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하늘을 뒤덮고 있던 두꺼운 구름이 사라지면서 독일의 봄은 시작된다. 오랜만에 찾아온 햇살이 마치 깜깜한 동굴 속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눈부시다. 사람들이 독일의 겨울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추위 때문이 아니다. 봄날의 이런 눈부심과 화려함을 맛보면 음산하고 우울한 겨울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항상 행복하기만 한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항상 봄날만 있으면 봄이 이렇게 좋은 줄 알 수 없을 것이다. 겨울이 있기에 봄이 빛나듯이, 불행하고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

대한민국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독일의 역사도 많은 굴곡을 겪어왔다. 하기야 평탄하기만 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고통스러운 시절이 있었기에 그것을 벗어나고자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로 오늘날의 번영을 누리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께서 독일을 방문하셨다. 그리고 많은 한국 사람들이 독일을 배우기 위해 온다. '창조경제'  '창업'이 이번 정부의 화두로 등장하면서 독일의 '히든 챔피언' '중소기업'이 중요한 배울 거리가 된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독일의 오늘은 어제의 독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날 독일의 과학기술과 경제발전이 있게 된 데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는 뜻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해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정상들이 회담을 한 독일 포츠담에 있는 궁궐.
제2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해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정상들이 회담을 한 독일 포츠담에 있는 궁궐.

오늘의 독일은 프로이센의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의 노력에 의해 1871년에 독일제국으로 통일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산업혁명(1760~1830)과 프랑스 혁명(1789~1794)은 유럽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몇 십 년 늦게 시작된 독일의 근대화는 그들을 따라잡으려는 독일 사람들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가 짧은 기간 동안 근대화를 이루면서 ‘빨리빨리’ 문화가 형성된 것처럼 독일도 한때는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에 경제적, 군사적으로 부강해진 독일은 자신감이 넘치면서 다른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확장정책을 펴게 된다. 신흥강국 독일의 팽창정책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충돌하게 되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한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1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많은 신무기(기관총, 대포, 독가스, 화염방사기 등)를 개발하면서 독일의 과학기술이 발전했다. 독일의 기계 산업, 화학 산업이 발전하게 된 근원에는 이렇듯 불행한 역사와 동기가 있다.

패전의 결과로 나타난 사회적, 경제적인 문제들은 독일 국민들의 자부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만다. 불쏘시개로 사용할 만큼 가치가 폭락한 독일 마르크화와 넘쳐나는 실업자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가해진 경제적 형벌이었다.

빈곤과 열등감에 시달리던 독일 국민들에게 ‘빵과 일자리’를 약속하면서 자신감을 불러일으킨  히틀러는 국민적 영웅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그는 고속도로 건설을 통해서 실업자를 구제하고 자동차 생산을 장려한다. 독일의 아우토반과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게 된 근원에 이런 역사적 아이러니가 있다.

자신감을 회복한 히틀러와 나치 정권은 또 다시 팽창정책을 편다. 폴란드,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에 사는 독일 민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침공 또는 합병하고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으로 확대된다.

KIST 유럽연구소가 위치한 자브리켄은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대에 있다. 이곳은 한 때 석탄산업이 활발했고, 철강을 생산하는 제철소가 있다. 석탄과 철강은 무기 생산에 필수적인 자원이다. 그래서 이곳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전쟁에 휘말렸다.

독·불 국경을 지나 한 시간 남짓 프랑스 땅으로 들어가면 ‘마지노 선’이 있다. 1차 세계대전 후에 프랑스는 마지노 장군의 지휘 아래 독일과의 국경선을 따라 장장 750 킬로미터에 걸쳐서 땅굴과 요새를 건설했다. 병사들이 머물 수 있고 화포를 숨길 수 있어서 철옹성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은 탱크를 이용하여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 후방으로 진격했고, 프랑스는 마지노선을 제대로 사용해보지도 못한 채 항복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약 70년이 지났다. 독일인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반성했을 것으로 믿는다. 아직도 전범들을 찾아내어 그 죄를 묻고 있다. 그리고 독일 곳곳에 유대인 학살 기념관이나 추모공원을 세우고 사죄하고 있다.

계절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지만 계절이 순환하듯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비슷한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모두 독일 국민들의 교만함 때문에 발발한 것이다. 교만은 독일 사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대부분이 가질 수 있는 성품이다. 다만 이것이 집단적으로 형성되면서 전쟁 외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독일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듯 수직상승하는 발전이나 진보는 싫어하는 것 같다. 빨리 올라간 만큼 급하게 떨어진 경험을 이미 몇 차례 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지속가능성’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계단을 오르듯 천천히 하나씩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것을 택한 것이다. 그들은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최선의 방책을 찾은 것이다.

우리나라도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쟁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우리가 항상 당했지 다른 나라를 먼저 침공하거나 헤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국력이 약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성이 착하고 현명하기 때문에 그런 악행을 행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오늘날 이렇게 잘 살고 있지 않은가.

멀리 독일에서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에너지가 생성되고 넘치는 곳이다. 그 에너지가 세계로 뻗어나가는데 사용된다면 우리나라의 국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대통령의 방독을 계기로 더 많은 한국인들이 독일과 유럽으로 진출하길 바란다. 그리고 독일 국민이 저질렀던 실수를 우리는 되풀이 하지 않게 되길 바란다.

◆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장 프로필

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장.
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장.
대한민국 4.0시대를 여는 시기로 성숙된 의식과 시스템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이에 이호성 KIST 유럽연구소장은 독일의 과학기술과 그 발전의 바탕이 되는 사회·문화적인 환경에 대해 생생하게 전달해 줄 것입니다.

이 소장은 독일에서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편지나 일기 형식으로 쓸 예정입니다. 이호성 소장은 KAIST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바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근무를 시작, 17년 동안 시간·주파수 표준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광펌핑 세슘원자시계를 개발해 국제적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2003년 이후에는 표준연의 주요보직을 맡아서 후배들의 연구를 지원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연구재단에서 나노·융합단장으로 2년간 근무한 바 있습니다. 2012년 9월 KIST유럽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해 한국과 유럽연합을 잇는 가교역할을 위한 국제협력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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