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 박용기 UST 전문교수 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전문연구원

이른 아침, 여명의 아름다운 빛이 하늘을 물들이는 시각에 가까운 바닷가로 나갔다.<Pentax K-3, 19 mm, 1/60 s, F/3.5, ISO 800>
이른 아침, 여명의 아름다운 빛이 하늘을 물들이는 시각에 가까운 바닷가로 나갔다.<Pentax K-3, 19 mm, 1/60 s, F/3.5, ISO 800>

"약상자에는 없는 치료제가 여행이다. 여행은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잘 알려진 예방약이자 치료제이며 동시에 회복제이다"고 대니얼 드레이크는 말했다.

이제 막 두 돌이 된 외손녀를 키우면서 무척 지쳐있는 아내에게 모처럼 이런 약과 같은 여행을 떠날 기회가 왔다. 딸아이가 전문의 시험을 마치고 며칠간의 휴가를 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손녀를 떼어 놓고 훌쩍 떠날 수 있는 홀가분한 여행은 아니었다. 외할머니를 잠시도 떨어지기 싫어하는 외손녀에게 비록 2박 3일의 기간이라 해도 할머니와의 이별은 이 세상 무엇보다도 참기 힘든 일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인턴과 레지던트의 수련기간 동안 거의 쉼 없이 달려온 딸에게도 이번의 여행은 자신에게 휴식을 주고 몸을 추스르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 자주 보지 못했던 엄마와 아이와의 관계를 조금이나마 회복시켜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한 샘이었다.

딸은 해외 여행을 떠나고 싶어했지만 어린 아이를 대리고 가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아 양양에 있는 한 리조트로 겨울여행을 다녀오기로 하였다. 아이의 짐은 이것 저것 챙길 것이 많았다. 그래도 가능하면 일찍 가서 전망 좋은 방을 배정 받으려고 아내가 서둘러 짐을 챙겨 출발하였다.

해가 처음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때부터 수평선 위로 둥실 떠 오르기까지의 시간을 보니 불과 3분 정도 밖에 흐르지 않았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는 생각을 하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가 새롭게 느껴졌다.<Pentax K-3, 200 mm, 1/80 s, F/5.6, ISO 100>
해가 처음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때부터 수평선 위로 둥실 떠 오르기까지의 시간을 보니 불과 3분 정도 밖에 흐르지 않았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는 생각을 하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가 새롭게 느껴졌다.<Pentax K-3, 200 mm, 1/80 s, F/5.6, ISO 100>

강원도로 들어서니 며칠 전 내린 눈으로 하얗게 장식된 산들이 아름다운 모습들을 펼쳐 보이기 시작하였다. 대관령을 넘어 바다가 보이는 길을 따라 한참을 달린 후 고속도로를 벗어나자 아직 눈이 쌓여 미끄러운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거북이 걸음으로 조심 조심하여 한참을 가니 드디어 우리의 숙소가 나타났다. 서둘러 간다고 했지만 이미 전망 좋은 방은 우리 차지가 아니었다. 그나마 바다가 건물 사이로 보이는 방을 하나 얻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스페인 풍으로 지어져 있는 이국적인 건물과, 탁 트인 동해 바다 그리고 쌓여 있는 눈과 석양 빛에 물들어 저만치 보이는 설악의 봉우리들은 굳이 힘들여 외국에 가지 않아도 이국적 느낌을 느끼기에는 충분하였다. 아니 우선 너무도 익숙한 환경과 반복적인 일상을 훌쩍 떠나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은 박하사탕을 한꺼번에 열 개쯤 먹은 것 같이 시원해 왔다.

김남조 시인은 겨울 바다에 서서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Pentax K-3, 200 mm, 1/125 s, F/5.6, ISO 100>
김남조 시인은 겨울 바다에 서서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Pentax K-3, 200 mm, 1/125 s, F/5.6, ISO 100>

그런데 저녁을 먹고 짐을 정리하던 아내가 이 가방 저 가방을 열심히 뒤적이면서 이상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아뿔싸! 화장품을 넣어놓은 파우치를 그만 집에 놓고 온 것이었다. 서둘러 짐을 싸다 보니 그만 빠뜨리고 온 것이었다. 밤 중에 그것도 양양의 바닷가에서는 어찌 구해 볼 수도 없는 화장품들이라 아내는 너무 난감해 하였다. 그래서 다음 날 일정의 최 우선 과제는 속초로 나가 필요한 화장품 세트를 구하는 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보다 앞서 동해의 새벽빛과 일출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는 일정을 머리 속에 그리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여명의 아름다운 빛이 하늘을 물들이는 시각에 아내와 딸 그리고 외손녀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방을 조용히 빠져 나와 가까운 바닷가로 나갔다. 불행히도 가까운 해안은 철책이 쳐 있어 바닷가에 아주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붉은 아침 해를 마주한다는 일은 나로서는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감동이었다. 빠르게 모습을 바꾸는 아침 해를 향해 정신 없이 셔터를 눌렀다.

