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이 들어서기 전의 '아레나 디 베로나'. 2000년전 로마 시대의 검투경기장 중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곳이다.
관객이 들어서기 전의 '아레나 디 베로나'. 2000년전 로마 시대의 검투경기장 중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곳이다.
"이 오페라는 장대한 규모로 진행된다. 혁신자는 수줍음을 모른다. 그의 아이다는 모든 음악가, 나아가서는 작곡가 자신까지도 능가해 버렸다." - 러시아 작곡가 무소르그스키

오페라 '아이다' 1막이 끝나고 객석에 불이 들어온다. 막간이다. 여름밤 공기가 1막의 여운을 머금고 있다. 곳곳에 허리를 펴고 서서 엉덩이를 두드리는 관객들이 보인다. 어깨에 아이스박스를 둘러멘 상인들이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손에 들고 관객들과 눈을 마주치려 애쓴다. 한여름 야외 오페라 공연장의 막간 풍경이다.

베로나 오페라축제의 막간 상인들에게는 아이스크림보다 매상이 좋은 품목이 있다. 방석이다. 2천 년 전 쌓아올린 로마 검투사 경기장의 돌무더기에 앉아서 두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관객들이 엉덩이가 안녕하지 못한 덕분이다. 입장하는 통로에서 빌려주는 방석을 미처 집어 들지 못한 관객들은 방석 상인과 눈을 마주치려 애쓴다. 이 또한 베로나 오페라축제의 막간 모습이다.

베르나 오페라축제 막간의 방석 상인.
베르나 오페라축제 막간의 방석 상인.
다시 막이 오른다. '아이다'의 하이라이트는 2막 개선행진곡. 올림픽 개막식에서 자주 들어서 친근한 곡이지만 베로나 오페라축제에서는 특별한 무대 경험을 맛볼 수 있다. 압도적인 스케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개선행진곡이 울려 퍼지면 백마 탄 병사들이 등장한다. 장군 라다메스의 병사들이다. 고대 로마 경기장에 세워진 오벨리스크 사이로 고대 이집트 병사들이 말을 타고 행진하는 장면은 베로나 오페라축제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베로나 오페라축제의 이 무대에는 코끼리나 낙타가 등장한 적도 있다고 한다. 나일강을 재현하기 위해 풀장을 만들어 무대에 올린 적도 있다. 이집트 국왕이 수에즈 운하 개관을 기념하여 베르디에게 고가로 의뢰한 작품인 오페라 '아이다'는 야외 공연이 많은 레퍼토리 중 하나다. 파라오 통치 시절의 이집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전쟁과 사랑 이야기. 압도적인 스케일의 무대장치가 공식이 되어버린 작품이다.

야외 공연이 장기인 오페라 아이다는 베로나 오페라축제의 단골 레퍼토리이며 가장 인기가 많다. 특별하게 거창한 세트를 짓지 않아도 된다. 공연장인 아레나 자체가 2천 년 시간 여행을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광장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다리를 쉬인 여행객들이 아레나의 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시간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레나의 돌계단에 앉아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부르는 아리아를 듣고 있노라면, 2만 명의 관객들과 함께 단체로 2천 년 시간 여행을 다녀오는 듯하다.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과 국경을 인접한 보덴 호수에 베르겐츠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매년 여름 '베르겐츠 오페라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이다. 베르겐츠 오페라 페스티벌은 보덴 호수에 떠 있는 수상무대에서 펼쳐지는데, 한 시즌에 하나의 오페라 작품을 공연하고 시즌이 끝나도 세트를 허물지 않는다. 오페라를 좋아하는 여행객들은 호수에 남겨진 세트를 보러 베르겐츠에 다녀오기도 하는데, 호수의 풍광과 어우러진 무대와 세트가 하나의 설치 예술이라 할 만하다.

베르겐츠 오페라 축제가 열리는 보덴 호수의 수상 무대. 오페라 '아이다' 세트 공사 중이다.
베르겐츠 오페라 축제가 열리는 보덴 호수의 수상 무대. 오페라 '아이다' 세트 공사 중이다.

베르겐츠와는 달리 베로나의 무대는 매일 허물어진다. 보통의 오페라축제는 한 시즌에 한 작품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베로나는 예외다. 매일 다른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 한 번의 공연에 2만 명이 넘는 관객이 다녀가므로 매일 무대장치를 허물고 다시 만들어도 수지타산이 맞는다는 얘기다.

얼마 전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이라는 대한항공 CF 시리즈를 흥미롭게 봤는데, 베로나 오페라축제가 '직접 느끼고 싶은 유럽' 2위로 선정된 것을 보고 약간 놀랐다. 클래식 음악축제로서는 유일하게 순위에 오른 것인데, 그 많은 유럽의 음악축제들 중에서도 클래식 팬들의 성지와도 같은 곳들, 그러니까 루체른, 잘츠부르크,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제치고 베로나가 대중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베로나 오페라축제가 어느새 우리나라 대중 여행자들에게까지 매력적인 유럽의 대표 여행 코스가 된 것이다.

베로나 오페라축제의 매력은 2천년 역사를 품은 '아레나 디 베로나'의 아우라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다른 음악축제들이 그 어떤 막강 레퍼토리를 무대에 올린다할지라도 당분간 이 순위를 뒤집지는 못할 듯하다.

◆참고문헌

1. 유럽음악축제 순례기 (한길아트, 박종호 지음)
2. 이 한 장의 명반 클래식 (현암사, 안동림 지음)
3. http://www.arena.it/en-US/HOMEen.html(베로나 오페라축제 공식 예매사이트)

이정원 선임연구원은 책과 사람에 쉽게 매료되고, 과학과 예술을 흠모하며, 미술관과 재즈바에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펜탁스 카메라로 순간을 기록하고, 3P바인더에 일상을 남깁니다. 시스템과 팀워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습관과 절차 자동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 연구원은 이정원의 문화 산책을 통해 자연과 인류가 남긴 모든 종류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정원 연구원은 서울대학교 전기공학부에서 공부하고 동 대학에서 의용생체공학 석사를 마쳤습니다. 현재 ETRI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KAIST에서 바이오및뇌공학과 박사과정을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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