도시 근교의 주택은 여전히 아내의 로망이라 할 수 있다. 텃밭을 가꾸는 일에는 그다지 열성적일 것 같지는 않은 나 역시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작은 공간 하나쯤은 가까이에 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봄은 여성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성의 계절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봄이 되면 가슴 설레는 여자들뿐만 아니라 나처럼 배짱이족 남자들의 가슴 속에도 새싹이 돋고 향기 나는 아름다운 꽃잎 하나쯤은 품게 되는 게 아닐까? 집 밖의 계절에 앞서 이 봄을 느끼게 해주는 아내의 손길에 고마움을 전하며 이기철 시인의 '생의 노래'로 이 봄을 맞이 하고 싶다.

집 밖의 계절에 앞서 이 봄을 느끼게 해주는 아내의 손길에 고마움을 전하며, 근심이 비단이 되는 하루, 상처가 보석이 되는 한 해를 노래하는 봄을 맞이하고 싶다.
집 밖의 계절에 앞서 이 봄을 느끼게 해주는 아내의 손길에 고마움을 전하며, 근심이 비단이 되는 하루, 상처가 보석이 되는 한 해를 노래하는 봄을 맞이하고 싶다.
옴 돋는 나무들은 나를 황홀하게 한다. 흙속에서 초록이 돋아나는 걸 보면 경건해진다. 삭은 처마 아래 내일 시집 갈 처녀가 신부의 꿈을 꾸고 녹슨 대문 안에 햇빛처럼 밝은 아이가 잠에서 깨어난다. 사람의 이름과 함께 생애을 살고 풀잎의 이름으로 시를 쓴다 세상의 것 다 녹슬었다고 핍박하는 것 아직 이르다 어느 산기슭엔 샘물이 솟고 들판 가운데 풀잎이 씨를 읽힌다. 절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지레 절망을 노래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꽃잎 하나씩은 지니고 산다. 근심이 비단이 되는 하루, 상처가 보석이 되는 한 해를 노래 할 수 있다면 햇살의 은실 풀어 내 아는 사람들에게 금박 입혀 보내고 싶다. -이기철의 '생의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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