겨울바다로 가는 길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Pentax K-3, 26 mm, 1/25 s, F/22, ISO 100>
겨울바다로 가는 길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Pentax K-3, 26 mm, 1/25 s, F/22, ISO 100>

그 후 사진을 정리하면서 해가 처음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때부터 수평선 위로 둥실 떠 오르기까지의 시간을 보니 불과 3분 정도 밖에 흐르지 않았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는 생각을 하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가 새롭게 느껴졌다. 이러한 시간들이 모여 지금까지의 나를 만들어 왔음을 깨닫게 되면서 나에게 남은 시간은 또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김남조 시인도 겨울 바다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았을까? 시인은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속초에 들러 화장품 세트를 사고 어시장에 들러 문어와 멍게를 산 후, 서둘러 숙소로 돌아와 아쿠아월드에서 아이와 잠시 물놀이를 하는 등 바쁜 둘째 날의 일정이 조금 버거웠는지 그동안 외손녀를 키우느라 아플 틈도 없던 아내가 그만 체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여행이 주는 약 말고 진짜 소화제를 먹어야만 하게 되었다.

또 다른 아침은 또 다른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해가 떠오르면서 건물과 바다 위에 황금빛 빛을 드리우는 모습이 아름다웠다.<Pentax K-3, 150 mm, 1/15 s, F/11, ISO 100>
또 다른 아침은 또 다른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해가 떠오르면서 건물과 바다 위에 황금빛 빛을 드리우는 모습이 아름다웠다.<Pentax K-3, 150 mm, 1/15 s, F/11, ISO 100>

마지막 날 아침은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날씨가 좀 쌀쌀해졌다. 전 날 보았던 아름답던 여명의 빛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또 다른 아침은 또 다른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다행히 해가 떠오르면서 건물과 바다 위에 황금빛 빛을 드리우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마지막 날의 일정은 눈 덮인 설악산을 잠시 음미하는 것으로 잡았다.

바람이 다소 강했지만 다행히 케이블카는 정상적으로 운행되어 어린 외손녀에게 설악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눈이 덮인 설악산은 힘이 넘치는 근육질의 건장한 남성미를 느끼게 하였다. 설악산에서 나와 오색약수터 부근에서 먹은 산채와 시원한 동치미가 곁들여진 점심 식사도 이번 여행에서 만난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그냥 떠나 오기가 서운하다는 아내의 요청에 따라 낙산해수욕장에 들러 겨울바다를 잠시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어찌나 바람이 거세던지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외손녀는 이 번 여행에서 만난 눈과 바다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강한 바람이 몰아치는 모래 사장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케이블카를 타고 설악산에 올랐다. 눈이 덮인 설악산은 힘이 넘치는 근육질의 건장한 남성미를 느끼게 하였다. 멀리 동해가 인사를 한다.<Pentax K-3, 10 mm, 1/200 s, F/11, ISO 100>
케이블카를 타고 설악산에 올랐다. 눈이 덮인 설악산은 힘이 넘치는 근육질의 건장한 남성미를 느끼게 하였다. 멀리 동해가 인사를 한다.<Pentax K-3, 10 mm, 1/200 s, F/11, ISO 100>

미국에서 발표된 한 여행관련 조사 연구에 의하면 중 고등학교 시절에 교육적인 여행을 경험하는 것이 성장한 후 몇 가지 면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즉 학교 생활과 미래의 직업 선택에 있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예를 들어 여행 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그렇지 못한 학생들에 비해 보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에도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성적도 높으며 성인이 되었을 때 연간 소득도 12 % 정도 더 높았다고 한다.

여행을 다녀 온 후 긴장이 조금 풀린 아내는 한 이틀 먹지도 못하고 몸 져 누워버렸지만 그래도 마음에 쌓여있던 스트레스는 아마 겨울 바다와 설악산의 시원한 바람 속으로 훨훨 날려 보낼 수 있었으리라. 또한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게 다가왔을 어린 외손녀에게는 마음과 생각이 훌쩍 자라게 하는 좋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디서 배웠는지 "아뿔싸" 라는 말을 혼자 중얼거려 우리를 웃게 만들었던 두 살배기 외손녀의 말처럼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도 있었고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 아이의 해맑은 미소가 함께 했던 이번 여행은 동해의 새벽빛과 상쾌한 눈바람으로 채워진 정신적 피로 회복제였다.

어디서 배웠는지 "아뿔싸" 라는 말을 혼자 중얼거려 우리를 웃게 만들었던 두 살배기 외손녀의 말처럼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도 있었고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 아이의 해맑은 미소가 함께 했던 이번 여행은 동해의 새벽빛과 상쾌한 눈바람으로 채워진 정신적 피로 회복제였다.<Pentax K-3, 24 mm, 1/2500 s, F/4.0, ISO 100>
어디서 배웠는지 "아뿔싸" 라는 말을 혼자 중얼거려 우리를 웃게 만들었던 두 살배기 외손녀의 말처럼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도 있었고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 아이의 해맑은 미소가 함께 했던 이번 여행은 동해의 새벽빛과 상쾌한 눈바람으로 채워진 정신적 피로 회복제였다.<Pentax K-3, 24 mm, 1/2500 s, F/4.0, ISO 100>
겨울바다/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싶던 새들도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혼령(魂靈)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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