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 박용기 한국표준과학연구원

 

▲ 우리 집 베란다에는 요즈음 아침이면 푸른 빛의 나팔꽃이 예쁘게 피어나고 있다. ⓒ2013 HelloDD.com

우리 집 베란다에는 요즈음 아침이면 푸른 빛의 나팔꽃이 예쁘게 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 나팔꽃의 잎들은 마치 시래기처럼 시들 시들하고 넝쿨도 힘이 없어 전체적인 모양새는 정말 볼품이 없다. 그래도 꽃만은 싱싱하고 예쁘게 피어 베란다의 아침을 환하게 만들어 주는 기특한 놈이다.

이 놈이 우리 집 베란다에 오게 된 것은 지난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확실한 경로는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보니 아내가 가꾸는 부추 화분에 정체 모를 식물의 싹이 나더니 잎이 나고 줄기를 뻗기 시작했다. 잎의 생김새가 나팔꽃과 같아 일단 뽑아버리지 않고 두고 보기로 하였다. 조금 지나니 잎도 무성하고 넝쿨을 뻗기 시작하여 받침대도 세워주었지만 주변에 있는 키가 큰 도라지도 감고 그것도 모자라 작은 부추까지도 휘어 감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돌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격이었다.

 

▲ 그런데 이 나팔꽃의 잎들은 마치 시래기처럼 시들 시들하고 넝쿨도 힘이 없어 전체적인 모양새는 정말 볼품이 없다. 그래도 꽃만은 싱싱하고 예쁘게 피어 베란다의 아침을 환하게 만들어 주는 기특한 놈이다. ⓒ2013 HelloDD.com

하지만 아내는 나팔꽃이 분명하다며 꽃 필 날을 기대하면서 열심히 가꾸어 주었다. 그런데 8월이 다 가도록 잎만 무성할 뿐 도무지 꽃을 필 기미가 없었다. 밖에 있는 나팔꽃들은 벌써 아침이면 예쁜 꽃을 피우고 있어 이제 이 놈의 정체가 의심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의심을 한 것은 아내뿐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잎은 나팔꽃인데 아직까지 꽃을 피울 기미가 없는 것을 보니 분명 좀 다른 잡초인가 보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하였다. 외손녀를 돌보기 위해 집에 오는 아주머니 역시 “밖에 있는 나팔꽃들은 벌써 꽃을 다 피웠는데 이놈은 나팔꽃이 아닌가 보네요” 하며 한 수 거들었다.

이러한 훈수로 인해 아내의 믿음이 흔들렸을 뿐만 아니라 잎과 넝쿨이 하도 무성하여 원래 그 화분의 주인인 부추가 밀려나게 되었다고 판단한 아내는 드디어 이 정체불명의 잡초를 뽑아버리기로 하였다. 덩치가 커서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지 못하고 뽑은 후 우선 베란다 구석에 모아둔 안 쓰는 화분들 위에 그냥 던져 놓았다.

 

▲ 어제까지만 해도 꽃망울 같은 것을 구경할 수 없었던 뽑힌 넝쿨에서 예쁜 나팔꽃이 피어 있었다. ⓒ2013 HelloDD.com

그런데 그 다음날 아내가 베란다 청소를 하다가 깜짝 놀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꽃망울 같은 것을 구경할 수 없었던 뽑힌 넝쿨에서 보란 듯이 예쁜 나팔꽃이 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랴부랴 다시 가져다가 원래의 자리에 심고 물을 주면서 아내와 나는 우리의 성급함을 탓하며 나팔꽃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였다. 하루만 더 기다려 줄 걸….

다시 심은 나팔꽃의 잎과 줄기는 이미 시들 시들한 상태였는데 원상으로 회복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날 이후로 매일 아침 꽃들은 싱싱한 모습으로 피어나고 있다. 그것도 아내가 참 좋아하는 청색의 작은 나팔꽃이!

나팔꽃에는 몇 가지의 전설이 얽혀있다. 중국에서는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와 이 꽃이 관련 있다고 해서 견우화라고도 불린다. 이는 나팔꽃이 피는 시기가 칠석 부근이어서 그렇게 연관 지었다고도 한다.

