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부터 장관·기관장까지 온통 화두는 '창조경제'
자칫 국가R&D·출연연 산적한 문제 삼키는 '블랙홀' 될수도
'창조경제' 둘러싼 연구현장과의 괴리감 원인부터 살펴야

지난 10일 서울 과총회관에서 열린 과학기술인·정보통신인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올 한 해도 '창조경제'을 위해 노력을 경주해달라고 주문했다.
지난 10일 서울 과총회관에서 열린 과학기술인·정보통신인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올 한 해도 '창조경제'을 위해 노력을 경주해달라고 주문했다.

새해 화두도 '창조경제'다. 과학기술계 신년회는 온통 이 단어의 성찬이다.

그 정점은 지난 10일 서울 과총회관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통신인 신년인사회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한 해가 창조경제의 싹을 틔운 한 해였다면 새해에는 결실을 거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출연연은 중소·중견기업의 R&D 전진기지가 되어 기술을 지원하고 원천기술을 선제적으로 개발해 민간에 제공해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이 창조경제 실현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한 것이다.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도 출연연의 역할을 거듭 역설했다. 최 장관은 지난 8일 대전 DCC에서 열린 연구개발특구 신년인사회에 참석했다. 그는 "2013년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꾸준한 기술개발과 기술이전 성과가 있었다. 출연연이 중소기업에서 개발하기 어려운 기술 개발에 주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 "대덕의 인프라와 역량은 혁신클러스터 최적지"라며 대덕연구개발특구가 창조경제의 중심지로 시너지를 내달라고 주문했다.

대통령과 주무부처 장관만 '창조경제'를 역설한 게 아니다. 올해 각 출연연 시무식의 화두도 '창조경제'였다. 출연연 원장들은 한결같이 기관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창조경제 실현에 우리 앞장서자고 구성원들을 독려했다. 2014년에는 창조경제의 결실을 맺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통령부터 장관, 출연연 기관장까지 이렇게 한 목소리로 강조한 만큼 '창조경제' 실현을 위한 움직임은 올해도 일사불란하게 전개될 것 같다. 무엇인가 눈 앞에 큰 결과가 나타날 것 같은 기대감도 갖게 한다. 과연 그럴까. 새해부터 시작된 과학기술계 각 기관의 시무식, 특구 신년회, 과학기술인 신년회를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뭔가 허전함을 지울 수가 없다. '창조경제'라는 성찬이 벌어졌지만 그것이 자꾸 메아리 없는 함성으로 들린다. 무엇보다 가슴 뛰는 희망이나 감동이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현장과의 '괴리감' 때문일 것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인 신년인사회에서 만난 한 지인은 "온통 창조경제다. 구체성이 없다"고 일갈했다. 연구개발특구 신년인사회에서 만난 또 다른 지인도 "조직개편에 정신이 없다. 그런데 출연연의 근본적인 미션 보다는 창조경제라는 구호에 구색을 맞추려는 느낌이 강하다. 3~4년 뒤가 걱정된다"고 토로했다. 한 출연연 워크숍에서는 "너무 휘둘리지 말자. 우리가 잘 할 수 있는걸 찾아서 묵묵히 그 길을 가자"는 얘기도 나왔다고 한다.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위와 아래가 따로 논다는 얘기다. 온도차도 크다.

문제는 가시적인 성과를 강조할수록 그 괴리감이 깊어진다는 사실이다. 위에서는 당장 성과물을 내놓으라고 채근인데, 현장에서는 그런 성과물이 무슨 공장에서 제품 찍어내듯 나올 수 있는 것이냐고 볼멘소리다. 최 장관이 지난 8일 대덕 연구현장 방문에서 강도높게 출연연을 질타한 것은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출연연 원장들에게 사정도 하고, 읍소도 하고, 때로는 겁도 줬다. 그런데 전혀 변한게 없다"는 최 장관에 발언에 연구현장은 순식간에 살얼음판 분위기다. 당장 기관장 몇 명에 대한 ‘살생부’가 또 회자된다. 

눈여겨 볼 대목은 이같은 최 장관의 질타에 '불쾌감'을 드러내면서도 지적 내용에 동의하는 분위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최 장관의 발언 내용을 전한 대덕넷 기사에는 수십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한결같이 "이제는 출연연이 변해야 한다. 그런데 출연연 스스로 변하기는 힘들 것이다"는 내용이다. 출연연이 전혀 변하게 없다는 최 장관의 질타와 출연연 스스로 변하기는 힘들다는 연구현장의 자평은 사실상 이음동의어다.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맥락인 셈이다.

새해 화두가 창조경제인 게 큰 문제가 아니다. 올 한 해 목표를 정하고 방향을 제시한 것이니 이해못할 일도 아니다. 오로지 '창조경제' 뿐인 게 문제다. 창조경제에 대해서는 냉랭하지만 출연연 문제와 관련해서는 뜨겁게 반응하는 분위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창조경제 실현에 출연연이 앞장서야 한다는 슬로건 자체 보다, 과연 출연연이 지금 그럴 수 있느냐(혹은 그래야 하느냐)는 것에 대한 걱정이자 반감이 큰 셈이다.

순서가 틀렸는지도 모른다. 창조경제라는 고지를 향해 출연연을 앞세우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체질변화가 먼저 이루어졌어야 한다. 싸울 의지도, 싸울 힘도, 싸울 무기도 변변치 않은 병사에게 맨 먼저 고지로 달려가 깃발을 꽂으라 하니 사령관은 답답하고 병사는 힘들 수밖에 없다. 그 고지가 맞는지 100% 확신할 수도 없다. 그래서 “작년과 올해 출연연 화두는 ‘창조경제’가 아니라 ‘전투력 극대화’가 됐어야 한다”는 한 과학자의 쓴소리는 사석이 아니라 공석에서 논의되어야 할 주제라고 본다.  

이래저래 과학기술계, 특히 출연연은 어수선한 한 해가 될 것이다. 당장 짚고넘어가야 할 문제가 한 두 개가 아니다. 그런데도 너나없이 ‘창조경제’만 말한다. 창조경제도 중요하지만 이 화두가 자칫 국가R&D, 출연연의 총체적인 문제를 모두 삼켜버리는 블랙홀이 되어서는 안된다. 어찌 과학기술계와 출연연의 문제가 창조경제 뿐이겠는가.

지난 8일 연구개발특구 신년인사회에 이어 대덕의 연구현장을 방문해 출연연의 변화를 강력하게 주문하고 있는 최문기 미래부 장관.
지난 8일 연구개발특구 신년인사회에 이어 대덕의 연구현장을 방문해 출연연의 변화를 강력하게 주문하고 있는 최문기 미래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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