 

▲ 옥에 갇힌 아내는 아침에 창 밖을 내다 보니 나팔처럼 생긴 꽃이 핀 넝쿨이 성벽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2013 HelloDD.com

또 다른 좀 슬픈 전설도 있다. 중국에 그림을 잘 그리는 화공이 아름다운 아내와 살고 있었는데, 고을 원님이 아내를 탐하였지만 아내가 말을 듣지 않자 아내를 성의 높은 감옥에 가두었다. 아내를 그리워하던 화공이 그림을 하나 그려가지고 성 밑에 가서 높은 성벽만 바라보며 지내다 그림을 성벽 밑에 파묻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게 되었다. 옥에 갇힌 아내는 밤마다 남편의 꿈을 꾸고는 이상해서 아침에 창 밖을 내다 보니 나팔처럼 생긴 꽃이 핀 넝쿨이 성벽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서양에서는 이 꽃을 '아침의 영광 (morning glory)'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정원에서 꽃 가운데 앉아 있기를 좋아하던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다. 그런데 이 공주는 매우 예민하여서 햇볕이 뜨거워 지기 전에 반드시 성안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햇볕을 받아야 피는 꽃들은 볼 수가 없어 공주는 슬퍼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성으로 돌아오면서 울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흘리는 눈물이 땅에 떨어지자 작은 씨앗으로 변하였다.

 

▲ 공주의 푸른 눈에서 흐른 눈물로 만들어 진 꽃이라는 뜻으로 “아침의 아름다움 (The beauty of the morning)”이라고 이름 붙였다. ⓒ2013 HelloDD.com

몇 주가 지난 후 아침 일찍 공주가 정원을 걷고 있는데 그녀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새 꽃을 보게 되었다. 그 꽃은 넝쿨을 뻗으며 벽을 타기도 하고 나무 가지를 감기도 하면서 아침 일찍 꽃을 피우고 있었다. 공주의 푸른 눈에서 흐른 눈물로 만들어 진 꽃이라는 뜻으로, 혹은 공주의 아침 산책길에 많은 즐거움을 주었다는 뜻으로 이 꽃을 '아침의 아름다움 (The beauty of the morning)' 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여름 작은 씨 하나가 어디에서 날아와 시작된 우리 집 베란다의 나팔꽃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깨닫게 하였다. 성급하면 굴러온 복도 차버릴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생활의 교훈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믿음 역시 조금 더 참아주는 아량과 배려가 필요함을 깨닫게 하였다.

그동안 조금만 더 믿어 주고 참아 주었으면 더 좋았을 가족과 이웃들과의 관계도 생각나게 하였다. 또 지지리도 모자라고 성급한 나를 뽑아버리지 않고 오랫동안 참아주시는 창조주의 인내와 사랑을 깊이 느끼게 하였다. 아침에 피어나 오후가 되면 조용히 사그라지는 나팔꽃을 보면서 자신을 '때가 되면 추억도 버리고 떠나야 할 한 송이 나팔꽃'이라고 노래한 이해인 수녀님의 시가 가슴에 와 닿는다.

 

▲ 이 여름 작은 씨 하나가 어디에서 날아와 시작된 우리 집 베란다의 나팔꽃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깨닫게 하였다. 아침에 피어나 오후가 되면 조용히 사그라지는 나팔꽃을 보면서 자신을 ‘때가 되면 추억도 버리고 떠나야 할 한 송이 나팔꽃’이라고 노래한 이해인 수녀님의 시가 가슴에 와 닿는다. ⓒ2013 HelloDD.com

나팔꽃/이해인

햇살에 눈뜨는 나팔꽃처럼
나의 생애는
당신을 행해 열린 아침입니다

신선한 뜨락에 피워 올린
한 송이 소망 끝에
내 안에서 종을 치는
하나의 큰 이름은
언제나 당신입니다

順命보다 원망을 드린
부끄러운 세월 앞에
해를 안고 익은 사랑

때가 되면
추억도 버리고 떠날
나는 한 송이 나팔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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